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
텀블러에 담긴 미온수가 심장을 진정시켜 주길 바라며 열심히 꼴깍거렸다. 그때 이서호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툭 쳤다. 중대한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놀란 탓에 물이 기도로 넘어갔다.
“컥, 켈록, 쿨럭.”
“헉, 야. 괜찮아?”
나는 내 등을 두들기는 이서호를 향해 팔을 휘적거렸다. 기침 때문에 숨이 모자라서 자연스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어으, 놀랐네. 갑자기 왜?”
“괜찮아?”
이서호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걱정스레 날 보고 있었다. 손에 꼭 쥐고 있는 휴대폰을 보니 뭔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나 보다. 이서호의 용건을 짐작하며 나는 기침 때문에 칼칼해진 목 때문에 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응. 괜찮아.”
곧장 용건을 말할 줄 알았던 이서호는 마치 누군가의 눈치를 보듯 힐끔거렸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어느새 일어난 정이한이 내 등 뒤에 바짝 서 있었다. 정이한은 내가 돌아보기만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물 더 갖다줄까? 더 마실래?”
“아, 괜찮아요. 이제 진정됐어요.”
나는 웃으며 텀블러를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서호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왜? 뭐 보여주려고 온 거 아니야?”
“헐. 어떻게 알았어?”
“손에 폰 쥐고 있잖아.”
이서호는 제 손의 휴대폰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그렇게 쉬운 남자였나…….”
“단순하기로만 따지면 기네스북감이지.”
내 작은 도발에 곧장 걸려든 이서호가 쌍심지를 켜며 “진하온!”하고 크게 외쳤다. 나는 이서호가 달려들 걸 대비해 뒤로 살짝 물러났다.
“왜. 칭찬인데.”
“그게 어떻게 칭찬이냐!”
씩씩거리는 이서호를 향해 나는 검지를 까딱거렸다.
“기네스북이 뭐야. 전 세계 신기록을 기록하는 장이잖아. 거기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건 세계 1위라는 뜻인데?”
나는 흥분한 이서호를 향해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언제든지 달려들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서호가 갑자기 침착함을 되찾았다.
“하여간. 너는 나 놀리는 재미로 살지?”
“으응? 꼭 그렇지는 않지만……. 뭐야. 뛰어들 줄 알았는데?”
이서호가 팔짱을 끼며 오른쪽으로 강하게 고개를 쳐올렸다.
“내가 언제까지 애인 줄 알아?”
“이럴 수가…….”
이서호가 침착해지다니. 도발에 걸렸는데 이성을 되찾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차라리 내 궤변에 말려들었으면 이서호답다고 생각했을 텐데. 내가 안 보는 사이 이서호가 쑥 커버린 것 같아 묘하게 섭섭했다.
“아니, 내가 얌전해진 게 그렇게까지 축 처질 일이야?”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불현듯, 또 악플을 수집하나 싶어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이서호의 목에 팔을 걸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왜 그러냐며 말로만 저항하는 이서호를 팔 안에 가둔 채 속닥였다.
“형, 설마 또 악플 수집하는 건 아니지?”
“나 그거 졸업했어. 여전히 보긴 하지만 수집하진 않고…….”
이서호는 우리 뒤에 있는 정이한이 의식되는지 목소리를 낮췄다.
“진하온 네가 나는 그런 사람 아니라며. 나 이제 악플 봐도 상처 안 받아.”
이건 좀 감동이었다. 진짜 이서호 엄청 성장했네. 이왕이면 아예 안 봤으면 좋겠지만, 그런 걸 또 궁금해서 못 견뎌 하니까 멘탈 바스러지지만 않으면 괜찮겠지. 그보다…….
“나는 언제까지고 형이 내 강아지일 줄 알았는데…….”
“누굴 개 취급하냐!”
“멍멍해봐.”
“아오! 진하온!”
그래도 여전히 잘 낚이긴 하네. 나는 낄낄거리며 이서호를 풀어줬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던 이서호는 제 얼굴에 신경질을 푸는 것처럼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됐다. 그만하자. 나 이거 보여주려고 왔거든.”
“아, 맞다. 뭔데?”
이서호가 가지고 온 건 너튜브 영상이었다. ‘스칼렛, 6번째 시크릿 멤버.’ 라는 제목의…….
“아! 이거…….”
벌써 올라갔구나. 나는 끙 소리를 내며 진저리를 쳤다. 말하기도 민망한 옷을 입고 릴레이 댄스를 찍을 때가 선명하게 기억났다. 루비 선배님이랑 같은 컨셉이라더니 치마 대신 짧은 바지를 입고, 가터벨트가 없다는 것만 빼면 선배님과 의상이 똑같았다.
좀 더 섹시하게 다리를 꼬아라, 골반을 비틀어라, 머리를 틀어 올려라, 날개뼈를 야하게 표현해 봐! 등등. 민망한 주문들이 연달아 쏟아져서 영상을 찍을 때 한참 애를 먹었다.
“댓글 봤어? 다들 넌 줄 알던데.”
“……어떻게 알지.”
얼굴은 나오지도 않고 뒷모습만 나오는데.
“우리 디어리 눈썰미가 좋잖냐.”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어?”
“응. 반응 좋던데. 썸이 안 날 것 같다더라.”
이서호가 키득거리며 내게 댓글을 보여줬다.
─ 하온이 끌려간 이유가 너무 투명한뎈ㅋㅋㅋ
┗ 루비소년에서 시작된... 전설의 레전드!
