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출발 이후, 엿새가 훌쩍 흘렀을 무렵. 멸절대는 호북과 사천의 경계선에 있는 서림(西林)에 진입했다.
적호채를 습격했을 때처럼 신법을 펼쳤다면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지만 천휘는 이번에는 말을 타고만 갔다.
신법을 펼친다는 것은 내공을 소모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후에 펼쳐질 싸움을 위해서 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한창 말을 타고 나아갈 때.
히이잉―
이름 모를 협소한 산길을 올라가던 천휘가 말고삐를 낚아챘다.
선두에서 달리던 천휘가 멈추자 뒤따르던 멸절대도 말고삐를 잡았다.
시끄럽던 말발굽 소리가 뚝 멈추고 정적이 물결처럼 천천히 퍼져 갔다.
정적 속 천휘는 정면을 주시했다.
이틀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어느새 세상을 백색으로 물들였다.
천휘는 그 백색의 세상 속에서 화려한 색채가 보이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기를 뿜는 전각들이 아스라이 내리쬐는 햇볕 아래 모습을 보였다.
고풍스러운 전각들과 웅장한 장원.
그것들은 주변의 눈과 함께 어우러져서, 고아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기나긴 역사의 흔적이 전각과 장원 곳곳에 묻어나 있었다.
이번 임무의 목표인 혈우검가였다.
‘서책에 있던 그림과 똑같은걸.’
천휘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 몇 번이나 봤었던 서책을 되새겨 봤다.
혈우검가에 대한 수많은 정보.
그것을 미리 숙지해 두는 일은 전투에 있어 매우 효율적인 것이었다.
한참 혈우검가를 눈에 담던 천휘가 고삐를 놓으며, 말에서 훌쩍 내렸다.
새까만 가죽신이 눈을 밟았다.
뽀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눈발 위에 선 천휘가 뒤를 돌아봤다.
쉴 새 없이 내달려 왔기 때문일까.
신법을 펼치지 않았음에도 조금 지쳐 있는 모습들이었다.
천휘가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임무에 들어서기 전에 잠깐만 쉬죠.”
“알겠습니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멸절대원들은 대답과 함께 말에서 내리며, 일사불란하게 휴식을 준비했다.
먼저 무홍과 몇몇 멸절대원이 재빨리 땅을 고르며, 공터를 만들어 냈다.
그러자 내공이 뛰어난 호광개와 단리관천이 삼매진화를 일으켜서 젖은 장작을 바짝 말렸다. 그리고 몇몇 멸절대원은 말에 묶어 놓았던 행낭에서 벽곡단과 육포 등을 꺼냈다.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몇 번의 노숙으로 인해 숙련된 그들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잠시 뒤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르륵―
멸절대는 화섭자를 던져 피워 낸 모닥불에 몸을 맡기며, 추위를 녹였다.
묘한 적막이 감돌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부터 그들이 상대할 곳은 그저 그런 문파가 아닌, 혈우검가였다.
서림에서 이백 년을 군림한 가문.
직전의 임무 대상이었던 적호채와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그 위세와 힘이 대단한 곳이었다.
“후우.”
바짝 긴장한 모습의 임하율이 육포를 씹다 말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으며, 찬 공기를 뱉을 무렵.
“자, 그럼 어느 정도 휴식도 취했으니, 이제 이번 임무에 대해서 말하죠.”
천휘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 임무는 뭐, 다들 아시다시피 혈우검가를 무너트리는 거예요.”
멸절대원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이미 전해 들어서 알고 있던 임무였다.
하지만 대주인 천휘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졌다.
“해서, 병력을 둘로 나눌 거예요.”
천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혈우검가를 공격하는 병력과 퇴로를 막는 병력으로 말이죠.”
멸절대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단 한 명도 도망치게 해선 안 되는 임무이지 않은가.
퇴로 차단은 필수였다.
그때 가만히 천휘의 말을 경청하던 단리관천이 나직이 물었다.
“하면 어떻게 병력을 나눌 생각이오?”
중요한 물음이었다.
멸절대원들이 다들 천휘의 입을 봤다.
대체 병력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궁금해서였다.
얼마 안 가 천휘의 입이 떼어졌다.
“안 그래도 지금 부대주를 두 명 뽑아 두려고요.”
“부대주?”
순간 멸절대원들 모두가 술렁거렸다.
다름이 아닌 부대주 직이었다.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멸절대는 계속해서 활약할 테고, 그렇다면 이 직책으로 인해 강호에서 큰 위명을 떨칠 수 있을 터.
그로 인해 몇몇 욕망을 드러내는 멸절대원을 보던 천휘가 손가락을 움직여, 한 명씩 훑어갔다.
