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하온아! 아직도 물 받는 중이야?”
박유찬이 욕실 문을 두들겼으나 욕실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단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형, 욕실 열쇠 있어?”
“그거 모르겠는데. 찾아볼게. 잠시만.”
박유찬이 허둥거리며 움직이는 사이 정이한은 계속 문을 두들겼다.
“하온아! 하온아!”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우는데 조용한 게 이상했다. 그저 잠이 든 게 아닐지도 모른다. 커다란 불안이 정이한의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
“뭐야? 왜 그래?”
이서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건 백강현도 마찬가지였다. 막 씻고 나오자마자 소란을 들은 듯 그의 머리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하온이 아직도 욕실이야?”
“불러도 대답이 없어. 유찬 형이 열쇠 찾아보는 중인데…….”
정이한의 목소리가 덜덜거렸다. 잠든 게 아니라 정신이라도 잃은 거면 어떡하지? 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때 욕조에 잠겨 있을지도 모를 이의 얼굴이 그려지자 정이한은 참을 수 없었다.
몸을 뒤로 물린 뒤 무작정 체중을 실어 문에 어깨를 부딪쳤다. 쾅!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어깨가 아려왔지만, 정이한은 다시 한번 몸을 뒤로 물렸다.
“같이 해.”
백강현이 굳은 얼굴로 정이한의 어깨를 짚었다. 두 사람은 신호를 맞춰 함께 몸을 날렸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나무 문이 덜컥거리며 불쾌한 소음을 냈다.
문이 부서지는 게 먼저일지, 제 어깨가 부서지는 게 먼저일지. 정이한은 욱신거리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이를 아득 물었다. 온몸이 산산조각나더라도 진하온이 무사하다는 걸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두 사람의 체중을 버티지 못한 문고리가 먼저 박살 났다. 동시에 힘껏 부딪힌 힘을 멈추지 못한 두 사람은 욕실로 빨려 들어갔다. 습기에 젖은 타일 때문에 몸을 제어할 수 없어 미끄러지는 동안, 정이한의 시간이 무척 느리게 흘러갔다.
어느덧 욕조에 몸을 걸친 채 축 늘어진 하얗고, 작은 몸이 이한의 망막에 새겨졌다. 욕조 밖으로 늘어트린 팔을 타고 바닥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줄기가 왜 피처럼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시간이 그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목을 틀어막았다. 제 몸이 엉망으로 구르는 동안에도 정이한은 진하온에게 눈을 고정했다.
몸이 어딘가에 부딪힌 듯 제동이 걸리자마자 이한은 허둥거리며 방향을 틀었다. 타일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바닥에 무릎을 부딪쳤다. 그러나 정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볼품없이 허우적거리며 진하온에게 다가갔다.
“하온아!”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난 뒤에야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발짝 앞서 있는 백강현이 먼저 진하온에게 닿았다. 그는 진하온의 상체를 받쳐 든 채 뺨을 두들겼다.
“하온아, 하온아. 정신 차려 봐. 진하온.”
뚝뚝 떨어지는 물이 백강현의 옷에 음영을 만들었다. 숨은 잘 쉬고 있는 건가. 정이한은 덜덜 떨리는 손을 붉게 달아오른 진하온의 얼굴로 향했다. 온수에 열이 오른 얼굴은 따뜻했다.
“지, 진하온 괜찮은 거야?”
욕실 문기둥을 붙잡은 이서호가 울먹였다. 열쇠를 찾다가 뒤늦게 달려온 박유찬이 두 사람에게 목욕 가운을 집어 던졌다.
“일단 하온이 그거 입히고, 구급차 부를게.”
정이한이 허공에서 낚아채듯 목욕 가운을 받아 들었다. 이걸 입히기 위해서는 욕조에서 진하온을 꺼내야 했기에 백강현이 그를 건져 올리기 위해 다리 한쪽을 욕조에 넣었을 때였다.
“……아으, 무슨, 일.”
떠듬거리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깜박이는 눈꺼풀이 당혹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펄럭거리는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뺨을 타고 뚝 떨어졌다. 정이한은 또렷하게 상을 맺고 있는 눈동자가 반가워서 울음을 터트리고만 싶었다.
“어? 혀, 형들이 왜 여기…….”
백강현의 팔을 꼭 움켜쥔 진하온이 두리번거렸다. 정이한은 서둘러 목욕 가운을 진하온의 어깨에 걸쳐줬다. 목욕 가운의 아랫단이 물을 먹고 묵직하게 떨어지는 걸 보며 그제야 한 마디를 건넬 수 있었다.
“하온아, 괜찮아?”
***
정이한이 내게 가운을 걸쳐주고 난 뒤에야 내가 홀딱 벗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수치심을 느끼기도 전에 걸쳐진 목욕 가운 덕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니, 미리 한 시간쯤 걸릴 거라고 다 말해 놨는데 형들이 왜 여기까지 쳐들어왔냐고.
“하온아, 괜찮아?”
숫제 울 것 같은 목소리에 나는 앞단을 여미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수증기가 고인 욕실 속에서 정이한은 우는 것 같기도 했고, 웃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 당연히 괜찮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된 건지는 우리가 묻고 싶다.”
유찬 형이 팔짱을 낀 채 성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잠들었나 봐요…….”하고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게 상태 이상 터질 때마다 매번 걸리는 거야. 조용히 넘어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일단 나가자.”
