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313화 (313/391)

313화

그그그극―

비천서고의 문이 닫혔다.

‘쩝, 아직 다 보지 못했는데.’

천휘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닫히기 시작하는 문을 바라봤다.

‘나중에 몰래 찾아와?’

문득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문을 여는 방법이야 이제 다 알고 있었기에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됐어.’

그는 하던 생각을 곧바로 지워 냈다.

문을 여는 것이야 언제든지 가능할 테지만, 몰래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걸리기라도 했다간 후폭풍이 작지 않을 터였다.

어찌 되었든 이곳은 무림맹의 비고(秘庫)이지 않은가.

그때였다.

“잘 구경하였는가?”

불현듯 육무광이 물어 왔다.

어느새 문에서 손을 뗀 그는 천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는데,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감돌고 있었다.

천휘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잘 구경하기는 했는데, 조금 아쉽긴 하네요.”

육무광이 천휘의 말에 웃었다.

말의 의도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걸세.”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렸다.

확신이 섞인 음성이었다.

“그렇기는 하겠죠.”

천휘 또한 육무광의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그 당당한 태도에 흐뭇하게 웃은 육무광이 뒤돌아서, 의자에 가 앉았다.

천휘가 이곳에 도착했을 당시와 똑같은 자세로 의자에 앉은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가게나.”

진중하고, 차분한 어조였다.

그 인사를 본 천휘가 발을 돌렸다.

더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이어서 어둠이 드리워진 계단을 향해서 발을 내디디던 천휘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다음에 보죠.”

그 말을 끝으로 천휘가 계단을 올라가자, 동공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육무광은 그런 고요함 속에서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천휘에 대해 생각했다.

한편, 잠시 후 전각 밖으로 나온 천휘는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가늘게 떴다.

들어갔을 무렵 달이 덩그러니 있던 하늘에는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한나절이란 시간이 흐른 탓이었다.

그때였다.

“저, 저 도복은 화산파? 설마 저 소협은 매화신협?!”

“왜 매화신협이 여기에…….”

전각 주변을 지나가고 있던 맹의 무인들은 문을 열고 나타난 천휘를 바로 알아보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몇몇은 그대로 굳어 버릴 정도였다.

다름 아니라, 매화신협이었다.

녹림대제를 패퇴시켰고 농질을 죽였으며, 가장 최근엔 불사천교주를 죽이고 본단을 무너트린 공을 세운 불세출의 기재.

모두가 숨을 삼키며, 천휘를 봤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매화신협이 그들에게 긴장감을 불러온 것이다.

“여기서 대협을 보게 될 줄이야.”

“생각한 것 그대로의 모습이군.”

그들이 천휘를 보며, 속닥였다.

마음 같아서는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럴 만한 것이 천휘의 명성은 이미 뛰어난 후기지수의 정도를 훌쩍 넘어, 무림맹에서도 한 손에 꼽힐 위치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멋대로 가까이 다가가랴.

한편 천휘는 그들이 바라보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머릿속엔 온통 하나의 생각뿐이었기에.

‘얼른 읽었던 무공 비급들을 제대로 정리하고 싶은데.’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천서고에서 읽은 무공 비급의 수만 해도 최소 백을 훌쩍 넘었다.

그것을 모두 정리해야 했다.

‘며칠은 걸리겠어.’

생각하던 천휘가 발을 뗐다.

시간이 아까웠다.

이내 한 발 내디딘 그의 바짓단에서 옅은 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스르륵―

그의 신형이 환영처럼 사라졌다.

순식간이었다.

* * *

비천서고에서 나와, 전각에 돌아온 천휘는 방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거의 폐관 수련에 가까운 칩거였다.

“대주가 왜 저러지?”

유례가 없던 대주의 칩거에 호광개가 의아하다는 듯 전각을 바라봤다.

이 층에 있는 멸절대주, 천휘의 처소를 향해서였다.

그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벌써 나흘이 흘렀다.

들어오지 말라는 명을 내린 후, 천휘는 그동안 식사도 하지 않고 저 처소에 가만히 있기만 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니오?”

단리관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걱정이 담긴 어투였다.