─ 아니 골반 튕기는거 뭐임? 아니 골반 튕기는거 뭐임? 아니 골반 튕기는거 뭐임? 아니 골반 튕기는거 뭐임? 아니 골반 튕기는거 뭐임?
┗ 내 심장도 튕겨 나갈 뻔
─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하온이 낳았어야 했는데..ㅠㅠㅠㅠ
─ 우리 레리들이랑 섞여 있는데 위화감 1도 없는거 실화냐..
┗ 디어리입니다! 선배님들 우리 애 예쁘게 봐주세요!
┗ 밉게 보고 싶어도 예쁨..걱정 ㄴㄴ..
─ 여돌남돌 혼성인데 이렇게 댓글 청정한 거 킹받넼ㅋㅋㅋㅋㅋ
┗ 아니 뭔가 썸이 날 것 같은 기분이 안 들어
┗ 원래 같은 그룹인 것마냥 자연스러운 6인 릴댄ㅋㅋㅋ
─ 뒷태 넘사라 얼굴 궁금해서 검색해보고 왔는데 와꾸도 넘사네ㅎㅎ 갓-벽!
┗ 메보멤인데 퍼포도 합니다!
┗ 와씨 저 친구 못 하는 게 뭐예요?
┗ 우리 하온이는 못 하는 걸 못 해요!
─ 초커ㅠㅠ 코르셋ㅠㅠ 엄마 나 죽어ㅠㅠㅠㅠ
─ 이랬는데 진하온 아니면 웃기겠닼ㅋㅋㅋㅋ
┗ 200퍼 하온이 예상합니다! 아닐 수가 없어요!
나는 댓글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전부 날 예상하고 있으니깐 오히려 내가 아니면 재밌을 것 같다. 이서호는 댓글을 더 보여주진 않고 휴대폰을 회수했다.
“응? 더 있는 거 아니야?”
“응. 근데 굳이 안 봐도 될 것들이 있어서 여기까지만 봐.”
“악플은 괜찮은데?”
“그런 류는 아니야. 여튼 궁금해하지 마라. 보면 기분 나쁠 테니까 들어가지도 말고.”
꼭 형이라도 된 것처럼 경고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이서호가 형이긴 한데, 진짜 형처럼 느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알았어. 안 볼게.”
보면 불쾌해진다는 댓글을 굳이 찾아가서 볼 생각은 없었다. 이서호 덕분인지 두근대던 심장은 어느새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때마침 강현 형이 연습 재개를 알려왔다. 우리는 곧장 거울 앞에 쪼르륵 모여 섰다.
***
“형들 고생했어요. 다윈이랑 레인이도.”
“이제 꽤 착착 맞네. 뉴삐도 수고했어.”
“나는 멀미나…….”
레인이 애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다녔다. 춤출 때의 레인은 멋있었는데 연습이 끝나니 하찮아져서 그 반전 매력이 정말 귀여웠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제 멤버들과 연습하러 이동해야만 했다.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네.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상주 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타고 회사로 향하는 동안 눈을 붙이려고 뻐근한 눈을 감았다. 금방 잠이 들 것만 같은 몽롱한 부유감을 느끼고 있을 때, 휴대폰이 징징거리며 울었다. 아는 사람들만 진동이 오게끔 바꿔놨기에 멤버인가 싶어서 확인해 봤다.
[라스트원-준재혁: 통화 가능?]
아. 교주다. 아무리 상주 형이 운전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통화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아마도 용건은 텐스타의 준 선배님이겠지. 예상보다 훨씬 늦은 소식이었지만, 교주도 교주대로 바빴을 테니 이해는 됐다.
[나: 지금 이동 중. 이따 숙소 가서 전화할게. 몇 시에 자?]
[라스트원-준재혁: ㅇㅇ]
‘ㅇㅇ’이 끝이야? 몇 시에 자냐고 분명히 물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이 없었다. 아무 때나 해도 된다는 소리인가. 내가 새벽에 하면 어떡하려고? 나는 뚱한 얼굴로 휴대폰을 보다가 그냥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자고 있을 때 걸어도 내 잘못은 아니지.
연습 끝내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아무 얘기 없으면 그냥 아무 때나 걸어버릴 테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피곤한 몸이 금방 수마에 섞여들었다.
상주 형이 깨워줄 때까지 푹 자고 일어난 나는 곧장 연습에 합류했다. 연습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가니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교주한테 전화를 걸어도 되나. 나는 정이한이 씻으러 간 사이 침대에 앉아 휴대폰과 눈싸움을 했다. 교주는 ‘ㅇㅇ’ 이후에 여전히 말이 없는 상태였다.
아까는 잘 때 깨워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막상 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걸려니 미안하단 말이야. 그냥 내일 걸까……. 하지만 내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는걸.
게다가 시상식 시즌이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기상 시간은 당겨지고 있었다. 아마 내일은 더 늦을 거고, 모레는 더 늦을 거다. 오늘이 교주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제일 이른 시간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전화를 거는 데 주저함이 없어졌다. 어차피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둔 거니까 나는 모른다.
딱딱한 신호음이 계속 이어졌다. 자고 있나.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휴대폰을 뺨에 얹어뒀다. 안 받으면 말자고 생각하던 때 전화가 연결됐다.
- 씻고 있었어.
“지금 끝난 거야?”
- 어.
“너도 피곤할 테니까 빨리 이야기 끝내자. 이한 형 씻는 중이야.”
교주도 그럴 생각이었는지 대뜸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 박상준한테 스킬 못 쓰겠더라.
“뭐? 그 사람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