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94화 (294/320)

294.

“아, 하온이한테 말릴 뻔했네.”

유찬 형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흘겼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내가 헤실거리면서 웃자 형의 눈매가 더욱 좁아졌다.

“그렇게 웃는 얼굴로 회피하려고 하지 마. 몸 안 좋으면 안 좋다고 말하기로 약속한 거 잊은 건 아니겠지? 숨기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더라?”

분명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고 했었다. 매일 아침 체온도 재고, 그리고…… 뭐더라.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꽤 으악스러웠던 건 나도 기억한다.

“이번엔 아팠던 거 아니라요…….”

유찬 형은 내가 어떤 변명을 할지 들어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맞은 편을 가리키길래 무릎을 모으고 얌전하게 앉아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저절로 허리가 바짝 세워졌다.

“……얘기 중에 미안한데, 하온이 머리부터 말리면 안 될까?”

드라이기를 만지작거리던 정이한이 불쑥 끼어들었다. 턱을 들어 정이한을 봤다. 나를 걱정하는 듯 보였으나 아까처럼 애달픈 듯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는 좀 놀라서 그랬던 건가…….

유찬 형이 허락하자 정이한은 콘센트에 드라이기 선을 연결했다.

“머리는 이한이가 말려주고. 언…….”

위이이잉.

“네? 뭐라고요?”

“언제…….”

위이잉. 위이이잉.

드라이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리는 데다가 정이한이 내 머리를 흔들고 있어서 유찬 형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렸다. 그 탓에 몇 번 되묻자 유찬 형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부터 아팠냐고 물었어!”

그때 이서호가 목청을 높였다. 귀에 곧장 때려 꽂히는 듯한 큰 목소리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 아팠던 게 아니라요.”

흔들 인형처럼 흔들거리는 머리로 말하려니 목소리가 중구난방으로 튀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했는데, 유찬 형이 고개를 돌리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방금 뭐라고 했는데. 띄엄띄엄 들린 단어와 입 모양을 조합한 결과 우선 머리부터 말리라는 말 같았다.

“다 됐다.”

정이한은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드라이기 선을 뽑았다. 이제 다시 대화의 시간인가. 준비됐다는 눈으로 유찬 형을 보자 형이 “언제부터 아팠어?”라고 물었다.

“아팠던 게 아니라요. 어제 잠을 좀 못 잤거든요. 그런데 오늘 내내 시달려서…….”

나는 오전에 못 일어나서 정이한이 깨워준 일부터 스칼렛 선배님들을 만나고 퍼포먼스 팀에서 있었던 일과 이후에 노래방까지 가서 체력을 소진했다는 것까지 전부 말했다.

“……그래서 피곤했어요. 솔직히 너무 졸렸는데 따듯한 물로 몸을 풀어주지 않으면 내일 아플 것 같아서 욕조에 들어간 건데……. 설마 거기서 제가 잠들 줄은 몰랐죠.”

이럴 때일수록 뻔뻔해야 한다. 나는 잠이 든 거다. 정말 깊게 잠들어서 소란도 못 들은 거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좀 말이 안 되긴 해. 문이 부서질 정도로 두들겼는데 그걸 어떻게 모르냐고.

“히엑. 진하온 피곤할 만하네.”

질린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듣던 이서호가 어쩐지 안쓰러운 듯한 눈으로 나를 봤다. 동정받는 느낌에 기분이 묘했지만, 그래도 이 변명이 통하기만 한다면야.

“그러니까. 나 진짜 힘들었어…….”

“가뜩이나 저질 체력인데 안 쓰러진 것만 해도 용하다. 진짜 잠들 만했네.”

아, 진짜 이서호 기분 이상하게 하네. 꼭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나는 내 미묘한 기분을 숨기고 최대한 처량 맞아 보이는 표정을 꾸민 채 유찬 형을 봤다.

“……그럼 정말 쓰러진 거 아니야?”

유찬 형은 발견했을 때 내 자세를 언급하며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급하게 머리만 밖으로 내미느라 자세를 못 잡긴 했는데…….

“좀 졸린 것 같아서 기대고 있었는데 잠들어서 팔을 떨어트린 거 아닐까요? 그리고 저 지금 혈색 좋잖아요.”

“뜨거운 물에 그만큼 오래 담겨 있었는데 혈색이 안 좋으면 문제지.”

윽. 안 통하나? 차라리 솔직하게 몸 상태가 안 좋다고 말하고 상태 이상 터트릴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러면 당장 내일부터 연습을 못 하게 할 거 아니야. 디아스의 무대도 무대지만, 준비 중인 협동 무대도 많았기에 지금 누워 있을 순 없었다. 심지어 진짜로 어디 아픈 것도 아닌데.

“지금은 정말 컨디션 괜찮아요.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날 의심 어린 눈으로 보던 유찬 형이 정말 아픈 거 아닌지 다시금 물었다. 마지막 질문이라는 느낌이 와서 나는 아픈 데는 하나도 없다고 힘주어 대답했다.

“일단 시간도 늦었고, 하온이 피곤했던 건 알겠으니까 가서 자. 내일 아침에 확인해 보고 정곤 형한테 말할지 말지 정할 테니까.”

“네!”

으어, 다행이다. 오늘은 진짜 푹 자고, 내일 빵빵한 체력으로 일어나야지. 어제까지 날 괴롭히던 고민이 오늘은 전부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잘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나는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평소와 같은 컨디션을 회복한 나는 일찍 일어나 꼼지락대던 중이었다. 그때 유찬 형이 예고도 없이 우리 방을 찾아왔다.

