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날이 선 분위기가 감돌았다.
무릇 대문이란 문파의 얼굴인 법.
즉 대문을 부순다는 것은 그 문파와 척을 지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소광패는 청년을 노려봤다.
오만한 표정을 지은 청년은 그러한 대문을 부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위에서 건방진 말을 뇌까리고 있었다.
그렇게 청년을 보던 중.
‘저 행색은……!’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청년의 행색은 참으로 독특했다.
보통 도복은 흰색이 주였건만, 청년의 도복은 흑색과 적색이었고 소매에는 붉은 매화가 자수로 수놓아져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랴.
옆구리에 찬 서로 다른 모양을 가진 두 자루의 검을 보라.
검수에게 검은 평생의 벗이었다.
어떤 검수가 미쳤다고 검을 두 자루나 가지고 다니겠는가.
웃기는 꼬락서니였다.
하지만 소광패는 웃지 못했다.
현 강호에서 그 누구보다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자의 행색이기에.
소광패가 입술을 깨물었다.
“……매화신협.”
침음성 섞인 목소리가 소광패의 물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매화신협이라면……?!”
“녹림대제를 쓰러트린 자!”
“그러한 자가 왜 이곳까지……?”
일순간 주변이 경악과 혼란에 빠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매화신협이 누구인가.
현 강호를 들었다 놨다 하는 후기지수로, 그 위명은 이미 후기지수로서의 존재감을 넘어 강호의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니.
어찌 경악스럽지 않으랴.
그때였다.
“어라, 바로 알아볼 줄이야.”
천휘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그동안엔 그를 먼저 알아본 자가 없었다.
‘다 너는 누구냐는 소리만 지껄였었는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말을 되새기던 천휘가 대문 위에서 뛰어내려 가볍게 눈이 쌓인 바닥 위에 착지했다.
사박.
팔 척이 훌쩍 넘는 대문 위에서 떨어져 착지했음에도, 그의 몸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오연히 서 있었다.
착지를 마친 천휘를 바라본 혈우검가의 무인들은 섬뜩함을 느꼈다.
“다, 답설무흔(踏雪無痕)!”
“저 나이에 이런 보신경의 경지라니! 거짓된 소문이 아니었던가!”
격이 다른 경지의 현신이었다.
혈우검가의 무인들이 지레 겁을 먹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날 때.
“물러나지 마라!”
소광패가 사자후를 터트렸다.
목소리에 담긴 깊고 웅혼한 공력이 물결처럼 파동치며, 그의 발밑에 있던 눈발을 세차게 쓸어 냈다.
찰나의 순간 이루어진 내공 운용.
과연 혈우검가의 가주라 할 수 있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꽤 하는걸?’
천휘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막강한 기세와 기파였다.
‘이 정도면 실전에 적합하겠어.’
천휘의 눈이 가라앉을 무렵.
“무슨 목적으로 왔지?”
소광패가 천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기가 묻어났다.
“본가를 무너트리기 위해서냐?”
평범해 보이는 체구와 다르게 소리의 울림통이 깊었다.
은연중에 내공을 실은 것이었다.
일반적인 무인들이라면 이에 위축될 법했으나, 상대가 좋지 않았다.
천휘는 입매를 비틀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잘 알고 있네.”
“…….”
소광패는 입을 다물었다.
하나 그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예상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힐끗 눈동자를 굴려 옆에 서 있는 혈각주와 장로이자 그의 숙부인 소운보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바로 전음을 흘렸다.
『퇴로를 만들어 두도록.』
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동시에 그들은 소광패가 어떤 계략을 꾸미는지 알아채고 곧바로 눈빛을 교환한 뒤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에 맞춰서 소광패는 다시 천휘를 노려보더니, 두 눈을 부라렸다.
“오만하기 짝이 없군. 혼자서 본가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나?”
강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계속해서 강렬한 기세를 흘리고 있던 그가 무채색의 광망을 터트렸다.
“제아무리 녹림대제를 쓰러트렸다고 한들, 혼자서 여럿을 감당할 수 없는 곳이 강호인 법.”
목소리를 흘리는 그의 주변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혈우검가의 가전비공(家傳秘功).
해방된 혈검결(血劍結)의 공력에 주변의 공기가 버티지 못한 것이다.
