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문이 다시 열렸다. 박현철은 실내의 불을 밝히며 문을 닫았다.
“꽤 오랫동안 준비했는데 큰일 날 뻔했네.”
박현철은 생글생글 웃으며 내 팔을 등 뒤로 모아 묶어버렸다. 발목까지 결박시킨 뒤 내 손목에 채워진 스마트 워치를 풀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행이야. 방해받지 않아서. 역시 우린 운명이 아닐까?”
이어서 그는 내 주머니를 뒤적거려 휴대폰까지 꺼내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박현철을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박현철이 내 눈동자에 바람을 후, 불어 넣어서 나는 인상을 쓰며 눈을 찌푸렸다.
“그렇게 앙탈 부리지 않아도 충분히 귀여워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박현철은 내 스마트 워치를 가슴 포켓에 넣은 뒤, 휴대폰을 내 손에 가져다 댔다. 잠금을 해제하려는 거야. 나는 손가락을 구부려 저항했지만,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지금으로서는 그의 완력에 대항할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어. 네 형들 따돌리고 올 테니까.”
날 내려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던 박현철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멍청했어. 어째서 그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지? 내게 우호적인 세계에서 살아서 감각이 둔해진 걸까.
완전히 당한 거야. 이연휘 씨의 말버릇을 이용해서 편지를 보내고, 주의를 돌리게 했어. 그럼 그때 이연휘 씨는 왜 형들을 노려봤었지? 그 사람이 헷갈리게 행동한 탓에 박현철의 손에 놀아났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박현철은 우리가 이연휘 씨를 만나면 그쪽으로 신경이 쏠릴 걸 예상했을 거다. 그리고 우리가 난데없이 피처링 부탁을 하면서 이연휘 씨를 불러냈을 때 확신했을 거야. 자신이 보낸 편지를 우리가 봤다는 걸.
그 뒤에 아추대에서 내민 미끼를 내가 덥석 물어버린 거고. 증거랍시고 가지고 온 것들이 전부 애매했던 것도 내가 나서게 하려고 했던 거였나? 하지만 이건 저 사람에게도 다소 모험 아닌가?
스토커 잡겠다고 직접 움직이는 연예인이 몇이나 되냔 말이야. 그것도 소속사의 협조 아래에서. 대부분 연예인과 소속사는 몸을 사리면 사렸지, 나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하……. 이제 와서 생각하면 뭐 해. 지금은 박현철이 돌아오기 전에 여기서 나갈 방법을 궁리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약에 당한 몸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도 않았고, 결박까지 당한 상태라 여기서 스스로 나가는 건 요원해 보였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아까 확인했잖아. 자주 다니지는 않지만, 직원이 이용하는 길이다. 소리만 낼 수 있다면 누군가가 문을 열어 줄 거야.
나는 지금의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물건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봤다. 선반에 있는 건 꺼낼 방법이 없으니 패스하고, 그 외에는…….
카트?
대형 카트에는 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저거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짜내어 바닥을 기었다.
송글송글 맺힌 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작 몇 걸음밖에 안 되는 거리였는데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도대체 약 기운은 언제 빠지는 거야. 설마 위험한 약은 아니겠지?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잠시 쉬었던 몸을 다시 움직였다. 쉴 시간이 없었다. 체력이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서둘러. 상태 이상 터져서 정신 놓으면 완전히 끝이야. 그 전에 구조받아야만 해.
나는 무사히 형들 곁으로 돌아갈 거야. 반드시.
***
박현철은 진하온의 휴대폰을 보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쉽게 될 줄은 몰랐다. 진하온이 직접 자신을 미끼로 내밀 줄이야. 덕분에 다음 플랜까지 가지 않고도 술술 풀리고 있었다.
‘역시 김호채 엿 먹인 건 하온이 계획이 맞았나 보네.’
그런 성격이라면 이번에도 스스로 나설 줄 알았다. 방송국에 떠도는 카더라 통신. 대부분 쓸모없는 정보뿐이지만 이번엔 정확했던 모양이다. 박현철은 앨범 속의 진하온을 들여다보며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얘가 이제 내 거란 말이지.’
처음 봤을 때부터 갖고 싶었다. 무대가 끝난 직후 멍한 눈으로 복도를 걷던 진하온을 코앞에서 봤을 때 그는 시선을 빼앗겨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아름다운 사람이 조금씩 저를 향해 다가왔을 땐 가슴이 쿵쾅거려 심장이 갈비뼈를 뚫을 듯 거세게 뛰었었다.
완전히 진하온에게 매료된 박현철은 바닥만 보며 걷는 진하온의 경로 앞으로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멍하니 걷던 진하온이 제 가슴에 부딪힌 뒤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당황하는 얼굴마저도 예뻤다.
「헉,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럼요.」
「어……. 오, 옷에 화장 묻었는데……. 죄송해요. 어떡하지…….」
진하온이 소매를 끌어당겨 그의 가슴을 슥슥 문질러 줬다. 그 순간 하반신에 열기가 고였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있을 때, 앞서갔던 멤버들이 돌아와 제게서 진하온을 빼앗아 버렸다.
그때 느꼈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몇 날 며칠 폭풍처럼 분노가 몰아쳤다. 그 분노의 끝에 박현철은 답을 얻었다.
아, 빼앗겼으면 다시 빼앗으면 되지.
이제 제게 다시 돌아온 진하온을 방송국에서 데리고 나가기만 하면 모든 게 완벽했다. 박현철은 진하온 휴대폰을 조작해 단체 톡방을 열었다. 평소 멤버들과의 말투를 확인하기 위해 메시지를 휙휙 올려본 뒤 바로 화면을 톡톡 두들겼다.
