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딱히 심지가 강해 보이진 않던데 왜 스킬이 안 먹히지? 아니, 잠깐. 교주는 안 먹히는 게 아니라 못 쓰겠다고 했다. 신뢰를 얻지 못한 건가? 교주가? 그럴 수도 있나.
- 너한테 관심 끊게 해달라고 했잖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들을 뒤로한 채 나는 교주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답을 줄 사람은 교주밖에 없으니까.
“응. 그랬지.”
- 끊을 게 없어.
“무슨 소리야.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 그러니까…….
교주는 나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통화하다가 이대로 잠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피곤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 너한테 관심이 없어. 아주 작은 흥미 정도인데, 그런 건 스킬로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
“그런데 그렇게 과격하게 스킨십…….”
아,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 그러고 보니 밥 먹자고 한 것도 스케줄이 맞지 않다고 거절했는데, 다음 약속을 잡자는 연락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박상준이 나한테 관심 있는 듯 행동한 건 우연히 마주쳤을 때가 전부였다. 자의식 과잉이었나…….
-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고, 그 사람은 애초에 타인에게 관심 없는 인간이야. 자존감이 높아서 남의 말에 휘둘리질 않아.
“아. 이해했어.”
어쨌든 나한테 관심 없다니 다행이네. 마주치지만 않으면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살 수 있다는 거잖아. 그런데 그렇게 자존감이 높다는 사람이 마약은 왜 했지?
그런 건 정신적으로 유약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거나 쾌락주의자들이 단지 쾌락을 즐기기 위해 사용하는 거 아닌가. 조금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 아, 그리고 하나 더.
“응? 뭔데?”
- 마약에 빠질 만한 성향이 아니라 이상해서 확인해 봤거든.
교주도 나와 같은 걸 생각했다는 게, 참. 이걸 기뻐해야 하나, 찝찝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 그 사람 김호채랑 꽤 오래 알고 지냈더라. 아마 그쪽에서 흘러 들어간 것 같아.
이게 또 이렇게 연결되네. 좀 긴가민가했는데 교주의 확신 어린 말을 보니 소파남이 마약 한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나 보다.
그나저나 소파남이랑 인연이 깊다면 그 자식을 매장한 나를 싫어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런 느낌은 없었는데……. 오히려 내가 착각할 정도로 치근덕댔지.
“둘이 친한데도 나한테 적대감이 없어? 흥미만 조금 있는 게 전부고?”
- 남한테 관심 없다고 했잖아. 김호채한테도 아무런 감정이 없더라고. 지금은 연락도 안 하는 모양이고.
“아.”
어? 그러면…….
“잠깐. 그러면 텐스타는 이번에 마약 게이트에 연루 안 된다는 거야?”
텐스타가 마약과 연루된 창구가 소파남인데, 그 소파남과 연락이 끊겼다면 그렇게 되지 않나?
- 김호채 이외의 다른 경로가 없다면 연루되지 않겠지.
다른 경로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 그래도 계속 경계는 해야겠네. 개인 만남은 배제하고, 지금처럼 우연히 마주치면 그냥 인사 정도 나누는 선후배 관계를 유지하면 되겠지.
- 그리고 나도…….
뭔가 고민하는 듯 주저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주가 이렇게 자신 없어 하는 건 처음인데?
- 이번에 박상준을 조사하면서 내 게이지가 또 올라갔어. 스킬도 쓰지 않았는데…….
“진……짜?”
- 어. 그래서 헷갈리는데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다. 네가 내 회귀 목표의 열쇠라는 거.
이쯤 되면 나도 좀 그런가 싶어지는데. 하지만 교주가 첫 번째 회귀였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겠으나, 이번이 교주의 마지막 회귀라고 했잖아. 신들이 이렇게까지 빗겨나게끔 세팅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내가 교주의 회귀 목표와 관련 없다는 걸 짐작하는 이유는 이게 전부라 교주한테 말한들 통할 것 같진 않았다. 교주는 그들을 신이 아니라 그것들이라고 표현하니까. 분명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꼬았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 혹시나 해서 슬쩍 흘려봤으나 내가 예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 쓸데없는 소리 들을 시간 없어. 끊는다. 다음 일거리나 물어 와.
쌀쌀맞은 목소리와 함께 통화가 뚝 끊겼다. 다음 일거리라니.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나는 덩그러니 남은 통화 시간을 보며 혀를 내밀었다. 흥이다.
***
시간은 모래성이 파도에 쓸려나가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흘러갔다. 우리는 지금 첫 번째 연말 무대를 앞두고 있었다. 그룹 리허설을 막 끝낸 뒤 나는 흥분과 긴장을 함께 느끼며 크고 화려한 무대를 돌아봤다. 음악 시상식 중 가장 규모가 큰 KMA 다운 무대였다.
이제 곧 여기가 사람들로 꽉 차겠지. 이 거대한 돔을 가득 채울 함성을 생각하면 온몸이 찌릿했다.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기분 좋은 열감에 웃음 지었다.
“하온아.”
먼저 무대를 내려간 정이한이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넓은 무대를 휘둘러 본 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백스테이지의 소란스러움을 뒤로 하고 대기실을 향했다.
