46화 장시환 (1)
* * *
“다시 찾아와줘서 고마워. 얘기를 좀 더 나눠보고 싶었거든. 마음 편하게.”
“고마운 건 내 쪽이지. 덕분에 생각지도 않았던 보상을 든든하게 얻고 가는데.”
“어차피 당신이 없었으면 공략은커녕, 죽지 않았으면 다행일 던전이었어. 내가 고맙지.”
“서로 이득 본 걸로 하지.”
“그래! 자꾸 같은 얘기 반복하는 것 같다, 그치?”
정유리가 서로에게 감사를 돌리는, 좀처럼 연출되기 힘든 훈훈한 광경에 웃으며 답했다.
내가 잘했다, 내 덕분이다라고 말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에게 감사하는 모습이라니.
흔치 않은 경험이다.
강후는 정유리가 마음의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앞으로도 그녀를 친근하게 대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계산적, 이기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세상으로 다시 나올 일이 있으면 연락해. 내 번호야. 던전 안이 아니라면 무조건 받을 거야.”
강후는 정유리에게 자신의 번호를 넘겼다. 처음으로 상대에게 먼저 연락처를 남긴 케이스가 됐다.
“고마워. 그라운드 제로 밖으로 나가게 되면 꼭 연락할게. 즐겁고 재밌었어.”
“나도 덕분에 기분 전환했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기지 않는 이상, 정유리가 갑자기 세상에 나오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연의 끈을 만들어 뒀으니, 언제든 이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테지.
짧지만 굵었던 정유리와의 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마음도 얻고, 스킬 강화의 기회까지 얻은 알찬 시간이었다.
스킬 강화는 당장 어떤 스킬에 하기보다는 생각을 좀 더 깊게 하기로 했다.
강화하고 싶은 스킬이 많다 보니 생기는 고민이다.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니까.
* * *
서울역으로 돌아오기 전.
임진강역에 도착하기 전에 이예린과 한서연으로부터 거의 동시에 문자가 왔다.
뭔가 싶어서 내용을 보니, 둘 다 똑같은 내용이었다.
차소희가 서울역에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차소희에게 눈을 붙여놓았기에 같은 정보가 수집되는 중일 터.
꽤 오래 눈을 붙여뒀음에도 문제가 없는 것을 보면, 둘 다 실력 있는 헌터를 붙인 모양이었다.
짧게 감사하다는 문자를 두 사람에게 답장으로 보낸 뒤.
안전 버스나 KTX가 아닌 개인택시를 이용해 서울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로를 수정했다.
서울역이 아닌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광주송정역 방면으로 가는 안전 버스를 타기로.
다른 곳의 선택지는 없었다.
광주송정역으로 가는 방법은 서울역 아니면 버스터미널이 전부였기에.
중간에 위험지대가 많아서 KTX나 안전 버스가 아니면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차를 렌트하는 방법도 가능하지만, 중간에 무조건 위험한 일이 생긴다.
‘놈들의 정보력을 생각하면, 꽤 잘 버텼다 싶기도 하군.’
놀라거나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평범한 헌터도 아니고 강동현의 심복인 차소희가 움직였다면, 어차피 시간문제인 일이었다.
오히려 이클립스의 정보력이 상당히 동원되었음에도 꽤 오래 숨바꼭질을 했다고 보는 게 맞다.
시선과 관심이 무서워서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거나, 움츠러드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강해지면 결국 누군가의 눈에는 반드시 띄게 된다.
이것은 필연이고, 당연한 얘기이며,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일이기도 했다.
결국은 차소희와 언제 마주치게 되느냐의 문제인데,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었으면 했다.
적어도 광주송정역에서의 일을 보고 난 뒤였으면 했달까?
왜냐면 그녀가 가진 스탯과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레벨은 현재 기준 최소 250으로 예상되고, 화염 계열에 특화된 마법계 헌터다.
문제는 마법계 헌터이면서 동시에 근접전을 즐기는 성향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부수적으로는 단검을 다룰 줄도 알기에 여러모로 까다로운 상대가 될 수밖에 없다.
