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272화 (272/391)

272화

대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가 방심하지 말라고 했죠?”

비웃음이 물씬 담긴 천휘의 말에 입술을 깨문 육세곤은 질 수 없다는 듯 곧 권을 힘차게 뻗었다.

고고한 기도와 공력이 실린 일장.

곤륜파의 장법, 옥룡장이었다.

한 마리의 용이 나아가듯 힘차게 펼쳐진 옥룡장이 천휘의 어깨를 노렸지만.

슥―

천휘는 몸을 가볍게 트는 것만으로 수월하게 피한 뒤, 입을 달싹였다.

“너무 정직해요.”

천휘가 전력으로 옥룡장을 펼치느라 일순간 앞으로 기울어진 육세곤을 향해서 좌수를 내뻗었다.

벌레를 잡듯 휘두른 가벼운 손짓.

하지만 그것을 보는 육세곤의 얼굴은 차차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손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속도였다.

‘늦었……!’

퍼억!

“커헉!”

복부를 관통하는 듯한 강렬한 충격에 입이 벌어지고, 침이 튀었다.

이어 정신이 아득해져 가던 찰나.

꽈악!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렇게 당한 게 벌써 몇 번째인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때리고 말겠어.’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이길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한 대만.

딱 한 대만 제대로 치고 싶었다.

눈을 부릅뜬 그가 추운권을 펼치기 위해서 크게 진각을 밟으려는 순간.

스윽―

새까만 그림자가 시야를 삼켰다.

바로 목검이었다.

‘제, 젠장 또…….’

빠각!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육세곤이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개구리처럼 뻗었다.

“그래도 이제 근성은 생겼는데?”

목검으로 쓰러지려는 육세곤을 받친 천휘가 그를 옆으로 내던졌다.

육세곤이 던져진 방향에는 기절해 있는 멸절대를 치료 중인 의원이 있었고, 그에게 슬쩍 시선을 던진 천휘가 입을 달싹였다.

“이쪽도 다시 부탁할게요.”

설검의 언질을 받아서 온 의원, 백자문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우, 알겠네.”

그는 바닥에 힘없이 ‘쿵’하고 쓰러진 육세곤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이 드리워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 지, 반 시진.

그동안 그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손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야.’

그냥 부상자와 내상을 입은 자들만 치료하고 가면 될 줄 알았었다.

한데 이게 무슨 꼴인가.

저렇게 수련이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진 구타에 기절한 환자가 계속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치료해 정신을 차렸다 싶으면 또 저 매화신협이라는 작자가 무자비한 손속으로 기절시켜 버리니.

“끝이 없네. 끝이 없어.”

슬쩍 천휘를 곁눈질하던 백자문이 고개를 힘없이 좌우로 흔들었다.

빨리 치료하고 갈 생각이었지만 한동안 벗어나기는 그른 듯 보였다.

‘에라, 그냥 할 일이나 하자.’

자신의 본분을 떠올린 그는 다소곳이 눕힌 육세곤의 맥을 짚었다.

‘그런데 거참, 신기하단 말이지.’

기절했음에도 활발하게 뛰는 맥을 확인한 백자문은 정신을 집중했다.

기절했으면 맥박이 잠잠해지기 마련이었으나, 육세곤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그만이 아니었다.

여기 기절해 있는 모두가 그러했으니 참 신묘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그가 의아해할 무렵.

“보법은 하나로 합쳐서 써야죠. 따로따로 펼칠 거면 왜 같이 익혔겠어요. 하나로 연계해야…….”

천휘는 목검을 현란하게 움직이면서, 대원들의 무공을 짚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빠각! 퍼억!

“컥!”

“켁!”

멸절대의 귀에는 그런 얘기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막느라, 급급했다.

“내공은 검에, 그리고 진각을 밟는 발가락 끝에 제대로 싣고…….”

임하율의 검을 피한 천휘는 자세를 지적함과 동시에 목검을 휘둘렀다.

“단번에 휘둘러요. 이렇게.”

“꺄악!”

비명과 함께 임하율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자자, 집중하죠.”

압도적인 실력 차로 인해 천휘는 현재 그들을 농락하며, 전신을 두드리고 있었다.

거의 매타작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까드득―

참다못한 멸절대가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게 뭔 매화신협이야! 악귀지!’

‘으아아악! 대협은 무슨!’

겨우 반 시진이었지만, 천휘에 대한 인식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대련 내내 일방적인 구타가 계속해서 이어지니, 어찌 마음이 상하지 않으랴.

그로 인해 악바리만 남은 그들의 눈동자를 본 천휘가 흡족해하며 웃었다.