그리고 끝내 손가락 끝이 다다른 곳에 있는 건 이 일에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히 있던 단리관천이었다.
“……나 말이오?”
단리관천이 굳은 목소리를 뱉었다.
그의 얼굴에 불만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이끄는 것보다 그때그때 임무에 따라 혼자서 적들과 싸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주. 나는 사람들을 통솔하지 못하오. 차라리 다른 자들을…….”
그가 거절의 의사를 밝히려 할 때.
“이미 정해졌어요.”
천휘가 그의 말을 싹둑 잘랐다.
“하지만…….”
“일개 대원 주제에 대주가 까라면 까야죠. 안 그래요?”
“…….”
단리관천이 침묵했다.
이내 천휘는 입을 다문 단리관천에게서 시선을 돌린 뒤, 곧바로 이어서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쪽이에요.”
가리켜진 호광개가 기름진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하. 부대주라…….”
그러기를 잠시 그는 이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좋군, 좋아. 힘내 보지.”
호광개는 호쾌하게 받아들였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부대주라…… 생각지도 못했지만 좋지. 명성을 쌓을 수 있을 테니.’
그가 웃으며 부대주 직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그럼 두 부대주가 맡을 인원을 배분해 줄게요. 일단은…….”
천휘는 멸절대의 인원을 나눴다.
‘무공의 상성을 따져 보면 단리관천에게는 이쪽이랑…….’
대련을 통해서 정확히 알아낸 그들의 무공 실력을 떠올리며, 천휘는 하나둘 인원을 분배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 됐죠?”
천휘가 둘로 나뉜 부대를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내비쳤다.
“그럼 다들 얼굴 기억해 둬요.”
멸절대가 서로서로 동료를 쳐다볼 즈음.
“아 참, 그리고 이번에 공격은.”
천휘가 단리관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쪽이 맡을 거예요.”
그 말에 단리관천이 눈을 빛냈다.
부대주가 되어서 대원을 이끌게 된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습격을 하는 것이라면 말이 달랐다.
“알겠소.”
열의를 불태우는 그와 다르게 뒤에 도열한 멸절대원들은 침을 삼켰다.
공격을 맡는다는 건, 전면에 나선다는 뜻.
앞장서 혈우검가와 부딪치게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그때 호광개가 입을 달싹였다.
“그럼 우리는 퇴로 차단인가.”
호방하게 부대주 직을 받아들인 그도 긴장은 감추기 힘들었는지 목소리가 아주 얕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죠.”
천휘가 빙그레 웃었다.
“막아야 할 퇴로가 어딘지는 알죠?”
이어지는 물음에 호광개도 마주 빙그레 웃었다.
“하하, 대주. 내가 멀끔하게 생겼지만, 이래 봬도 개방의 거지요. 그 정도야 이미 머릿속에 담아 왔다네.”
그 말에 몇몇이 웃음을 터트렸다.
말과 다르게 호광개는 충실한 거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휘는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팽팽했던 분위기가 순간 풀어졌다.
모두 호광개의 농 덕분이었다.
‘예상대로네.’
천휘가 호광개를 지그시 응시했다.
가장 먼저 멸절대의 부대주로 생각해 둔 인물 중 하나가 그였다.
성격과 무공 그리고 포용력.
모든 것이 걸맞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짧은 순간에 그는 선택의 이유를 제대로 보여 줬다.
‘저쪽은 제대로 임무에 들어갔을 때 그 진가를 보여 줄 테고…….’
천휘가 단리관천을 잠시 응시하다가, 멸절대를 향해서 말했다.
“그럼 이제 가죠.”
천휘의 나지막한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서둘러서 움직였다.
치지직―
마지막으로 눈을 덮어 모닥불을 끈 멸절대는 긴장한 표정으로 숨을 골랐다.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솟구쳤다.
그렇게 모두가 굳어 있을 무렵.
짝! 짝!
호광개가 힘차게 손뼉을 쳤다.
“자자! 긴장 풀자고! 괜히 긴장했다가 제 실력을 발휘 못 하면 대주가 가만히 두지 않을걸.”
방긋 웃던 그가 눈동자로 천휘를 힐끗 보더니, 한쪽 눈을 찡긋했다.
뒤이어서 바로 천휘에게 물었다.
“한데 대주. 어떻게 공격할 것이요? 습격하기에는 날이 밝은데.”
그가 다가가서, 천휘의 귓가에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차라리 어두워지길 기다렸다가 가는 것이 괜찮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천휘가 손을 휘저었다.
“에이, 언제 어두워지기를 기다려요?”
“그럼 어떻게…….”
“어떻게긴요. 당연히…….”
말하던 천휘가 입꼬리를 올렸다.