그에 맞춰 혈우검가의 무인들 또한 정신을 차리며, 천휘를 향해 지독한 살의가 담긴 경파를 흘렸다.
몇몇의 손은 언제든 출수를 할 수 있도록 이미 허리춤에 있는 검파를 쥐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스윽―
돌연 천휘가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담벼락 너머로 수십의 그림자들이 불쑥 튀어나와, 도열했다.
“무슨!”
“……!”
혈우검가의 무인들이 흠칫했다.
나타난 이들은 범상치 않았다.
하나같이 어렸지만, 조금 전 선보인 경신법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천휘는 굳어 있는 혈우검가의 무인들을 보며, 눈초리를 크게 휘었다.
“내가 언제 혼자라고 했어?”
이어서 천휘가 명령을 내렸다.
“임무를 속행하죠.”
명령이 하달되기 무섭게 멸절대원들이 바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 * *
천휘는 눈앞의 광경을 지켜봤다.
사방에서 벌어지는 격돌에 단정했던 장원은 점점 폐허가 되어 갔고, 피와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이제 좀 정신머리가 나아졌어.’
천휘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멸절대원들의 수법에는 사정이 없었다.
실전과 대련으로 깨달은 것이리라.
전투에 있어 사정을 두었다가 적을 살려 두면, 자신뿐 아니라 동료 역시 위험에 처한다는 걸.
그때.
콰아앙!
폭음이 그의 귀를 강타했다.
천휘의 시선이 그 폭음이 터진 진원지로 향했다.
아수라장이 된 장원의 중앙.
어느새 검을 뽑아 든 소광패가 멸절대원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검격의 연속이었다.
그가 일 검을 휘두를 때마다 강렬한 기파가 터지며 멸절대원을 날렸다.
단 일 합도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간 멸절대원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격이 달랐다.
유형화된 공력은 소광패의 검을 감싸며, 지독한 혈기(血氣)를 흘리고 있었다.
‘정보보다 더 강해.’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보에는 이제 무극지경의 고수가 되었다고 했지만, 지금 눈앞에 그는 달랐다.
완숙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구파일방에서도 능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남을 법한 무위였다.
‘멸절대만으로는 힘들겠는데.’
천휘가 턱을 매만질 무렵.
“너희들만으로 본가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쩌엉! 퍼억!
“컥!”
소광패는 그들을 압도해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광패의 활약에 힘입은 혈우검가의 무인들도 멸절대를 몰아붙였다.
백중세였던 기세가 한순간 흔들렸다.
경지에 오른 고수의 위용.
그것이 지금 전황을 튼 것이다.
‘문파 간의 전쟁에서 고수의 유무가 크긴 하지.’
천휘는 전생을 회상했다.
고절한 경지에 오른 고수는 일인군단과 다름이 없는 전력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문파든지 고수를 만들기 위해 눈을 불을 켜지 않나.
“쩝, 내가 나서야 하나?”
천휘는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라면 나설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소광패의 무위를 보아하니, 멸절대의 패배가 저절로 그려졌다.
“어쩔 수 없지. 소광패는 내가 처리하고 나머지만 맡겨야지.”
상황이 어렵다고 판단한 천휘가 발을 떼려던 순간.
파아앗!
단리관천이 땅을 거칠게 박찼다.
극성의 부운약표는 멸절대를 상대하는 소광패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 갔다.
‘응?’
소광패를 향해서 달려드는 그의 눈에는 차가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쭈, 이것 봐라?’
천휘가 눈에 흥미를 담았다.
단리관천의 무위는 멸절대에서 뛰어난 편이었지만, 무극지경의 고수인 소광패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드러내는 천성의 살의와 함께 휘둘러진 도는 눈앞에 있는 소광패를 상대로 밀리지 않았다.
‘어디 조금 더 지켜볼까?’
화월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때마침 소광패의 앞까지 도달한 단리관천이 내디딘 발에 힘을 실었다.
쿵!
강렬한 진각과 함께 땅이 울렸다.
한 치가량 깊숙이 박힌 발.
단리관천은 그 힘을 이용해 상체를 앞으로 크게 숙인 뒤 자신의 도, 탄연도(坦然刀)에 모든 힘을 실었다.
몸의 균형이 확 낮아졌다.
얼굴은 거의 무릎까지 내려왔고 손에 쥐고 있는 탄연도는 땅바닥에 닿을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단리관천은 멈추지 않았다.