강현 형이 나를 부축했다. 상태 이상이 막 끝난 직후라 남은 체력이 신경 쓰였던 나는 형에게 기댄 채 몸을 일으켰다. 물을 먹은 가운이 걷기 힘들 정도로 다리에 엉겨 붙었다. 그렇다고 이걸 벗을 순 없고.
내가 비틀거리며 욕조에서 나오자 정이한이 욕조를 한 손으로 짚은 채 여전히 물을 쏟고 있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아……. 설마 저거 때문에 걸렸나? 기절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미리 잠그질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물 다 받아질 때까지 기다릴걸. 빨리 스킬 종료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해 너무 서둘렀나 보다.
“30분은 넘은 것 같은데 물 받는 소리는 계속 나지, 불러도 대답은 없지, 이한이랑 강현이가 문 부수는 동안에도 조용했지. 정말 잠든 거 맞아?”
유찬 형이 내 궁금증을 전부 해결해줬다. 심지어 내가 몰랐던 것까지. 그제야 내 눈에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여서 덜렁거리는 쇳덩이가 보였다. 헐. 진짜 저걸 부수고 들어왔네?
“그, 그러게요. 왜 못 들었을까요. 그나저나 저걸 어떻게 부쉈어요?”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 떼는 작전을 내세우며, 슬쩍 말꼬리를 돌렸다. 자세히 보니 문고리만 작살난 게 아니었다. 문고리가 박혀 있던 나무까지 부러져서 삐죽삐죽한 가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한 형이랑 강현 형이 어깨로 밀쳐서 부쉈지. 근데 너 진짜 괜찮은 거야?”
이서호가 내 앞과 뒤를 정신 사납게 알짱거렸다. 뒤에서 날 보고, 빙 둘러 앞으로 와서 날 보고.
“저, 일단 옷 갈아입고 나갈게요. 이거 이대로 나가면 바닥 침수될 것 같은데요.”
목욕 가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이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 거라는 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갈아입으려고 걸어 둔 옷을 회수하던 정이한이 갑자기 하던 행동을 뚝 멈췄다.
“괜찮으니까 그냥 나와.”
“어. 데리고 갈게.”
강현 형은 순순히 갈래? 아니면 들어줄까. 하는 눈으로 나를 내려봤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색하게 웃는 사이, 오금 아래로 형의 손이 쑥 들어왔다. 몸이 덜렁 들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으아!”
내 선택권은 어디로…….
“어깨에 팔 걸쳐.”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나는 벌어진 로브를 여미며 형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손이 쪼글쪼글해졌네. 발도 그렇겠지. 삐죽 튀어 올라온 발가락을 보다가 괜히 민망해져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속 괜찮은지 묻는 이서호는 평소와 같고, 자기 관리 못 한 나 때문에 속상해서 화내는 유찬 형도 마찬가지인데. 유독 애달픈 눈으로 나만 보는 정이한이 신경 쓰였다.
뭔가 말을 건네고 싶은데, 뭐라고 해야 하지. 이서호에게 괜찮다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동안에도 내 신경은 온통 정이한에게 가 있었다. 그러다가 강현 형이 날 침대에 눕히려고 들었을 때가 되어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안 돼요! 침대 젖어요!”
내 필사적인 외침에 강현 형이 우뚝 멈췄다.
“일단 내려주세요. 저 옷 갈아입을게요.”
“갈아입으면 우리 불러. 얘기 좀 하게.”
유찬 형이 경고하듯 읊조렸다. 으어, 무서워.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멤버들이 모두 나간 뒤에야 차게 식은 가운을 벗을 수 있었다.
“어으, 추워.”
그런데 수건이 없잖아. 어쩔 수 없이 목욕 가운의 젖지 않은 부분으로 대충 물기를 닦아 낸 뒤 옷을 껴입었다. 축축하게 늘어진 가운을 챙겨서 나가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멤버들과 마주쳤다.
“까, 깜짝이야. 다들 왜 여기 서 있어요.”
“왜겠어. 그건 이리 주고.”
유찬 형이 내게서 목욕 가운을 가져갔다. 문득 처음 숙소에 와서 유찬 형이랑 룸메이트였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형이 계속 내 빨랫감을 가져갔었는데.
“뭘 잘했다고 웃어?”
“형이랑 룸메였을 때도 이랬던 게 갑자기 생각나서요.”
“……그러고 보니.”
유찬 형은 손에 들린 가운을 물끄러미 내려 보며 웃음 지었다. 과거를 떠올리는 듯한, 그리움을 띄는 눈빛이었다.
“그때는 서호가 하온이 질색했었는데.”
“아! 왜 그 얘기를 꺼내!”
“괜찮아, 서호 형. 나도 형 싫어했으니까.”
“알거든! 나 참. 새삼스럽게.”
이서호는 볼을 잔뜩 부풀린 채 투덜거렸다. 새벽에 강현 형과 숙소로 돌아가다가 취객을 만났던 일도, 정이한이 부끄러워하면서 내게 자작곡을 선물해줬던 일도 차례로 떠올랐다.
……아. 그렇구나. 이런 게 추억이라는 거구나. 하루하루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 수많은 추억이 생겼고, 오늘의 일 또한 추억이 되어 가슴 한쪽에 남게 되리란 걸 깨달았다.
형들이랑 헤어질까 봐 벌벌 떨 필요가 없었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내 기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이 시간을 계속 영위하고 싶은 건 내 욕심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 해도 어쩌면 나는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형들을 위한 일이라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