‘괜히 사냥개가 아니지.’
의미 없는 별명이 아니다.
한 번 물기 시작하면, 죽기 전까지는 놓아주지 않기에 그녀에게 붙은 별명이다.
정황상 차소희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기보다는, 모종의 이유로 생포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순순히 응할 생각은 없었다.
말이 좋아 생포지, 이클립스의 휘하에서 평생을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수용소 때처럼.
그러면 결국 차소희와 맞설 수밖에 없고, 둘 중 하나는 죽어야 상황이 끝난다.
차소희를 죽일 생각이 없더라도, 협조적이지 않으면 그녀가 먼저 살의를 드러낼 터다.
타협점은 없다.
죽거나, 아니면 살거나.
개인택시를 타고 서울에 도착한 강후는 바로 남산 타워로 향했다.
이예린의 제보에 따르면, 차소희는 여전히 서울역에서 대기 중이었다.
다른 이동을 위해서 서울고속버스터미널로 목적지를 바꾸긴 했는데, 버스 시간이 한참 남은 상태.
그래서 뭔가 하기보다 잠시 바람이나 쐴 겸, 생각을 정리하려고 남산 타워를 목적지로 선택했다.
“조용해서 좋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어서인지, 전망대 안에는 드문드문 몇 명의 사람만 보였다.
커다란 창문 앞에는 각자가 음료를 즐기며 쉴 수 있도록 테이블과 소파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런 형식으로 개조된 지는 2년쯤 됐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장시환 때문이었다.
장시환이 자주 전망대를 찾아오는데, 그의 요청으로 타워 측에서 전망대 층계 전체를 바꾼 것이다.
놀라울 것도 없는 것이 원작에 그렇게 서술이 되어 있다.
‘내가 만든 상황이지.’
강후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빗줄기가 쏟아지는 서울 시내를 내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원작에서 장시환이 서울을 내려다보며 느꼈을 감정이 강후에게도 오롯이 전해졌다.
【장시환에게 있어 전망대란, 항상 미래를 설계하고 느슨해진 지금을 조일 수 있는 장소였다.
그는 이곳에서 늘 기운을 얻고, 앞으로 헤쳐나갈 에너지를 얻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자신이 해내야 할 과업이 많았으니까.】
원작 속의 문구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떠올랐다.
이제 와 생각하니, 저 ‘과업’이라는 단어가 참 무섭게 느껴졌다.
마왕의 아가리에 세상을 던지는 엔딩으로 나아가는 것이 주인공의 과업이었다니.
원작자가 머리에 총을 맞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단 말인가.
관자놀이 어디쯤이 총을 맞은 것처럼 아픈 듯해서 손가락 끝으로 꾹 눌러주었다.
넓은 통유리 앞에서 서울을 보니, 미래가 설계되고 지금을 돌아보는 여유가 절로 생겼다.
특수한 효과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마음에 주는 울림이 있어서일 터다.
‘나 혼자서 열세 개의 별을 전부 상대할 수는 없어. 결국은 나도 아군이 필요해.’
냉정하게 판세를 읽었다.
열세 개의 별 중에 일부는 강후가 직접 손을 써서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놈들은 바보가 아니다.
두세 명은 그렇게 당할 수도 있겠지만, 살아남은 나머지는 힘을 합쳐 공동으로 대응할 것이다.
결국은 판을 크게 짜고, 그 안에 장기 말을 여럿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
왕 혼자 있어서는 차포를 뗀 적이라고 해도, 마와 상, 졸을 이길 순 없다. 결국 외통수에 걸린다.
‘일단 이예린과의 줄은 확실히 잡고. 정유리도 케어하면서, 안영호도 신경 쓰고, 여기에 심연과의 연줄까지 만들면…….’
생각이 명확해진다.
아울러 이후 장시환과 정화 길드에 의해 제거되는 세력의 미래를 바꿔볼 수도 있다.
군벌 ‘심연’의 대장, 이현석에게 어두운 미래가 드리울 이슈가 있으니까.