“대주한테?”

그런 단리관천의 물음에 호광개는 어이없어했다.

그들의 대주가 누군가?

농질을 죽여 아미파를 구하고, 불사천교주 또한 죽인 절세고수였다.

“그래도 모르지 않소?”

그러나 단리관천은 신중했다.

“불사천교주의 일검에 중상을 입지 않았소? 불사천교주의 내공은 사특하기로 유명하지 않소이까. 혹 그것 때문에 주화입마라도…….”

“그건…….”

호광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허리에 중상을 입기는 했었지.’

이곳에 오는 동안 천휘가 아무렇지도 않게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순간 그 또한 걱정이 들어 다시금 처소를 바라볼 무렵.

“그쪽은 수련 안 해요?”

시원한 목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천향이었다.

둘과 다르게 걱정은커녕 천휘에 대해 생각조차 안 하는 듯한 그녀는 땀에 푹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그들을 향해 말했다.

그 앞에는 쓰러진 이들이 있었다.

멸절대원과 화령단원들이었다.

함께 무림맹에 복귀한 이후 천향은 화령단을 이끌고 매일 아침마다 멸절대가 머무는 전각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비무를 했다.

“천향 도고.”

단리관천의 호칭에 천향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그냥 천향이라고 부르죠?”

“……알겠소이다. 천향 소저.”

“그것도 좀 별로지만, 뭐 도고보다는 낫네요.”

천향이 싱긋 웃었다.

그에 단리관천이 살짝 얼굴을 돌리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저는 대주가 걱정되지 않소?”

“네? 뭐…… 확실히 좀 오래 안 나오긴 하네요.”

천향이 기억을 더듬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에 단리관천이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가 봐야…….”

“뒷일 감당할 수 있겠어요?”

바로 움직일 것처럼 구는 단리관천을 보며 천향이 그의 말을 싹둑 잘랐다.

“사제가 오지 말라 했다면서요?”

“…….”

단리관천이 입을 다물었다.

“그냥 일이 끝나면 나올 거예요.”

천향이 말과 함께 천휘의 처소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한편 자신을 두고 외부가 시끄러운 것을 알지 못하는 천휘는 방 안에서 가부좌를 취한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 천휘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도 요란했고, 복잡한 상태였다.

수십, 수백의 무공 비급들.

그것들을 하나씩 풀어헤치고 샅샅이 발가벗기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월륜수(月輪手)는 진기를 혈에 담아 단숨에 휘두르는 방식인가? 하지만 이런 방식보다는…….’

천휘는 빠르게 읽고 넘겼었던 무공 하나하나를 깊게 파고들었다.

어떻게 해야 완성할 것인가. 아니, 완벽히 다룰 것인가.

그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고 그에 따라 수십의 무학들이 지닌바 무학을 따라 점차 가다듬어졌다.

‘필요 없는 구결은 버려.’

천휘는 아주 대담하게 무공을 재해석했다.

그가 창안한 무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빠른 판단으로 일부분을 버리고, 새로 덧붙여 갔다.

남들이 보면 놀랄 일이었다.

대종사(大宗師)라고 할지라도 이렇게나 무공을 거침없이 바꾸는 것은 그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천휘는 거침이 없었다.

당연했다.

이미 그 근본을 꿰뚫고 있었으니.

“모든 무공의 뿌리는 하나니까.”

오랜 세월을 통해 이론으로 세워 둔 무학의 근원을 정리하며 작게 읊조린 천휘의 눈이 영롱하게 빛났다.

투명하고, 신비로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눈빛을 띤 그의 머릿속이 아득하게 넓어지며, 세상을 고이 담았다.

심상세계(心想世界).

어느새 몸에서 흘러나온 매화신공의 공력이 그를 세상과 완전히 단절시키며 그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무공의 시작은 단순해. 어떤 무공이라도 처음은 천지인(天地人)으로 시작해 천지인으로 끝을 맺으니.”

천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공은 인간의 몸을 단련하기 위해서 시작된 것.