“이제야 눈빛이 좀 살았는걸.”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그때.

쐐애액!

그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계속된 대련을 통해 덤비지 않으면 어차피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가장 가능성 높은 공격을 선택했다.

휙―

천휘는 가장 먼저 달려드는 단리관천의 능풍도법을 흘리며, 입을 뗐다.

“천성(天性)의 살의를 다루는 도법 같은데, 휘둘려서야 되겠어요?”

천휘의 말에 단리관천의 눈이 커졌다.

과거 사부님께서 능풍동법을 사사할 때 하셨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능풍도법을 꿰뚫어 봤다고……?’

그의 눈이 순간 크게 흔들릴 때.

“이성을 차갑게 유지해요.”

천휘는 말과 함께 매화신공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어서 입술을 움직였다.

“천성의 살의라도, 아니. 천명일지라도 무공의 주체는 인간인 법.”

능풍도법을 넘어 천하에 산재하는 모든 무공의 정수가 담긴 지고의 무리를 내뱉은 천휘가 목검을 쥐지 않은 좌수를 움직였다.

“심(心)과 인(人)이 흔들리지 않아야 지닌 무공에 휩쓸리지 않죠.”

왼손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하늘거리는 바람과도 같이 공기를 타더니, 이내 허공을 몇 번 튕겼다.

화아악!

마치 난화를 다루듯, 부드럽고 유려한 움직임의 손짓이 거대한 와류를 생성했다.

수백 년 전에 소실되었던 화산파의 수법, 난화도혈수의 발현이었다.

“……!”

단리관천이 헛숨을 들이켰다.

자신의 몸이 저 압도적인 기세를 품은 와류에 점점 끌려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그가 다급하게 천근추를 펼치며 버티려고 할 때.

덥석!

천휘의 좌수가 그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게 단리관천의 팔을 휘감기 시작한 손은 그대로 팔을 낚아채더니 그의 몸을 그대로 되돌려, 내던졌다.

“단리 소협!”

“헉!”

뒤따라서 달려오던 멸절대는 갑자기 날아오는 단리관천에 멈칫했다.

그리고 다급하게 그를 받아드는 순간.

“동료를 생각하는 건 좋은데…….”

어느새 옆에 나타난 천휘가 그들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웃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입가에 머문 부드러운 미소.

하나 그것을 바라보는 멸절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상대는 잊지 말아야죠.”

그의 목검이 움직이며 수많은 검영이 생겨나더니, 그들을 덮쳤다.

퍼버버벅!

“끄아악!”

“그, 그만!”

“대주님!”

비명과 맞는 소리가 난무했다.

하지만 천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칠게 멸절대를 몰아붙이며, 목검을 세게 휘둘렀다.

잠시 후 멸절대는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다.

천휘가 그런 그들을 보며, 입을 뗐다.

“에휴, 이렇게 약해서야.”

쓰러진 그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약하다니?’

‘네가 강한 거겠지!’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하나 그 누구도 차마 입 밖으로 울분을 내뱉지는 못했다.

말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차례 고개를 젓던 천휘가 입을 열었다.

“그럼 조금만 쉬고 다시 하죠.”

다시 한다고?

멸절대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지금 이것만으로도 죽을 지경인데, 쉬고 나서 더 할 생각이라니.

그들의 표정을 본 천휘가 웃었다.

“아마 훗날 저한테 고마워할걸요.”

말과 함께 그는 안광을 번뜩였다.

“덕분에 한 번 정도는 목숨을 건질 테니.”

* * *

강호는 혼란스러워져 갔다.

녹림의 화산파 습격을 기점으로 도래한 격동이 파도와 같이 몰아쳤다.

그중에서 가장 큰 화제.

바로 무림맹과 사흑련 사이에 충돌이 벌어질 것이란 소문이었다.

퍼져 가는 소문에 모두가 흥미를 보였으나, 대부분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둘이 부딪쳤다가는 가만히 있는 비천회만 이득을 보는 꼴이었기에.

머리가 있다면 당연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뒤이은 소문들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무림맹이 사흑련과의 전쟁을 선포했으며, 지금 강북 무림에 있는 사파를 모조리 멸문시키려 하고 있다!”

“무림맹이 본보기로 적호채를 무너트렸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하나 적호채의 산적들이 관에 잡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며, 세상은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무림맹과 사흑련이 전쟁이라고?”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강호에 몸을 담은 이들은 물론이고 관련이 없던 자들도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구주삼패세의 시대가 무너질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강호가 크게 들썩거렸다.