이 시간에 일어나는 형이 아닌데 나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나 보다. 나는 벌떡 일어나 유찬 형을 맞이했다. 유찬 형은 말없이 내 상태를 확인하듯 눈으로 훑어본 뒤 웃어줬다.

“괜찮아 보이네.”

“그럼요. 오늘은 잘 잤거든요.”

나는 가볍게 걸음을 옮겨 유찬 형의 팔을 꿰차며 방을 나갔다.

“아침 제가 차릴까요? 뭐 먹고 싶어요? 어제 해주려고 했는데 못 일어나서 못 했거든요.”

“어제는 이한이가 토스트 해줬어.”

“들었어요. 저도 얻어먹었거든요.”

불현듯 유찬 형이 내 뺨에 손등을 얹어 가볍게 뺨을 쓸듯 문질렀다.

“확실히 열도 없고, 표정도 좋고. 아픈 덴 없어 보이네.”

“그렇다니까요.”

“오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힘들면 언제든지 얘기해.”

오늘은 다른 합동 팀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 날이었다. 그래도 어제는 각자 개인 합동 무대를 위해 흩어진 거지만, 오늘은 다 같이 움직일 거니까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네. 그럴게요!”

***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시간 가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하루가 다르게 누적되는 피로에 체력 좋은 강현 형까지 틈만 있으면 꾸벅꾸벅 졸았다. 그에 반면 나는 꽤 멀쩡한 편이었다.

대부분은 체력 시스템이 페널티가 맞지만, 이럴 때는 또 특혜 같기도 했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다가도 푹 자고 일어나서 체력이 가득 차면 멀쩡해지니까. 다만, 누적된 피로는 무시할 수 없어서 체력이 줄어드는 속도가 빨라지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그 탓에 휴식 시간은 항상 내가 제일 먼저 요청하는 편이었다. 안 그러면 상태 이상 터지는 걸 어떡하라고.

“잠깐, 허억, 헉, 쉬었다가 해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가 물꼬를 텄다.

“후우, 그래. 좀 쉬자.”

강현 형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흐느적거리며 털푸덕 주저앉았다. 연습실 바닥과 내 몸이 서로 다른 극에 끌리는 자석처럼 딱 달라붙었다.

나는 이제 일어나지 못할 거야. 아침 컨디션은 분명 내가 제일 좋은데 어째 연습하다 보면 나만 곤죽 되어 있는 느낌이란 말이야.

“하온아, 물 마셔.”

정이한이 내게 텀블러를 내밀었다. 나는 드러누운 채 목만 세워 어떻게든 물을 마셔 보려고 했지만, 이대로면 마시는 것보다 흘리는 게 많을 것 같았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시도하는 멍청이가 바로 나다.

“일으켜 줄까?”

“으, 그냥 좀 쉬다가 이따 마실게요.”

“옆에 둘 테니까 연습 시작하기 전에 마셔. 탈수 오면 큰일 나.”

대답하는 것도 힘들어서 고개만 까딱거렸다. 정이한은 그런 내가 안타까운지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고마운 마음을 받아 체력 회복 좀 해볼까.

“형, 저 뒤통수 아픈데 무릎베개 해줘요.”

“그래!”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반기는 목소리였다. 정이한은 내가 다리를 베기 편하게 자리를 잡고 내 무거운 머리까지 손수 들어 올려 허벅지에 다소곳이 올려줬다.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보살펴주니 내 버릇이 나빠지지.

하지만 편하단 말이야. 높이도 딱 좋고, 살짝 딱딱한 감촉도 좋았다. 원래 베개는 푹신하지 않으면 싫어하는데 정이한의 허벅지는 베개로 삼기 딱 좋았다. 신기해서 정이한의 마법 허벅지를 검지로 꾹꾹 눌렀더니 다리가 움찔거렸다. 동시에 내 시야가 흔들렸다.

“형, 어지럽잖아요…….”

“하온이가 간지럼 태우니까 그렇지.”

“이한 형도 간지럼타요?”

아닌데? 그런 거 본 적 없는데?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정이한이 간지럼 타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하온이가 만지면 간지러워…….”

“저만요?”

“응. 하온이만.”

왜 나만……? 게다가 예전에는 내가 만져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이전에는 안 그러지 않았어요?”

갑자기 정이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뭐, 뭔데? 왜 부끄러워하는 건데!

“그, 작업실에서 하온이가 내 배 만졌을 때도 그랬어…….”

기, 기껏 잊고 있었는데! 나의 파렴치한 손이 정이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건가. 생각해 보니 성희롱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진짜 나쁜 손이었네.

“미안해요, 형. 그때 기분 나빴죠?”

“아니. 오히려 좋았……. 아니, 그러니까. 으윽.”

조, 좋았어? 좋았다고? 정이한의 부끄러움이 나한테까지 전염된 것 같았다. 나는 화르륵 달아오르는 열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고 나니 정이한의 다리를 베고 누운 것마저도 왠지 부끄러워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어, 왜 일어나?”

정이한이 내 팔목을 휘감았다. 이상하게 정이한에게 잡힌 팔이 뜨거워지며 심장이 콩닥거렸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텀블러를 주워 올렸다.

“물 마시려고요.”

미치겠네. 왜 또 이러는 거야,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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