“정면 돌파죠.”
* * *
혈우검가는 한창 소란스러웠다.
“무림맹이 사흑련에 전쟁을 선포하다니…….”
혈우검가의 장로, 소운보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흰 눈썹을 찌푸렸다.
“거짓은 아니겠지?”
그가 옆의 노인을 노려보며 물었다.
정보를 담당하는 혈각주(血閣主)는 침중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힘겹게 주억였다.
“하오문이 확인한 정보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무림맹에서 별동대를 조직해 강북 무림에 있는 사파를 모두 무너트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정보도 얻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오문이 확인했다면 이 정보가 거짓일 리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때였다.
“본 가도 포함되었다는 것이군.”
묵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계단 위 상석의 옥좌에 앉아 있는 백발, 백미의 중년인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지켜보던 이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바로 혈우검가의 당대 가주이며, 서림에 군림하는 절대자. 패혈검(覇血劍) 소광패(燒光悖)였다.
“본좌의 말이 맞나?”
묻는 소광패가 눈을 내리깔았다.
싸늘하기 짝이 없는 청안이 창호지로 비추는 햇빛을 받아 번뜩였다.
그 시선에 혈각주가 움찔했다.
“……아마 그렇습니다.”
그 말에 혈우검가의 대회의전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술렁거렸다.
“무림맹이 본 가를 공격한다고?”
“이런 미친!”
욕지거리와 악에 받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이 아무리 서림을 지배하는 혈우검가라고 해도 상대는 무림맹.
힘의 격차가 너무나도 컸다.
점차 소란이 커지려고 할 때.
쿵!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팔걸이를 내려치는 것으로 단숨에 소란을 종식한 소광패가 다시금 물었다.
“사흑련에 연락은 취했나?”
혈각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미 사흑련에 연락은 취해 뒀습니다. 하나 아무래도 시간이…….”
혈각주가 뒷말을 흐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모두가 뒷말이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소광패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의 시선이 아까 전부터 계속 옥좌 옆에 있던 중년인에게 향했다.
“빠져나갈 방법이 있는가?”
중년인, 혈우검가의 총관인 묘련광은 미미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혈우검가를 버리고, 강남 무림으로 향하는 겁니다.”
모련광의 말에 곧 반발이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본 가를 버릴 수는 없소.”
특히 장로들이 격하게 반대했다.
과거 이백 년 전 천하십대검객이었던 혈우검가의 시조, 혈우검객(血雨血劍)이 터를 잡아 지금껏 지켜 온 곳이었다.
서쪽 사천에 있는 청성파의 위협에서도, 동쪽 호북에 자리한 무당파의 위협에서도 버텨 온 곳이거늘.
이제 와서 버린다니.
용납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혈우검가의 가주인 소광패 또한 장로들과 같은 의견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나?”
“그렇다면 사흑련의 도움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소광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혈우검가의 손으로 전황을 바꿀 방법은 없다는 뜻이지 아니한가.
그때 혈각주가 황급히 말했다.
“그, 그래도 사흑련에서 흑야차와 호법들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흑야차!”
몇몇 이들이 벌떡 일어났다.
흑야차라 함은 현 사흑련주의 막내 제자이며, 그 경지가 후기지수를 넘어 강호에서도 만만치 않은 고수라 칭할 만하다고 알려진 자였다.
“거기다 호법들이라면…….”
모두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흑야차를 보호할 호법이라면 그저 그런 이들이 올 리가 없을 터였다.
그때 소광패가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쯤 오지?”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혈각주가 마른침을 삼키며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이내 그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아직 전서가 오지 않았으나, 그래도 최대 닷새 정도 걸릴 겁니다.”
“닷새인가.”
소광패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급박한 상황에서는 아주 길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사이 무림맹이 움직일 것 같나?”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혈각주의 대답은 두루뭉술했다.
하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혈우검가의 존망이 걸린 일.
괜히 어중간한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가는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소광패가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든 닷새를 버티는 수밖에 없나.”
그의 말에 침묵이 흘러가던 그때.
콰아아앙!
밖에서 폭발음이 터졌다.
“설마?!”
“벌써 무림맹이?!”
모여 있던 이들이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모두가 본능적으로 대회의전을 빠져나가, 밖의 문을 열어젖힌 순간.
“대, 대문이?”
“대체 어떤 놈이……!”
그들은 분노를 터트렸다.
이백 년이란 긴 시간 동안 혈우검가를 지켜 온 대문이 박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부서진 대문 위에는 오만한 표정의 청년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년, 천휘는 헐레벌떡 뛰어나온 혈우검가의 무인들을 하나씩 훑어보며, 입꼬리를 천천히 말아 올렸다.
“이제 다 나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