“우리 대기실 있으니까 진짜 너무 좋다!”
이서호가 긴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소파를 혼자 차지한다고 유찬 형이 이서호를 엉덩이로 혼내주기 시작했다.
“악! 형! 궁디치워어억!”
“여기가 내 자리인가. 아닌가. 여기가 내 자리인가.”
유찬 형은 이서호의 배와 다리를 이리저리 깔고 앉으며 놀렸다. 긴장감이 하나도 없네.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낫긴 하지. 나는 발악하는 이서호를 보며 소리 내 웃었다.
“항복! 항보옥!”
결국 이서호가 항복 선언을 할 때였다. 대기실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하온 형 있어?”
어, 레인이다. 막 문을 열어주려던 나는 손잡이를 잡은 채 멈칫거렸다.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유찬 형이 이서호를 깔고 앉아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유찬 형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벌떡 일어나 흐트러진 옷을 정리했다. 그리고 여전히 어리벙벙하게 누워있는 이서호를 강제로 일으켜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슥슥 빗겨 줬다. 이 정도면 됐다.
“레인아.”
“와! 형!”
레인이 곧장 나를 와락 끌어안고 반가움을 표현했다. 크로스트를 모르는 멤버는 없어서, 다들 깍듯하게 레인에게 선배님 대우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걸 견디지 못한 건 레인이었다.
“으아, 하온 형 멤버분들이잖아요. 편하게 해주세요! 저 엄청 불편해요오…….”
“하하. 그래도 선배님이신걸요.”
유찬 형이 말갛게 웃었다.
“윽. 제가 어린데……. 하온 형이 막내 맞지?”
“응. 우리 그룹에서는 내가 막내야.”
“그럼 다 형들인데…….”
꼬여버린 족보 때문에 레인이 울상을 지었다. 이렇게 불편해하면 차라리 데리고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런데 여긴 왜 왔어?”
“그냥 형 보고 싶어서 왔지. 나 온 거 싫어?”
귀엽게 고개를 기우뚱거리는 레인은 애교가 뚝뚝 흘러넘쳤다.
“아니, 좋지. 나갈래? 마실 거라도 사줄게.”
“아, 아니야. 나 금방 갈 거야. 곧 우리 리허설 하거든. 지나가다가 디아스 대기실 보이길래 형 생각나서 들렀어!”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쫑긋거리는 귀와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일 것만 같았다. 진짜 왜 이렇게 귀엽지? 이제야 이서호가 딥컬러의 막내 멤버를 그렇게 귀여워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각 그룹에 레인 보급이 시급하다. 나는 레인의 머리를 잔뜩 쓰다듬어줬다.
“히히. 이거거든. 사실 이게 받고 싶어서 왔거든!”
레인은 두 팔을 등 뒤로 돌린 채 눈을 감았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는 대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고갯짓까지 귀여웠다.
“아, 아쉬운데 나 이제 가야 해. 형 이따가 백스테이지에서 보자! 우리 오늘 파이팅이야!”
“응. 이따 봐.”
레인을 배웅하고 돌아서자 멤버들이 오묘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특히 정이한은 무언가 서운한 듯한 눈치라서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됐다.
“진하온이 형이라니……. 진하온이 형…….”
이서호의 중얼거림이 멤버들의 오묘한 눈빛을 설명해 주는 것만 같았다.
“나 좀 형 같았어?”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자 이서호는 “형보다는 견주?”라고 말해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니, 내가 레인이를 강아지처럼 보는 건 어떻게 알고.
“그래도 서호 형이 내 원조 강아지라니까.”
“와, 또 이렇게 날 개 취급한다고?”
“진짠데. 나 처음에 서호 형 이름 못 외웠을 때 강아지라고 불렀거든.”
“……무친. 진짜냐?”
“이서호.”
변형된 욕도 어김없이 유찬 형의 필터를 통과할 순 없었다. 이서호가 두 손으로 입을 확 틀어막으며 어설프게 웃었다. 그때 정이한이 불쑥 내게 머리를 기울이며 물었다.
“하온아, 나 머리에 뭐 묻은 것 같지 않아?”
“네? 머리에요?”
빠르게 눈으로 훑어봤는데 뭐가 묻기는커녕 반질반질 예쁘기만 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안 묻었어요.”
“아니야. 꼼꼼히 봐봐.”
어차피 스타일링 받기 전이니까 뭐가 묻었어도 상관없긴 하지만 신경 쓰이나 보네. 나는 안쪽에 뭐가 묻었나 싶어서 정이한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사륵사륵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이래서 정이한이 내 머리 말려주는 걸 좋아했나. 나도 나중에 해줘 볼까. 그럼 좋아할 것 같기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본래의 목적은 잊고 머리카락만 만지고 있을 때였다.
“정이한 진짜 여우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유찬 형이 혀를 끌끌 차며 정이한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배시시 웃음 짓는 정이한이 고개를 바로 하며 웃었다. 서운해 보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아! 형도 쓰다듬 받고 싶었던 거예요?”
“응.”
상쾌한 인정에 나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와, 진짜 여우다, 엄청 귀여운 여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