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설검은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그는 멸절대주인 천휘에게 관심을 보이는 무림맹의 주축들을 일부러 한데 불러 모아서 전각까지 안내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천휘의 명성만큼, 인맥도 그에 걸맞게 넓힐 겸이었다.
그런데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상황이 꼬였어.’
설검의 미간에 골이 깊어졌다.
이들에게는 최대한 천휘와 멸절대의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요량이었다.
한데 지금 이 꼴이 무엇인가?
가장 먼저 보인 광경은 홀로 서 있는 천휘와 쓰러져 있는 후기지수들이었다.
그리고 쓰러져 널브러진 이들 중에는 지금 데려온 문파에 속한 제자들도 몇몇 있었다.
“세곤아!”
곡평은 곤륜의 제자인 육세곤이 쓰러진 것을 보고는 황급히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괘, 괜찮으냐?”
거의 혼절했다가 정신을 차린 육세곤이 곡평과 눈을 맞추고는, 신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사…… 백님?”
“대체 무슨 짓을 당한 게냐?”
질문에 육세곤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곡평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기에는 육세곤의 모습이 성치 않았다.
거기에 옆에는 게거품을 문 채 바닥에 대자로 뻗은 철호도 보이지 않는가.
“사실대로 말해도 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그저 비무를 했을 뿐입니다.”
“비무?”
한편 현재의 상황을 본 설검은 속이 탔다.
난처할 지경이었다.
곧 그는 손에 든 섭선을 꽉 쥐고는, 자신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천휘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입을 달싹였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천휘는 조급해 보이는 설검과 눈을 맞추며, 목검을 어깨에 걸쳤다.
“뭐가요?”
천휘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아주 태연하고, 당당했다.
그 모습에 설검은 순간적으로 울컥했으나, 올라온 감정을 꾹 누르며 다시 입을 뗐다.
“왜 멸절대원들과 화산파의 도사분들이 바닥에…….”
“아, 저거요?”
그가 쓰러진 후기지수들을 보며 말하자 천휘가 그제야 뭔 말인지 알았다는 듯 곧바로 입을 달싹였다.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그냥 비무 좀 한 건데요.”
천휘의 대답을 들은 설검이 깊어지는 미간을 섭선으로 꾹꾹 눌렀다.
‘비무’란 말을 듣자 상황이 바로 이해되었다.
천휘는 그 격이 다른 고수였다.
그렇기에 저 많은 인원을 상대로도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비무을 했기에…….”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럴 만한 것이 일반적인 비무라고 하기에는 쓰러진 이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몇몇은 게거품을 물고 있었으며 몇몇은 엎드린 채로 바들바들 떨었다.
게다가 천휘의 무위라면 상대를 봐 가면서 해 줄 수도 있었다. 한데 상황을 보아하니, 오히려 무위를 뽐낸 듯했다.
그때였다.
“아미타불.”
불호와 함께 여승이 다가왔다.
아미파의 장로, 소연사태였다.
그녀는 천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두 손을 곱게 모아 합장을 했다.
“이렇게 만나 뵈어 반갑소이다. 본 도는 아미의 소연이라고 하네.”
그녀가 눈을 빛냈다.
“본 파를 구해 주어서 고맙소이다.”
그러곤 이내 깊은 감사 인사를 건넸다.
처음 이 상황을 보았을 때는 그녀도 당황했지만, 그건 잠시였다.
그녀에게는 오직 감사만이 존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휘가 누구인가?
바로 아미파를 구해 준 은인이었다.
소연사태의 진심 어린 감사에 천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임무를 했을 뿐인데요.”
담담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걸 들은 소연사태의 눈에는 감동이 물결처럼 요동쳤다.
무림맹을 통해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전에 연통으로 장문인에게 아미파가 무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천휘의 도움이 팔 할 이상이라고 전해 받은 적 있는 그녀였다.
한데 지금 앞의 은인은 그것에 대해서 큰일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지닌바 그릇이 다른 것이다.
‘대협이도다.’
소연사태가 합장을 풀며, 물러났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을 뱉었다.
