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탁자만 있는 삭막한 방 안.
다소곳한 몸짓으로 찻물을 홀짝이던 옥기린이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정갈하고, 깔끔한 다도의 자세였다.
그 반면 천휘는…….
후룩―
마치 술을 마시는 것처럼, 찻물을 입안에 털어 넣은 뒤 탁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매로 입을 쓱 닦았다.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곧 천휘가 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임무죠?”
그 말에 옥기린은 품 안에서 연통을 꺼내더니, 천휘에게 직접 보라는 듯 건네줬다.
부드러운 말을 덧붙이면서였다.
“이것을 보시면 자세히 알게 될 겁니다.”
천휘는 내밀어진 연통을 잡았다.
맹(盟)의 문양이 찍혀 있는 것을 보아하니, 군사가 보낸 것이 확실했다.
이내 그는 연통을 읽어 내려갔다.
― 호북 무혈(武穴), 흑괴단(黑怪團)과 칠요선 풍리(風狸) 출몰. 천정대(天正隊), 멸절대가 확인 요망.
“천정대?”
천휘가 처음 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자.
“빈도가 이끄는 별동대의 명칭입니다.”
옥기린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뱉은 목소리에는 자부심과 더불어 당당함이 짙게 묻어나 있었다.
동시에 그가 눈을 반짝였다.
마치 천휘가 천정대에 대해 더 물어오길 바라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흠, 그래요?”
천휘는 이제 궁금한 건 없다는 듯 따로 묻는 것이 없었다.
그저 뒤이어서 연통을 바라보던 시선을 바로 거두며, 입술을 달싹여 작전에 대해 얘기할 뿐이었다.
“즉 무혈에 나타난 흑괴단과 풍리라는 놈들을 그쪽과 같이 족치라는 거네요?”
옥기린은 도사답지 않게 거침이 없는 천휘의 말투에 짐짓 놀랐으나 곧 차분한 표정을 내비치며, 입을 뗐다.
“아직 세세한 임무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럴 겁니다.”
“알았어요.”
천휘가 연통을 대충 휙 던졌다.
그러자 옥기린은 던져진 연통을 보더니, 소매를 펄럭거리며 원을 그렸다.
스르륵―
던져진 연통은 원을 그리는 옥기린의 손에 이끌리듯 움직이더니 곧 그 안에 턱 잡혔다.
상당히 세밀한 금나수법이었다.
천휘는 원형을 그리던 손짓이 자연스럽게 태극(太極)을 표현해 내고 있음을 눈치챘다.
‘태극수(太極手)?’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극수라면 무당파에서도 가장 익히기 까다로운 수법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걸 방증하듯 방금 옥기린이 펼쳐낸 수법에는 복잡한 투로와 더불어 내공운용이 실려 있었다.
‘천하 삼대 후기지수라더니 재능은 있나 보네.’
천휘가 입매를 비틀었다.
과연 무당파였다.
‘흠, 무공 좀 보고 싶은걸.’
천휘의 눈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마치 심연과도 같이 어두워진 눈동자가 옥기린을 옭아매며, 삼켜 낼 때.
스윽―
마침 던져진 연통을 잡은 옥기린이 이를 다시 품속에 넣으며, 입을 달싹였다.
“곧 임무의 상세 내용이 하달될 겁니다.”
잠깐 말을 멈춘 옥기린이 천휘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탁자에 가려진 복부 쪽을 바라보듯이 눈동자를 살짝 내렸다.
“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전 임무에서 불사천교주의 공격에 복부에 중상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옥기린은 최근 맹에서 떠도는 소문을 언급하며, 말을 덧붙였다.
“군사님께 시일을 늦춰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괜찮을 것…….”
“아뇨, 상관없어요.”
천휘가 그의 말을 싹둑 잘랐다.
입매가 비틀린 채였다.
“이미 나았거든요.”
옥기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소문으로 듣기에 천휘가 복부에 입은 상처는 내장이 보일 정도였다고 했다.
한데 겨우 며칠도 안 돼서 임무를 수행할 정도로 나았다는 것이니.
천휘는 옥기린의 시선을 느끼며 복부를 슬쩍 바라봤다.
아직 흉터는 남아 있었지만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 언제 출발하죠?”
천휘가 물었다.
그에 옥기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없습니다.”
확정된 것은 없다라…….
천휘가 눈을 반개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냥 바로 가면 안 되나?