그것은 잔잔했던 호수에 돌멩이를, 아니. 바위를 던진 것 같은 파장이었다.

“드디어 구주삼패세의 시대가 끝이로구나!”

“지금 좋아할 일인가? 강호에 피바람이 불 일이지 않은가!”

“하하핫! 예전부터 나는 구주삼패세의 시대야말로 강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시기라 생각했네. 평화는 무슨! 도산검림, 강자지존인 세상이 진정한 강호지. 강호야말로 피바람이 불어야 할 곳이거늘.”

두 구주삼패세의 충돌이 알려지며,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히 나뉘었다.

새로운 세대를 반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걱정하거나 혹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염려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모두가 같은 생각으로 내놓는 의견이 있었다.

곧 난세가 도래한다는 것!

그렇게 모두가 전쟁을 선포한 무림맹에 귀추를 기울이고 있을 때.

쿠구궁―

굳게 닫힌 무림맹의 서문이 열리며 말을 탄 한 무리의 일행이 나왔다.

그들의 외양은 참으로 독특했다.

온통 새하얀 피풍의를 걸친 그들은 겨우 눈만을 드러냈는데, 그 눈빛에서는 서슬 퍼런 독기가 느껴졌다.

그때 뒤늦게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딱 나흘이 흘렀군요.”

섭선을 손에 쥔 남자, 설검이었다.

설검은 맨 선두에 있는 이에게 다가가서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눈만 드러낸 얼굴이 보였다.

가만히 전방을 주시하는 새까만 동공은 한없이 깊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설검이 그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 임무도 잘 부탁드립니다. 천휘 소협.”

천휘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담담한 눈빛에는 긴장한 티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도리어 설검이 속으로 긴장감을 삼킬 때.

스윽―

새하얀 손이 면전에 내밀어졌다.

뜬금없는 손에 설검이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볼 때, 천휘가 입을 뗐다.

“줄 것 있으면 빨리 주죠. 어차피 그쪽도 바쁠 텐데.”

“역시 소협이시군요. 바로 알아보시다니.”

빙그레 웃으며 말하던 설검은 품에서 서책을 꺼내서, 조심히 건넸다.

“이번 임무인 혈우검가에 대한 정보들이 적힌 서책입니다.”

“꽤 두꺼운데.”

서책을 보던 천휘가 눈을 구길 무렵, 설검이 나지막이 말을 덧붙였다.

“조직도와 고수들의 수 그리고 익힌 무공 등이 모두 적혀 있습니다.”

“흠, 그래요?”

천휘는 슬쩍 서책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의 옆에 묶어 둔 짐에 귀찮다는 듯 쿡 쑤셔 넣었다.

“나중에 보죠.”

“……꼭 읽으셔야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혈우검가는 꽤 역사가 깊은 사파의 가문입니다. 쉬이 상대할 곳이 아니니 최대한 준비하시고, 조심하셔야 합니다.”

설검이 눈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사파인 혈우검가는 호북과 사천의 경계에 있는 가문으로 정파 쪽 문파가 득실한 지역에서 이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군림해 온 가문이었다.

그 저력이야 말해 봐야 입만 아팠다.

“아 참, 그리고…….”

끝말을 흐리던 설검이 다른 서책을 꺼냈다. 그건 혈우검가에 대한 정보가 적힌 서책보다 두꺼웠다.

“전번에 말씀하셨던 멸절대의 신상 정보입니다.”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흘린 말을 들은 천휘가 씩 웃으며, 서책을 집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다더니 빠르게 준비했네요.”

“소협, 아니. 멸절대주의 요청이지 않습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설검이 일부러 ‘멸절대주’와 ‘최우선’이란 말에 힘을 주어서, 말했다.

노력했으니, 알아 달란 뜻이었다.

“좋네요. 그럼 이제 준비는 끝난 것 같으니.”

그에 답하듯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천휘가 뒤를 봤다.

털이 달린 하얀 피풍의를 걸친 멸절대원들은 잔뜩 날이 선 기세였다.

사흘간 밤낮없이 이어진 대련.

그것으로 그들의 신경은 바짝 곤두서 있었고, 기세가 타오르고 있었다.

천휘가 그런 그들을 확인하고 말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이제 가 보죠.”

설검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조심히 가십시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휘가 바로 멸절대를 향해서 입을 달싹였다.

“다들 준비는 됐죠?”

“됐습니다!”

멸절대가 모두 눈을 부라렸다.

우렁찬 대답을 들은 천휘는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입술을 비틀었다.

“그럼 가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십삼 필의 말이 거친 진동을 일으키며, 서쪽으로 거칠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 혈우검가를 향해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