“혹여나 빈도 혹은 본 파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주게나. 장문인께서도 소도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했으니 말일세.”
순간 그녀의 말을 들은 주변의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미파는 오랜 옛날부터 구파일방이라 하더라도 같은 불가인 소림을 제외하곤 깊은 연을 쌓지 않는 곳이었다.
한데 그런 아미파가 천휘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고 선언했다.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아미파가 앞으로 화산을 돕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하지만 그런 주변인들과 다르게 천휘는 당연하단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나중에 필요하면 말할게요.”
소연사태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게나.”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미련이 없다는 듯이 시원하게 몸을 돌렸다.
애초에 이를 전하기 위해 온 것이었으니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녀로선 이것으로 충분하다 느낀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멀어져 갈 때.
“멸절대주!”
갑자기 힘찬 외침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곡평이 황소처럼 성큼성큼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만면에 분기가 어린 채였다.
“곡평 장로님. 진정…….”
화들짝 놀란 설검이 나서서 말리려 했다.
“비키게.”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곡평은 그를 밀치며, 천휘 앞에 서더니 검지로 육세곤을 가리켰다.
그 뒤 날이 선 언성을 흘렸다.
“자네가 저리 한 것인가?”
“사백님!”
순간 육세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져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 싸움에 부모가 끼어든 것 같은 창피함이 든 것이다.
그때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휘의 입에서였다.
“그렇죠.”
“너무 과한 것 아닌가?”
“네?”
천휘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저게 과하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곡평은 그런 천휘의 반응에 콧잔등을 찡그리며, 바로 말을 덧붙였다.
“저들은 각 문파에서 아끼는 제자들이네. 자네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손속에 사정을 둘 수 있지 않았나?”
“손속에 사정이라…….”
천휘는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어느새 다가와 안절부절못하며 부끄러워하는 육세곤에게 물었다.
“어때요? 손속에 사정을 둘까요?”
천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헉……!”
육세곤은 그 눈빛에 순간 무언가를 느끼고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육세곤의 대답을 들은 천휘는 차가운 눈빛을 지우며, 다시 곡평을 바라봤다.
“저쪽은 괜찮다는데요?”
곡평의 눈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지금 전시 상황에서 저러한 부상을 놔두는 것은…….”
“뭐야, 잘 아시면서 그러시네.”
천휘가 그의 말을 싹둑 잘랐다.
“전쟁 중이니까, 더더욱 비무를 실전처럼 과격하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말하던 천휘가 씩 웃었다.
“저 둘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런 실전과 같은 비무를 반기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
곡평이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정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아미타불. 소협의 말이 맞네.”
곁에 다가와 있던 원종대사가 말했다.
“실전과 같은 비무는 훗날 실제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 걸세.”
“그쪽은 말이 통하네요.”
가벼운 천휘의 말에 설검이 또 한 번 당황했다.
원종대사는 소림의 장로였다.
그것도 한때나마 정파의 가장 주축에 섰던 인물로 그 명성이 드높은 자였다.
한데 저런 말투라니.
하나 원종대사는 설검의 걱정과 다르게 가볍기 그지없는 천휘의 말투에도 자애롭게 웃었다.
“말이 통한다니 다행일세.”
원종대사가 천휘를 보며, 제대로 격을 갖추어 말했다.
“빈도는 원종대사라고 하네.”
“천휘예요.”
간단한 천휘의 말에 원종대사가 이내 미소를 지우며, 나지막이 말했다.
“소도장은 소문과 조금 다르구려.”
“소문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천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소문은 결국 소문일 뿐.
한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직접 만나서 보고, 느껴 봐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천휘로선 당연한 그 말을 들은 원종대사는 짐짓 놀란 듯 그 눈이 살짝 커졌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구나.’
소문을 소문으로 치부하는 것은 어떤 이들이라도 쉽지 않았다.
떠도는 그 말들에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한데 지금 앞의 천휘는 정말 소문을 소문으로만 치부하는 모습이었다.
“전에 소림에 방문했었다고 들었네.”
“예전에 연이 있어서요.”