천지(天地)의 기운을 인간의 몸에 담고자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익히 알려진 유가기공(儒家氣功), 도가기공(道家氣功), 불가기공(佛家氣功)는 물론이고 초대 천마의 손에 창안된 역천의 신공 천마신공(天魔神功)도 그 시작은 마찬가지였다.

사이하기로 알려진 사공과 사람의 피로써 무공을 연공한다는 혈교의 혈공 또한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에는 인간이 그릇이었기에.

그리고 무공만이 아니었다.

술법과 진법도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천하의 기운을 이용해 비틀고 엮었지만, 결국 인간이 직접 만들고 풀어헤친 하나의 무학과 다르지 않았다.

그뿐이랴.

지닌 무기조차 손의 연장선이었다.

검이든, 창이든, 도든, 뭐든 간에.

‘그리고 그 결과는 휘두르는 자의 마음에 따라 정해지지. 그것이 활검이 될지, 아니면 살검이 될지는.’

생각하던 천휘가 눈을 감았다.

스으으―

그 순간 그의 심상세계 앞에 투명한 검이 나타나, 환한 빛을 발했다.

아스라이 흩어질 것처럼 흐릿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기운과 강렬함은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었다.

심검(心劍).

마음속 검의 발현이었다.

천휘가 손을 뻗었다.

투명한 검에 닿은 손바닥에 미미한 기운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아니. 아직은 애매해.’

천휘가 심검을 미련 없이 놓았다.

잡으려면, 잡을 수 있었다.

하나 아직 미완성인 지금의 육체로 심검을 다루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육체가 성장을 마치면…….’

그렇게 심검을 지워 내려던 찰나.

화아아아악!

갑자기 기운이 몰아쳤다.

괴사였다.

‘이거 포기하니, 얻은 건가?’

천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의 상황을 바로 파악한 것이다.

곧바로 그는 집중했다.

그러자 활짝 열린 백회혈이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천지의 기운을 담아냈고, 그 안을 완전히 씻겨 냈다.

동시에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만족감이 깃든 미소였다.

삼백육십오 개의 혈도와 전신세맥들을 훑고 지나가는 기운이 상쾌함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걸 또 하게 될 줄이야.’

천휘의 입매가 더욱 비틀렸다.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심기체(心氣體)의 일통이었다.

진작 완성했어야 할 경지에 이제야 도달한 것이다.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이윽고 천지의 기운이 순수한 매화신공의 공력으로 화하며, 단숨에 천휘의 하단전에 축적되어 갔다.

순수하기 짝이 없는 많은 양의 내공이 하단전을 가득 채워 갈 무렵.

화악!

그의 머리 위에 투명한 기운이 하나둘 모이며 꽃봉오리를 피워 냈다.

청, 적, 백색의 꽃들.

삼화취정(三華聚頂)이었다.

‘늦기는 했어.’

관조하듯 머리 위에 떠오른 정기신의 성화(聖花)들을 내려다본 천휘가 입매를 비틀었다.

높은 무위와 정순한 기운에 비해 신체가 완성되지 않아 때늦게 도달한 경지였으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기연인걸.’

천휘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서 그런가? 원래라면 환골탈태를 했을 텐데.’

불현듯 전생을 떠올렸다.

당시엔 기운을 얻는 대신에 환골탈태를 이뤘었다.

그러나 지금은 환골탈태하지 않은 대신 하단전에 내공이 쌓였으며 온 혈도와 세맥에 기운이 넘쳐흘렀다.

“뭐, 이게 지금 상황에선 더 좋으니 상관없나?”

피식 웃으며 말하던 천휘가 가부좌를 풀며, 어깨를 가볍게 움직였다.

몸이 가벼웠다.

사흘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가부좌를 취했건만, 찌뿌둥한 것은 없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공의 흐름이 전과 다르게 편안히 몸을 감싸고 있었다.

상시 대기하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몸 상태를 확인하던 천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무학은 얼추 정리가 되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정리된 무학을 펼칠…….

실전이었다.

“어디 몸 좀 풀어 볼까?”

싱긋 웃으며 중얼거린 천휘는 심상 수련에 들어가기 전 옆에 놔두었던 검 두 자루를 챙기며 방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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