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14화 (314/391)

314화

“사제!”

천휘가 나오자, 누구보다 먼저 반긴 것은 다름 아닌 천향이었다.

목검을 휘두르던 그녀는 천휘를 발견하자마자, 만면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곧바로 발을 움직였다.

도복이 살짝 팔랑거림과 함께 그녀가 암향표를 펼치려던 그때.

저벅.

천휘가 그보다 먼저 발을 뗐다.

흑적색 도복의 바짓단이 살짝 흔들린다 싶더니, 그의 신형이 명멸하면서 단숨에 허공을 가르며 쏘아졌다.

눈 깜짝할 새였다.

환영처럼 공간을 격한 천휘는 연무장의 중앙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고요했다.

아무런 소리도, 기파도 없었다.

극성의 비천행보였다.

그렇게 불현듯 공간의 중앙에 나타난 천휘는 가만히 고개를 움직였다.

은은한 적빛이 감도는 두 눈동자가 마치 이슬처럼 맑게 주변에 있는 이들을 한 명씩 담아냈다.

모두 넋을 놓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모두 모여 있네요.”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에 천향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사제! 무슨 일 때문에 칩거한 거야?”

암향표를 거두고 가장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 위해 터져 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호광개와 단리관천을 시작으로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사숙님!”

“대주! 괜찮소?”

“계속 안 나오셔서 걱정했는데, 몸은 괜찮습니까?”

멸절대와 화령단이 뒤섞인 채 모든 이들이 천휘를 반기며, 둘러쌌다.

약 육십에 가까운 인원수.

천휘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입을 열었다.

“계속 수련은 하고 있었겠죠? 설마 저 없다고 쉰 것은…….”

“어떻게 수련을 쉬겠어?”

“하루도 빠지지 않았네.”

“열심히 했습니다!”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나왔다.

그들의 눈에서 타오르는 열망이 엿보였다.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은 천휘의 대단함을 직접 목도한 이들이었다.

그의 압도적인 무위를.

그렇기에 그들은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천휘와 나란히 서기 위해서.

도움이 되기 위해서.

“눈빛은 좋네요.”

천휘는 그런 그들의 눈빛을 읽더니 미소를 머금고는 옆구리에 찬 화월을 검집째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어디 확인해 볼까요?”

“확인?”

모두가 그 말에 의아해할 때.

스윽―

천휘가 오른손의 검지를 그들에게로 쭉 뻗어서, 오라는 듯 까닥였다.

도발적인 손가락질이었다.

그와 함께 천휘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덤벼요.”

순간 대부분이 멈칫했다.

말의 의도를 알아챈 것이다.

비무.

천휘는 수련의 성과를 다름 아닌 비무로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멸절대와 화령단이 잠시 멈칫하는 그때.

타앗!

쏜살같이 나아가는 이가 있었다.

천향이었다.

그녀는 천휘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바로 발을 떼며 달려갔다.

망설임은 없었다.

고수와의 비무는 기연과 같았다.

특히 천휘 같은 절세고수와의 비무는 다시 없을 기연인 법.

어찌 이 기회를 놓치겠는가.

‘사제와는 오랜만의 비무야.’

그녀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며 매화기공의 공력이 서서히 퍼졌다.

땀에 젖은 도복에 노을이 번졌다.

극성에 다다른 매화기공의 공력을 모두 끌어내자, 빛을 발한 것이다.

‘어중간하게 힘을 조절했다간 망해.’

그녀는 과거 화산파에서 했었던 천휘와의 비무를 떠올리며, 긴장했다.

전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그래야, 일방적으로 얻어터지지 않으니.

그녀는 공력을 밑으로 인도했다.

마치 심장이 뛰듯 힘차게 대주천을 질주하던 매화기공의 내력이 이윽고 발바닥, 용천혈(涌泉穴)에 다다르고.

파앙!

그녀의 바짓단이 폭발했다.

절정의 암향표가 펼쳐진 것이다.

그녀의 신형이 뭉개졌다.

너무나도 빠른 암향표의 속도에 그녀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길어졌다.

한겨울의 한파가 날 선 칼날처럼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천휘와의 간격이 빠르게 좁혀졌다.

십 장, 구 장, 칠 장, 사 장, 일 장.

그리고 바로 코앞!

쿠웅!

천향이 힘을 줘서, 진각을 밟았다.

그녀가 내디딘 진각에서부터 거미줄과 같은 경파가 사방으로 퍼졌다.

뒤늦게 먼지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이야!’