“그것도 모두 사제에게 들었네.”
원종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입을 다문 그는 천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미소를 머금었다.
“허허, 소도장과는 나중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먼.”
“자세한 이야기요?”
“왜? 싫은가?”
“네.”
일순간 원종대사를 제외한 설검과 철수비검 그리고 곡평마저도 식겁하며 원종대사의 눈치를 살폈다.
원종대사는 현 무림맹 내에서도 드높은 위치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저런 어투라니.
모두가 원종대사가 화를 내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할 무렵.
“허허.”
그들의 생각과 다르게 원종대사는 흥미롭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소도장이구려.”
그는 색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누가 자신에게 이렇게 말을 했었던가.
빙긋 웃던 그가 입을 달싹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빈도와 이야기를 나눠 주겠는가?”
“후에 올 때 빈손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져온다면야, 괜찮죠.”
원종대사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원하는 것이 있나 보구먼.”
천휘가 씩 웃었다.
“맞아요.”
“무엇인가?”
물음에 천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은은한 적빛이 감도는 눈을 뜬 천휘가 원종대사의 하단전을 훑었다.
어둠 속에 묻힌 자그마한 금광.
그리고 천휘는 알고 있었다.
저 자그만 금광이 지닌 법력이 소림사를 방문했을 당시 만났던 나한승들의 것보다 더욱 밝고, 찬란한 것임을.
“소림의 신공이라는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을 한번 보고 싶네요.”
원종대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빈도와 비무를 하자는 게로군.”
“그렇죠.”
원종대사는 잠시 고민했다.
잃을 것이 많은 비무였다.
만약에 패배한다면 소림의 명예가 실추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알겠네.”
원종대사가 나직이 말했다.
“대신 비무는 아무도 모르게 가능하겠나?”
천휘가 피식 웃었다.
그의 속내를 바로 눈치챘기 때문이다.
‘승패를 숨기잔 거네.’
천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달싹였다.
“그러죠.”
승패를 숨기든, 말든 관심 없었다.
무상대능력만 보면 될 일이었다.
“허허, 시원하군.”
원종대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찾아오겠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렸다.
원종대사마저도 전각에서 빠져나가자 철수비검과 곡평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본인은 철수비검이라 하네.”
“곤륜파의 곡평이네.”
* * *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천휘는 멸절대와 화령단을 상대로 계속해서 비무를 펼쳤다.
“컥!”
“정신 차리죠?”
그리고 그만큼 천휘는 목검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목검만이 아니었다.
그는 쉬지 않고 입을 움직여서 상대하는 이들에게 조언을 남겼다.
“내공을 용천혈로 잘 흘려요. 그쪽에서 발은 한 발자국 더 움직이고.”
이런 천휘의 조언에, 멸절대원들은 초반엔 의문을 품었었다.
어떻게 자신들의 무공을 이토록 정확하게 알고 그 흐름을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
하지만 그것이 비무와 함께 계속 이어지자, 그들은 의문을 떠올릴 틈도 없었다.
머릿속엔 오직 하나뿐이었다.
‘막아야 한다!’
그렇게 천휘가 목검으로 연신 멸절대와 화령단을 두들기고 있을 때.
벌컥!
돌연 전각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말끔한 인상의 미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극(太極)을 연상시키는 청·백색의 도백을 입은 미청년의 등장에 멸절대원들 몇몇이 바로 반응했다.
“옥기린……?”
“일광 소협이 왜 이곳에……?”
그때 문을 열고 주변을 살피던 옥기린이 연무장의 중앙에 있는 천휘를 발견하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천휘 소도장!”
반갑다는 듯 천휘를 부른 그는 바로 내달리듯 달려와, 천휘의 앞에 섰다.
그리고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무량수불. 오랜만입니다.”
웃으며 읍을 취하는 옥기린을 보던 천휘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뗐다.
“무슨 일이죠?”
인사도 없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옥기린은 살짝 당황한 눈치였으나, 곧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아직 모르시나 보군요.”
옥기린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이번에 같이 임무를 수행하게 돼서 인사를 나누고자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