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팀플레이 (3)
강후의 말을 들은 정유리는 왜, 라는 질문 없이 바로 도망쳤다.
그가 실없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 그대로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10초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강후의 눈에 마치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점점 허물어지는 레간트의 모습이 보였다.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달까?
이대로 두면 자연스럽게 죽어 없어질 느낌이었다.
푸욱!
그래서 단숨에 달려들어서는 레간트의 몸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자살하게 둘 수야 있나.
숨통이 끊어져도 자신이 끊어야, 스킬 강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강탈이 활성화되지 않는 대상입니다.】
【그 대신 스킬 강화(1회)를 보상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이걸 이렇게 얻는다고?’
쉬워도 너무 쉽다.
강후가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그림이 나오지 않길 바라며, 획득의 기쁨을 누리려는 찰나.
쿠콰콰콰!
‘혹시나’는 ‘역시나’가 됐다.
짚이는 것이 있어서 정유리에게 도망치라고 했는데, 우려가 현실이 됐다.
바로 던전의 붕괴였다.
레간트의 후방 100m 지점부터 해서, 마치 세상이 멸망하는 것처럼 던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보스 몬스터 공략이 종료된 것은 맞다. 죽었기 때문이다. 보상도 얻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던전이 무너지고 있다.
그 말은 즉, 여기를 탈출하지 못하면 삶이 끝난다는 얘기다.
보상의 기쁨을 누리려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지랄.”
강후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마 들어온 던전의 입구가 출구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
품속에서 매드 솔라키움을 꺼낸 강후가 미련 없이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스킬 강화는 매드 솔라키움 ‘따위’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가치가 큰 보상이다.
여섯 개 중의 하나를 먹는다고 해서 아까워할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안 먹는 게 미친 짓이다.
그 순간.
강후는 머릿속을 항상 묵직하게 누르는 느낌이 있던 것이 일거에 걷히는 것을 느꼈다.
마치 족쇄를 푼 느낌이랄까?
모든 구속에서 한꺼번에 해방이 되는 느낌이었다.
마나의 흐름은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늘 친구처럼 함께하는 두통도 사라졌다.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고, 시야는 더욱 정확해져서 작은 티끌까지 보일 정도였다.
‘마나 과민증을 완벽하게 억제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었나? 감각 강화까지 같이 경험할 만큼?’
우선 가속과 도약을 활용, 빠르게 현장을 벗어나면서 달라진 몸의 상태를 실감했다.
매드 솔라키움이 단지 마나 과민증의 발현을 잠재워주고, 고통을 진정시키는 효과만 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만성적인 마나 과민증에 억눌려 있던 감각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마약을 손에 댄 느낌이랄까?
순간 황홀경에 빠진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효과는 확실히 알았다.
오늘의 경험이 앞으로 남은 매드 솔라키움을 쓸 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정말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굵은 바위도, 높은 나무도, 넓은 평지도. 모든 것이 블랙홀처럼 지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저 붕괴에 휘말리면, 일개 사람의 목숨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듯했다.
파팟! 팟! 팟!
연속으로 도약을 전개했다.
마나 수급이야 마나 과민증 덕분에 무한에 가까우니 걱정은 없었다.
지금은 고통도 제약도 없는, 사실상 마나 무한, 스킬 무한의 상태였다.
원 없이 도약과 가속을 번갈아서 쓰자, 한참 먼저 출발했던 정유리의 뒤도 따라잡았다.
그녀는 마나가 고갈되면서, 점점 이동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헌터의 흐름이다.
적당히 안배를 하면서 상황에 임하지 않으면, 마나는 몇 분 안팎으로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그때부터는 이렇게 마나가 조금씩 회복될 때마다, 지지부진하게 스킬을 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강후는 마나 걱정이 가장 쓸데없는 사람이었고, 지금 누구보다 선택지가 많은 사람이었다.
“내 손 잡아.”
“벌써 따라온 거야? 이 거리를? 손은 왜?”
“같이 달려보자고. 내가 앞에서 저항을 받아줄 테니까. 손 꼭 잡고 뒤에 있어.”
“응!”
정유리가 강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때부터 예전에 안영호를 구했을 때처럼, 서로의 손을 잡은 가운데 2인 도약이 이어졌다.
* * *
‘벌써 10분 째야. 도약하는 스킬을 쉬지 않고 계속, 그것도 나까지 챙기면서 쓰고 있는데…….’
함께 탈출하는 내내, 정유리는 믿기지 않는 강후의 스킬 활용에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스킬을 마음만 먹는다고 무한대로 쓸 수 있었으면, 그 어떤 헌터도 죽지 않을 것이다.
정유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나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대가 없는 결과는 없음을 알려주는 지표라고. 마치 돈처럼.
만성적인 부족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 바로 마나라고 말이다.
그래서 수많은 헌터가 마나량을 높여주는 아이템에 환장하고 돈을 쓰는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강후는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스킬을 사용했다.
둘이서 6m를 단번에 도약할 수 있는 스킬이면, 분명 마나 소모량이 장난이 아닐 텐데.
이런 스킬을 벌써 수십 번도 넘게 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묵묵히 빠져나갈 루트만 살피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업고 가는 것이 낫다고 느꼈는지, 강후가 그녀를 등에 업고 있는 상태였다.
‘네임드……인가?’
세상이 돌아가는 소식에 어두운 정유리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혹시 헌터들에게는 이름이 알려진 네임드인데, 그라운드 제로에 놀러 오기라도 했는가 싶었다.
던전 안이라서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할 수는 없는 상황.
나중에 밖에 나가는 대로 꼭 검색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정선규’가 자신보다는 분명 레벨이 훨씬 높은 헌터일 것이라고.