속도를 유지한 천향이 손에 쥔 목검을 바닥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끌고 가더니 곧장 위로 올려 쳤다.

암향표의 속도를 함께 받은 목검이 순간 흐릿해지며, 이윽고 사라졌다.

그저 새하얀 빛살만을 남겼다.

극성에 다다른 쾌검이었다.

반월처럼 휘둘러진 검격에 주변 공기가 갈라지며, 소음을 터트렸다.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저런 쾌검이라니!”

호광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천향이 무공을 제대로 펼치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실력은 그가 추측했던 것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저 실력이면 단리관천보다도…….’

그가 슬쩍 옆을 바라봤다.

그 옆에 선 단리관천 또한 충격을 받았는지, 두 눈이 부릅떠져 있었다.

둘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멸절대 모두가 천향의 무위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한편 천향은 목검을 쥔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절정의 암향표에 이어서 펼친 매화낙섬(梅花落暹)은 지금 그녀의 한계를 넘어선 검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단 일수.

일수에 승부를 봐야만 했다.

“수련은 열심히 했나 보네요.”

천휘가 눈을 내리깔며, 속닥였다.

천향이 휘두른 쾌검이 바로 턱밑까지 다가왔으나, 그는 여전히 고고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검이 닿으려는 그 순간.

스윽―

천휘가 뻗었던 오른손이 사라졌다.

아니, 너무나도 빠르게 움직여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곧 그의 오른손이 턱을 노리며 휘둘러진 목검을 향해 불쑥 튀어나와서는.

턱.

엄지와 검지로 검신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화아아아악!

둘 사이에 거친 바람이 일어났다.

천향의 땀에 젖은 머리가 위로 솟구치고 도복이 크게 부풀었다.

그녀가 휘두른 검의 여력이었다.

“흡!”

거친 경파의 폭풍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팔을 들어서 얼굴을 가렸다.

그들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강렬한 여파의 폭풍이었다.

보통의 쾌검이 아니란 뜻이었다.

하지만 그 쾌검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천휘의 손에 잡혔다.

그것도 엄지와 검지, 단 두 손가락에.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

호광개가 잇새로 신음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쉬이 보기 힘든 기예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의 검을 막을 때나 볼 수 있는 기예였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천휘가 선보였다.

천향이 펼친 쾌검을 상대로.

그것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천휘와 천향의 무위 격차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와 절정 고수의 차이만큼 벌어져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한가?’

호광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천향이 휘두른 것은 목검이었다.

보통 저런 강렬한 검격이 실린 상태라면, 필시 여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어떤가?

목검은 무사했다.

여력을 모두 흘렸다는 뜻이었다.

‘헤아릴 수가 없어.’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천휘라는 인물은 이미 그로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내 최고의 수였는데…….”

겨우 두 손가락에 잡힌 목검을 본 천향이 한숨을 뱉듯 말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해서 이뤄 낸 경지로 펼친 공격이었는데, 전혀 소용이 없었다.

허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좋은 검격이었어요.”

천휘가 그런 그녀를 보며, 칭찬했다.

“응?”

그에 천향이 놀란 듯 천휘를 바라봤다.

여태 칭찬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칭찬을 할 줄 모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칭찬이라니?

“하지만 조금 아쉽네요. 여기서 매화낙섬을 펼칠 생각이었다면 그 흐름을 잘 파악했어야 하는데.”

말하던 천휘가 목검을 쏙 빼냈다.

“……!”

천향이 당황하며, 천휘를 바라봤다.

목검을 세게 파지한 상태였다.

그런데 목검은 저항감도 없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아무런 감촉도 없이 자연스럽게.

두 눈 멀쩡히 뜨고 코를 베인 것 같았다.

그러나 천휘는 천향이 놀라거나 말거나, 목검을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이렇게 말이죠.”

그리고 목검 끝부분이 바닥에 닿은 순간.

저벅.

오른발을 가볍게 내디뎠다.

하나 그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그의 발바닥 아래 경파가 사방으로 뻗쳐 나가며, 꽃잎처럼 분분히 흩어졌다.

극성의 암향표가 보인 조화였다.

“두 눈 똑똑히 뜨고, 잘 봐 둬요.”

말과 함께 그의 소매가 너울졌다.

목검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바닥에 닿았던 목검은 뻗어 낸 경파의 흐름을 실으며, 위로 승천했다.

천향이 휘두른 것과 같은 검로.

다른 이들에겐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이것은…….’

천향만은 알았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밑에서부터 위로 솟구치는 검격의 움직임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암향표와 매화검법.