안 그래도 무림맹에서 머무는 것보다 임무를 수행하는 게 좋았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 무림맹에 머무는 생활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 하루가 멀다고 매일 사람들이 찾아오니.’
이번에 명성을 쌓은 덕분일까.
매일같이 처음 보는 이들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방문해 왔다.
구파일방에서부터 멸절대에 들어가고 싶다는 어린 무인들까지.
그 수가 너무나도 많을 정도였다.
그리고 천휘에게 그들을 상대하는 건 아주 고역이었다.
그냥 발로 걷어차서 쫓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닐 정도였다.
‘그에 반해서 임무는 얼마나 좋아? 그냥 치고받으면 되고 말이야.’
천휘가 가만히 임무를 생각하다 이전의 임무를 회상했다.
‘풍리라고 했나? 그놈도 강하겠지? 이왕이면 농질이나 불사천교주 같은 고수였으면 좋겠는데.’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둘과의 생사결을 떠올리자, 잠잠해졌던 투기가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옥기린은 숨을 삼켰다.
무의식적으로 천휘가 풍기는 존재감에 등이 축축해질 정도였다.
‘이런 존재감이라니…….’
그의 눈이 한없이 요동쳤다.
앞에 있는 천휘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는 존재감은 마치 그의 사부님을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경악할 일이었다.
그의 사부가 누구인가.
바로 태극검제(太極劍帝) 목허진인(木虛眞人)이었다.
작금의 무당파 장문인이며, 현 강호에서 천하제일검을 꼽을 때 무조건 나오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십 대 초반인 매화신협이 아주 오래전부터 천하를 호령하던 그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목허진인의 제자로서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옥기린의 눈에서 말이다.
‘……사부님의 말씀대로 세상은 넓구나.’
옥기린은 속으로 감탄했다.
사실 이번에 이곳을 방문한 것은 합동 임무를 전달하는 것보단 천휘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그리고 전에는 아예 새까매서 심연처럼 보였던 그의 존재감을 이번에야 언뜻 느낄 수 있었다.
아득하고, 넓은 존재감을.
‘하지만…….’
생각하던 옥기린이 눈을 반개했다.
천휘가 대단한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 또한 천휘 이전에 천하제일기재 중 한 명으로 꼽혀 온 이가 아닌가.
그 재능을 기대한 무당파는 자신을 위해서 두 개밖에 없던 영약, 태청단(太淸丹)을 주었을 정도였다.
그런 기대를 어찌 저버리겠나.
‘밀릴 수 없다.’
옥기린은 공간을 점령하며 점점 압박해 오는 천휘의 존재감에 맞서기 위해서 지닌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의 소맷자락이 살랑거렸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새하얀 기운이 흘러나와 운무처럼 짙게 깔렸다.
스으윽―
한순간에 발산된 옥기린의 내공이 흑과 백이란 상반된 빛을 발했다.
이어서 그 두 빛은 갑자기 회전하더니, 하나로 섞여 가기 시작했다.
마치 물감에 탄 것처럼 섞여 가는 빛은 이윽고 하나의 원을 그려냈다.
태극(太極)이었다.
‘응?’
천휘는 자신의 감각을 건드리는 기세에 생각을 멈추고, 옥기린을 봤다.
그에게서 풍기는 기세가 상당했다.
일반적으로 그 나이에는 절대로 쌓을 수 없는 내공이 그에게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화아아악!
옥기린이 손을 움직였다.
방금 전과 같은 수법.
태극수였다.
정갈한 원을 그리는 태극수가 짓누르는 천휘의 존재감을 흐르는 비단과도 같이 휘감으며, 완전히 감쌌다.
그리고 그 순간.
사아아―
들끓던 공기가 잠잠해졌다.
방을 가득 채우던 천휘의 존재감이 산산이 흩어졌다.
찰나였다.
단숨에 사라진 존재감을 확인한 옥기린도 공력을 갈무리했다.
“……대단하시군요.”
옥기린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태연한 척하는 것과 다르게 그는 속으로 크나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자신의 태극수가 그 존재감을 완전히 지우기 전에 존재감이 사라졌다.
즉 앞의 천휘가 알아서 존재감을 지운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에.
‘단숨에 그 기세를 갈무리하다니.’
옥기린은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
내공이란 끌어올리는 것보다 갈무리하는 것이 더욱 힘든 법이었다.
급하게 거두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기혈이 뒤틀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앞의 천휘는 그렇게 빨리 수습하고도 멀쩡했다.