[나: 저 이제 이연휘 씨 만나요]
[디아스-정이한: 어..?]
‘뭐지?’
박현철은 걸음을 멈추고 톡방을 들여다봤다. 정이한을 끝으로 대화가 더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무렵, 메시지가 폭발적으로 올라왔다. 일시적인 오류였나.
죄다 걱정하는 말들. 박현철은 그걸 보며 자만심에 가득 차 웃음을 터트렸다.
박현철은 진하온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이 일의 일등 공신인 이연휘를 만나러 갔다. 비품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그곳에 피곤함에 찌들어 퀭한 얼굴을 한 이연휘가 있었다.
“연휘야.”
“어어. 현철아.”
반갑게 자신을 보고 웃는 친구에게 박현철은 스마트 워치를 내밀었다. 이연휘가 그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뭐야?”
“선물.”
“어……. 나한테? 왜?”
“왜긴. 그동안 네가 여러모로 많이 도와줬잖아. 고마워서 그러지.”
이연휘는 두 손으로 스마트 워치를 받아 들고는 감동한 듯 박현철을 올려봤다.
“고, 고마워. 현철아.”
“응?”
“너 퇴사해도 다, 당연히 나랑 연락 계속할 거지?”
“뭘 그런 걸 묻고 그러냐. 당연한 소릴 하네.”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이연휘는 기쁘다는 듯 만개한 웃음을 띠었다.
“어……. 그럼 나 이거 주려고 부른 거야?”
“응. 왜?”
“아니, 난 당연히…… 또 부탁할 게 있는 줄 알았지.”
“선물 줄 거 있다고 했잖아.”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했어……. 너 원래 이런 거 안 챙겨주잖아.”
“자유로운 도비가 되는데 절친한테 선물 하나쯤 해줘야지.”
박현철이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레 말하자, 이연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돌연 박현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봤다.
“나 그럼 간다. 이제 사원증 반납하러 가야 하거든.”
박현철은 제 목에 걸린 사원증을 흔들어 보였다.
“어, 어. 그런데 손은 왜 그래? 물렸어?”
“아, 고양이를 입양했거든. 아직 앙칼져서 물렸어.”
“사진 보여주라! 당연히 찍었지?”
“아직 경계가 심해서 못 찍었어. 넌 퇴근이지?”
“응. 당연하지. 사흘 밤새웠거든.”
박현철은 아쉬워하는 이연휘를 향해 손을 흔든 뒤 걸음을 돌렸다. 이제 비품실로 돌아갈 때였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박현철은 눈을 감고는 ‘도와줘요’라는 글자를 손가락 가는 대로 쳤다. 너무 멀쩡해 보이는 건 패스하고 적당한 모양새가 될 때까지 다시 입력했다. 이윽고 그의 마음에 꼭 드는 문자가 완성되자 바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나: 3ㅗ오ㅑ쥬ㅓ요]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박현철은 전화를 받자마자 통화 종료를 누른 뒤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는 박유찬. 박현철은 제 생각대로 흘러가는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폭소하며 웃고 싶은 걸 꾹 참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전화를 받았다.
“네. 박현철입니다.”
- 현철 씨! 혹시 하온이랑 같이 있어요?
“아, 아니요. 연휘랑 둘이 이야기하고 싶으시다고 해서 모셔다드리기만 했어요.”
- 위치, 위치가 어딥니까?
“무슨 일, 있는……. 아니, 잠시만요. 제가 확인해 볼게요!”
박현철은 일부러 짧은 거리를 뛰어가며 다급한 숨과 발소리를 들려줬다. 막 닫히는 엘리베이터 안에 이연휘가 반쯤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어! 엘베! 방금 연휘랑 하온 씨가 엘베에 탔어요!”
- 어디인가요?
“별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베예요! 제가 쫓아가 보겠습니다!”
- 저희도 움직일게요! 정곤 형! 별관 지하 주차장이요! 가드분들도 전부 그쪽으로 보내주세요!
- 어, 알았어!
다급한 외침을 들으며 박현철을 전화를 끊었다.
‘역시. 모르는 얼굴들이 보이더라니 저쪽 사람들이었군.’
이걸로 끝났다. 이제 진하온을 본관 지하 주차장으로 옮긴 뒤, 차에 태우기만 하면 정말 완전히 끝. 귀찮은 가드도 전부 빠졌을 테니 유유자적하게 방송국을 빠져나가면 된다. 진하온을 상자에 넣고, 카트를 끌고 가면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겠지.
‘한 달 정도만 숨죽여 지내면 돼. 그사이 몸도 마음도 길들이면 그만이야. 진하온이 내 편을 들어줄 텐데 누가 날 고소하고 체포하겠어?’
진하온과 함께하는 장밋빛 나날을 꿈꾸며 박현철은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즐거웠던 표정은 비품실 근처에 도착했을 때 싸늘하게 식을 수밖에 없었다.
조용했던 복도에 자신의 발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캉, 캉, 캉.’하고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찾을 필요도 없었다. 비품실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약도 먹이고 확실하게 묶어 놨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내게서 도망치고 싶다 이거지.’
흥분감에 잊고 있던 손이 욱신거리며 쑤셔왔다. 아까 진하온에게 물린 곳이었다. 박현철은 확실하게 교육할 필요성을 느끼며 비품실 문을 열었다.
“예절 교육이 필요하네.”
쾅.
비품실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