각각 다른 무공은 원래부터 하나라도 되는 양 흐름을 타며 검로를 그려 갔다.

‘이렇게 휘두르는…….’

문득 그녀의 머리가 환해질 무렵.

‘응?!’

이어지는 검격에 그녀가 당황했다.

솟구치는 목검이 멈추지 않은 것이다.

눈 깜빡할 사이에 턱 끝에 닿을 듯이 다가온 목검을 본 그녀가 황급히 눈을 굴려, 천휘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급히 눈짓으로 말했다.

‘서, 설마 아니지?’

눈짓을 읽은 천휘가 웃었다.

‘이, 이제 어떤 것인지 알겠어!’

그 미소에 모골이 송연해진 천향이 간절한 눈빛으로 호소했지만.

‘직접 맞아 봐야 더 잘 알죠.’

천휘는 태연하게 눈짓으로 답했다.

‘사제!’

순간 천향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목검이 궤적을 완성했다.

빠각!

천향의 몸이 위로 붕 떴다.

이어서 그녀는 공중에 부양한 상태로 이 장 가까이 날아가 쓰러졌다.

쿵!

바닥에 먼지가 일었다.

쓰러진 그녀가 몸을 잘게 떨다 축 늘어졌다.

기절이었다.

“…….”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멸절대가 식은땀을 흘렸다.

천향이 사저라 했다.

한데 천휘는 사저인 그녀를 거침없이 공격해서, 저렇게 기절시켰다.

그들이 슬쩍 화령단을 봤다.

그리고 당황했다.

화령단은 단주인 천향이 쓰러졌건만, 태연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인걸.”

“사숙님은 역시나 인정사정없네.”

익숙한 듯 보이는 태도였다.

그때 목검을 어깨에 걸친 천휘가 다시 검지를 까딱이며, 말했다.

“뭐 해요? 다음 안 오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령단은 서로 눈을 맞추며, 대열을 갖췄다.

천휘가 저렇게 나오는 이상, 이미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멸절대보다 낫네요.”

천휘는 아직 눈치를 보고 있는 멸절대를 지그시 노려보더니, 목검을 툭툭 움직여 어깨를 두드렸다.

그 눈빛을 마주한 멸절대는 등골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실수한 건가?’

‘나, 나섰어야 했나?’

그들이 뒤늦게 실수를 알아챌 때.

스윽―

천휘는 멸절대를 보던 시선을 거두면서, 기수식을 갖춘 화령단을 봤다.

“먼저 올래요? 제가 갈까요?”

물음에 화령단은 지체 없이 곧바로 보법을 펼치면서, 천휘에게로 달려들었다.

* * *

멸절대가 머무는 전각으로 한 무리의 일행이 빠르게 다가갔다.

“칩거를 끝낸 것이 사실인가?”

천중검문의 장로, 철수비검의 물음에 선두에서 걷던 설검이 빙긋 웃었다.

“그렇습니다.”

철수비검의 눈이 깊어졌다.

그만이 아니었다.

“아미타불. 드디어 보게 되는구려.”

“본 파의 은인…….”

“매화신협이라…….”

그와 같이 따라온 소림의 원종대사와 아미파의 소연사태 그리고 곤륜파의 곡평 또한 눈이 깊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곧 목적지인 전각이 보였다.

“저곳이…….”

설검이 접은 섭선으로 전각을 가리키며 말하려다, 입을 멈췄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 때문이었다.

퍼걱! 퍼억!

“으아아악!”

“그, 그만!”

“살려…… 컥!”

무언가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비명 소리가 울리며 다가서던 그들이 흠칫했다.

“……!”

“설마 적이……!”

당황해 잠깐 멈칫한 이들이 다급하게 달렸다.

이윽고 그들이 현판조차 없는 대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들은 그대로 굳었다.

“쯧쯧, 얼른 일어나요.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한 줄 알아요?”

흑적색의 독특한 도복을 입고 있는 청년 도사가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북편 소리가 터지며 무인들이 나가떨어졌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수십 명이 바닥에 쓰러진 채 골골대며, 짙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대체 무슨 일이…….”

원종대사를 비롯한 일행이 모두 멍하게 앞의 상황을 지켜볼 즈음.

“소협!”

뒤늦게 온 설검이 크게 소리쳤다.

“이런 기연은 다시…… 응?”

바닥에 쓰러진 단리관천에게 쓴소리를 내뱉던 천휘는 갑자기 귀를 두드린 다급한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이내 설검을 발견한 그는 지금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태연한 모습으로 손을 가볍게 흔들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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