그래야 이 무한에 가까운 마나와 스킬 사용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된다. 아니라면 말이 안 된다.
“와…… 한참 벌어졌어. 그리고 거의 다 왔어!”
정유리가 정면과 후방을 번갈아 보며 소리쳤다.
아까는 당장에라도 둘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붕괴 현상이 이제는 꽤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지평선 끝자락쯤일까?
여기서 1분은 가만히 서 있어도 여유가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반면에 앞서 던전에 들어왔었던 입구는 10m 정도를 앞에 두고 있었다.
“이 던전은 당신 없으면 못 들어올 것 같아. 매번 공략할 때마다 이리 도망쳐야 하잖아?”
“그럴 것 같네.”
“진짜 미친 것 같아. 안 힘들어? 지치지 않아? 마나가 계속 샘솟는 거야? 어떻게 된 거지?”
“영업 비밀.”
호기심에 이리저리 캐묻는 정유리의 순수한 질문을 강후가 적당히 얼버무리며 넘겼다.
영업 비밀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은 최대 장점이자, 동시에 최대 약점이기도 하니까.
양날의 검이다.
“나가자, 얼른!”
“그래야지. 나가고 나면 좀 쉬고 싶은데. 괜찮은 나무가 있으면 좀 알려줘. 누워 있게.”
“응! 명당은 내가 잘 알지!”
강후가 슬슬 몸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매드 솔라키움의 기운을 느꼈다.
효과가 끝나고 나면, 밀린 대금을 치르듯 육체가 쏟아지는 피로감을 받아내야 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20분 가까이 도약과 가속만 쓴 시간을 생각하면, 기절만 안 해도 다행일 듯했다.
둘은 바로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던전 밖으로 영향이 미칠 리는 없고, 이제 곧 던전 자체의 리셋이 진행될 터였다.
“고마워! 생각지도 않게 보상이 스킬 강화로 들어왔네? 당신도 그래?”
“응. 어디에다가 쓸지 고민 중이야.”
“나는 변형 스킬을 강화하려고! 이게 내 밥줄이니까!”
그녀는 미련 없이 자신을 일시적으로 검은 연기로 변하게 만들어주는 능력에 쓴 듯했다.
참 이질적인 능력이다.
인간과 비인간의 영역을 수시로 넘나들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니까.
물론 그녀의 장점이기도 하다.
손에 쥔 전리품은 없지만, 강후는 스킬 강화 하나만으로 이미 모든 값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스킬 강화는 암시장에서도 구할 수 없고, 특정한 던전에서 꾸준히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최소 500억 원의 가치.
그것이 스킬 강화에 대한 헌터의 평가였다.
사실상 스킬을 새로 태어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혈화도 스킬 강화 덕분에 광역으로 적의 목숨을 빼앗는 필살 스킬이 되지 않았던가?
어떤 스킬을 강화하건 간에 효과는 확실하게 보장되는 보증 수표라고 볼 수 있었다.
얼마 후.
매드 솔라키움의 약효가 확 빠진 강후가 정유리가 안내한 자리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온몸이 망치로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두통은 생각한 것보다 더 심했고, 몸은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정유리가 말해 준 ‘명당’에 눕자마자 세상 편한 느낌에 그리 행복할 수 없었다.
별 것 아닌 듯하지만, 참 소소한 행복이었다.
그때.
뭔가를 정리하려는 듯이 부산하게 움직이던 정유리가 강후의 옆으로 쓱 다가왔다.
애초에 넓은 나무 위였고, 그녀가 미리 길을 잘 닦아놔서 사실상 고층 쉼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충분히 그녀가 옆에 자리를 잡을 여유도 있었다.
“저기.”
“음?”
“혼자 차가운 나무에 누워 있는 게 안쓰러워 보여서 그런데. 괜찮으면 무릎이라도 베고 누울래?”
“…….”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후.
치열하게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순수하고도 인간적인 말이었기 때문일까?
어지간해서는 바로 대답을 하는 강후도 이번만큼은 입술이 한 번 씰룩이고 말았다.
“그냥 음……. 날 위해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내 길동무, 말동무가 되어줬잖아. 너무 고마워서.”
사람에게 호되게 배신당한 아픔을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같이 가진 여자.
정유리라는 사람은 다른 의미로 특이하다고 여겼다.
앞서 인연을 맺었던 한서연이나 이예린, 윤상미와는 또 다르게 말이다.
특히 강후와의 과거를 늘 떠올리고 미안해하는 한서연과도 결이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뭐, 다른 걸 하자는 것도 아니고 무릎베개 정도야 괜찮지. 머리가 좀 무거울 수도 있는데.”
“괜찮아. 그냥 편하게 누워봐.”
거절하지 않고.
정유리의 무릎, 정확히는 허벅지 안쪽을 베고 누웠다.
던전에서 꽤 많이 땀을 흘렸을 텐데, 그녀에게서는 여전히 짙은 아카시아향이 난다.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또 전력으로 도망친 후의 휴식이라 그런지 몸이 더 나른했다.
눈을 잠깐 감기만 해도 한없이 잠들 것 같은 피로감이었지만, 강후는 절대 잠들지 않았다.
그라운드 제로도 결국은 야생이다. 언제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알 수 없다.
강후가 두 눈을 깜박거리며, 거꾸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와 눈빛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빛 속에는 확실히 순수함이 담겨 있다.
“…….”
잠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로가 서로의 눈빛에 집중한 채, 아무 말도 없었다.
그렇게 두 남녀의 휴식은 고요함 속에서, 서로의 눈빛만을 읽으며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