그뿐이랴.
이렇게 빨리 기세를 거두었다는 것은 이 정도의 존재감조차 진심이 아니었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그때 천휘가 입을 달싹였다.
“그쪽은 공력이 꽤 깊던데. 뭐, 영약 좀 많이 먹었나 봐요?”
옥기린이 그 말에 쓰게 웃었다.
“기연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천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기를 잠시.
스윽―
옥기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후에 뵙겠습니다.”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합장을 한 옥기린은 ‘무량수불’하고 작게 중얼거린 뒤 멸절대의 전각을 빠져나갔다.
“합동 작전이라…….”
잠시 뒤 천휘는 창문 밑으로 점차 멀어지는 옥기린에게 인사하는 멸절대를 보다가, 한쪽 입매를 비틀었다.
“알아서 다들 잘하겠지.”
* * *
무림맹의 대회의전.
제갈공은 이미 원형의 탁자에 앉아 있는 주축들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해서, 이번 임무는 멸절대와 천정대(天正隊)가 같이 수행할 겁니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탁자에 앉은 이들은 제갈공의 말에 짐짓 흥미롭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매화신협의 멸절대.
옥기린의 천정대.
두 별동대는 무림맹의 촉망받는 후기지수인 매화신협과 옥기린의 주도하에 최근 창설되었다.
한날, 한시에.
하지만 지금 멸절대와 천정대 사이의 격차는 크게 벌어진 상황이었다.
“임무를 같이 수행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오?”
목영자가 제갈공을 보며, 물었다.
불만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실제로 그는 이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최근 맹 내에 멸절대와 천정대를 비교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멸절대는 천정대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임무를 수행해 왔으며,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쉬운 임무였나?
아니었다.
아미성전, 불사천교 본단 멸살 등 사흑련과의 전쟁에서도 가장 중요한 임무들이었으며, 이를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해 냈다.
거기에 더욱 대단한 것은 멸절대원 중 사망한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천정대도 장강 유역을 침투하려던 사파 세력을 막아 내고 그들을 타파한 공이 있었지만, 멸절대의 공적과 비교하면 빛이 바랠 지경이었다.
무림맹의 중축인 삼단사대 또한 멸절대만큼의 공적은 쌓지 못했을 정도니.
질문에 제갈공은 바로 고개를 돌려, 목영자와 눈을 맞췄다.
“맹에서 바로 움직일 수 있는 대대가 그 두 대대뿐이라 그렇습니다.”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협위대와 파마대 대부분은 장강 유역을 막는 중이며, 핵심 인물들은 이번 불사천교 임무에서 부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대대는…….”
말하려던 목영자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대대인 신룡대는 거의 전멸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사신대는 따로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때 곡평이 입을 열었다.
“삼단은 어떤가? 철혈단이 어느 정도 수습을 마쳤다고 들었네만.”
“급한 부분만 수습했을 뿐이지. 완벽한 회복은 아닙니다. 괜히 나섰다가는 오히려 전력을 더욱 상실할 뿐입니다.”
제갈공은 술술 말을 내뱉었다.
그에 다들 침음을 흘렸다.
다른 삼단인 금위단과 천무단은 최근 손을 잡은 귀원신궁과 십야문을 상대하느라 바쁜 와중이었다.
“결국 그 둘뿐이군.”
누군가가 이번 임무에 납득하며 말할 때.
“그런데 이렇게까지 서둘러야 할 이유가 있는가?”
철수비검이 눈을 굳히며, 말했다.
“이왕이면 철혈단이 회복할 기간을 주고 같이 움직이면 되지 않겠나?”
그 말에 모두가 혹하는 얼굴을 했다.
그런데 그때.
“그럴 시간이 없네.”
무림맹주가 담담한 음성을 흘렸다.
제갈공에게 모든 걸 맡긴 채 침묵하고 있던 맹주가 낸 음성에 모두가 긴장했다.
맹주는 눈을 굴려, 그들을 봤다.
그 눈빛에 모인 이들은 등골에 오한을 느꼈다.
투명한 눈동자가 마치 그들의 속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맹주가 검지를 내뻗었다.
그 순간 군사가 들고 있던 종이가 둥실 떠오르더니, 탁자에 놓였다.
허공섭물이었다.
모두가 허공섭물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펼쳐진 종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
“이것은!”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종이에는 경악할 정보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비천회 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