‘더 밑으로, 더 빠르게, 더 깊게!’
단리관천이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팔뚝을 크게 뒤틀었다.
기형적인 손놀림이었다.
하나 그 덕분에 밑으로 향했던 탄연도가 탄력을 받아, 위로 솟구칠 수 있었다.
벼락같이 위로 휘둘러지는 도(刀).
대련 중 천휘에게 펼쳤었던 도식.
풍뢰도의 발현이었다.
“……!”
소광패의 눈에 놀람이 깃들었다.
아래에서 솟구치는 도에는 사파에서도 보기 힘든 살의가 담겨 있었다.
‘이런 도법이 정파에 있다니……!’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
스윽―
그는 발을 내디디며, 검을 내리찍었다.
쩌어어엉!
소광패의 검이 풍뢰도를 막았다.
강렬한 충격파가 강풍을 일으켰다.
둘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부끼고, 그 사이에서 두 눈동자가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소광패는 손에 쥔 가보, 혈우검(血雨劍)을 휙 거두었다.
그리고 재차 검을 휘둘렀다.
일순간 강풍이 반으로 잘렸다.
혈검결의 공력이 담긴 일검이었다.
콰아앙!
“큭!”
다급하게 도를 들어서 검을 막아 낸 단리관천이 신음을 흘렸다.
지독한 위력이었다.
간신히 막아 낸 것만으로도 근육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단리관천이 고개를 들었다.
교차된 검과 도 사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소광패의 시선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가면처럼 무심했다.
그 무표정함이 섬뜩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눈을 마주하자, 단리관천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순간 소광패가 힘을 겨루다 말고 밀던 힘을 거두더니, 검을 다시 휘둘렀다.
검이 뱀처럼 꿈틀거린다 싶더니 단숨에 팔방을 점하며, 단리관천을 몰아붙여 갔다.
눈부신 궤적의 연속.
연환 검격이 펼쳐진 것이다.
쩌엉! 쩌엉!
도와 검이 연이어서 크게 부딪쳤다.
그때마다 단리관천은 속에서 올라오려는 내상을 삼켜내야만 했다.
내치는 일격마다 위력이 엄청났다.
그것이 십 합, 이십 합을 넘어갔고.
“컥!”
계속된 강격의 충격을 버티지 못한 단리관천의 무릎이 결국 꺾였다.
“……오래 버텼군. 이제 끝이다.”
소광패가 그런 단리관천을 내려다보며, 뇌까렸다.
이어서 혈우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혈우검에서 실타래와 같은 혈기들이 얽히고설키며, 검강을 휘감았다.
단숨에 목을 베려는 것이다.
“부대주!”
“단리 소협!”
혈우검가의 무인들을 상대하고 있었던 멸절대원들이 다급하게 단리관천을 구하기 위해서 뛰어가려 했다.
하지만.
“어딜 가려고?!”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혈우검가의 무인들은 그들을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젠장!”
“부대주를……!”
멸절대가 끈질기게 달려드는 혈우검가의 무인들에게 붙잡힌 사이.
쐐애액!
혈우검이 사선으로 크게 그어졌다.
단리관천의 죽음을 선언하듯이.
이윽고 휘둘러진 혈우검이 끝내 단리관천의 목을 베려던 찰나.
후웅!
혈우검이 허망하게 허공을 갈랐다.
“……무슨!”
소광패가 당황을 터트릴 무렵.
“거참. 의욕은 좋았는데, 상대가 생각한 것보다 더 강했네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낯익은 이가 단리관천의 목덜미를 잡고는, 가만히 서 있었다.
“매화신협……!”
천휘를 노려보던 그가 짐승과도 같이 그르렁거릴 때, 천휘는 단린관천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것을 놓았다.
“죽을 것 같으면 도망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싸워서는, 에휴.”
“대, 대주…….”
“말하지 말고, 내상이나 다스려요. 이번은 그냥 넘어가 줄 테니까.”
“…….”
단리관천에게 핀잔을 준 천휘는 목을 까딱이며, 소광패를 응시했다.
“그럼 할 일이나 끝내 볼까.”
살기를 풍기는 소광패와 눈을 맞춘 천휘가 천천히 입매를 비틀었다.
“네 다음 상대는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