미래를 내다볼 수 있으니, 지금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도 자연스럽게 밑그림이 그려진다.
바로 그때.
“……!”
강후가 갑자기 휘감아 들어온 특이한 기운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자리에서 고개를 돌렸다.
넘치는 마나 혹은 특유의 살기에서 비롯된 느낌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느낀 감각이었다.
마치 무의식 속에서 이미 상대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인지한 것처럼 찌릿하는 느낌이 들었달까?
고개를 돌린 위치에서 보인 것은 바로 장시환이었다.
원작의 주인공이자, 언젠가 강후가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기도 했다.
장시환, 그는 세상의 종말을 향해서 한없이 질주하고 있는 비극의 원흉이다.
‘VIP 자리였군.’
장시환이 앉은 자리는 남산 전망이 가장 좋은 자리였다. 게다가 앉을 소파도 최고급의 명품 소파다. 그야말로 장시환을 위한 자리인 셈이다.
자연스럽게 스캔된 장시환의 성좌 정보는 10개였다.
전부 스캔이 된 것은 아니다.
첫 목록에 뜨는 성좌의 최대치가 10개이기에 그것까지만 보이는 것이다.
강후가 아래를 살피니, 이런 식의 페이지가 [1], [2], [3]까지 있었다.
심지어 1페이지의 성좌 정보를 제외하고, 2페이지부터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앞서 유청화에게 봤었던 것처럼 ‘침묵의 여인’ 같은 정보 은폐형 성좌가 있는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계약을 맺은 성좌만 서른이야. 미친 거지.’
누구보다 공들여 썼던 주인공에 대한 기억이 어디 가겠는가?
어떤 성좌를 가지고 있는지, 굳이 기억을 되새겨보고 싶지도 않았다.
주인공 버프라는 명분 아래, 생각 없이 밀어준 것들이 한두 개여야지.
강후는 일부러 목록을 꼼꼼하게 살피지 않았다.
지금은 정확히 알려고 하는 게 병이고 독이다.
그래서 자꾸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장시환의 성좌에 대한 기억도 빠르게 털어냈다.
마음먹고 다른 생각을 하니,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어찌저찌 밀어낼 수는 있었다.
‘그래서 재밌을지도.’
강후는 문득 스스로도 미쳤나 싶은 생각을 했다.
한없이 올려다봐야 하는 목표가 생기니, 성장하는 과정이 지루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기적인 수준을 떠나서, 장기, 아니 초장기 적으로도 완벽한 동기부여가 된달까?
장시환을 반드시 뛰어넘겠다는 다짐은 이 세계에 온 이후로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무조건 위만 바라보면서 성장하면 되니 한결 편하지 않은가?
목표 설정을 달리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강후는 아직 장시환이 취하지 못한 미래의 특전이나 기연도 꽤 알고 있었다.
당장은 레벨이 낮아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슬슬 가시권에 들어오는 이득 요소들이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것들은 무조건 다 차지할 참이다.
장시환에게는 쌀 한 톨만큼도 줄 수 없다.
그때, 자연스럽게 강후에게 장시환의 시선이 닿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길게 자란 흑발의 긴 생머리가 맞물려, 퇴폐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창백하고 핏기 없는 얼굴이 시그니처인 강후와는 또 다른 퇴폐미였다.
장시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굵은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전망대에도 사람이 잘 안 오는데……. 의외네요.”
“한번 와보고 싶어서요.”
“여기는 처음이신가 보죠?”
“그렇습니다.”
나름의 억양과 톤을 가진 장시환의 목소리와 달리, 강후의 말은 중저음으로 차갑게 깔렸다.
장시환은 자신을 보고도 유명인을 보았다며 호들갑을 떨지 않는 강후의 반응이 신기한 듯, 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며 피식 웃었다.
백이면 백, 장시환을 보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강후만이 유일하게 장시환을 마주 보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말을 받았다.
남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것이 익숙한 장시환에게는 완전히 별종 같은 반응이었다.
과연 이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질 만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