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
직업이 직업인 만큼 이런 것도 소품이라고 하면 할 수 있을 테니까. 조금 찝찝한 마음은 들었으나 이전에 소파남과 대화를 녹음할 때 쓰고 한 번도 쓰지 않았던 거라 오랜만에 테스트도 할 겸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이나 녹음한 후 재생했다.
“잘 되네요.”
박현철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제 이연휘를 이 대기실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박현철 씨를 올려다보며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 연휘야. 난데. 지금 시간 괜찮아? 어어.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아, 별건 아니고…….”
통화 음량이 낮은지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박현철 씨는 도중에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임으로서 긍정적이라는 신호를 줬다. 그리고 잠시 후 고맙다는 말과 함께 휴대폰 통화를 종료했다.
“AD님이 시킨 일이 있어서 20분쯤 걸릴 것 같다네요.”
“네. 그럼 기다리죠.”
가면가왕은 정체를 숨기는 게 필수라 따라온 멤버들은 전부 벤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걱정하고 있을 것이 뻔한 멤버들에게 톡을 보냈다.
[나: 20분 뒤에 온대요. 박현철 씨랑 기다리는 중이에요.]
[디아스-이서호: 헐헐ㅠㅠㅠㅠㅠ 결국ㅠㅠㅠ 아 나 걱정돼ㅠㅠㅠㅠ 진하온 조심해라 (머리로 벽치는 토끼 이모티콘)
[디아스-박유찬: 조심해...]
[디아스-정이한: 같이 있고 싶었는데..]
[디아스-백강현: 계속 중간보고해줘]
[나: 네ㅎㅎ 걱정마세요!]
“멤버들한테 보고하는 거예요?”
머리 위에서 툭 들어온 질문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형들이 걱정 많이 해서요.”
박현철 씨는 양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내게 건네길래 나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핫초코다!
“디아스 멤버분들은 정말 사이좋으신 것 같아요. 가끔 보면 부럽다니까요.”
“현철 씨도 이연휘 씨랑 친하시잖아요. 저를 도와줄 만큼.”
박현철 씨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으음. 대답을 잘못했나? 그 뒤로 대화가 끊긴 탓에 어색해진 나는 조용히 핫초코를 후후 불어가며 꼴깍 삼켰다. 저분도 은근히 말이 없다니까…….
핫초코를 다 마셨는데도 고작 5분이 좀 지났을 뿐이었다. 앞으로 15분……. 어색한 분위기 속이라 그런지 기다림의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나 보다.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휴대폰을 잡았다.
기다리는 동안 형들이랑 톡이나 하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단체 메신저 창을 막 열었을 때였다.
“어? 연휘?”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박현철 씨가 징징 울리는 휴대폰을 보며 갸웃거리고 있었다.
“전화 좀 받을게요.”
“네…….”
“어, 연휘야. 왜? 응. 어? 그래? 어……. 잠깐만. 아, 아니야. 괜찮아. 응응. 그래. 아니야. 진짜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응.”
왠지…… 느낌이 좋지 않은데. 혹시 여기 못 오게 된 건가? 초조한 마음으로 박현철 씨만 바라봤다. 통화를 끝낸 박현철 씨는 낭패감 서린 얼굴을 하고선 팔을 축 늘어트렸다.
“어떡하죠?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올 것 같다는데…….”
“아…….”
그럼 여기서 이렇게 끝내야 하나? 문제는 내게 주어진 기회는 한 번뿐 이라는 거였다.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은 없을지도 몰랐다. 어떡하지.
“……이연휘 씨는 어디에 있어요?”
“별관에 있을 거예요.”
“음.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면요?”
박현철 씨는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저었다.
“연휘가 지금 스튜디오에 있을 거라 그쪽에는 은밀하게 만날 장소가 없어요. 게다가 연휘는 꼼꼼하고 경계심이 많아서…… 아!”
미간을 찡그린 채 중얼거리던 박현철 씨가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밝은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있네요! 바로 옆에 며칠 전에 종방한 스튜디오가 있어요. 내부 공사 수주 전이라 아직 인부도 없거든요. 거기서 보면 되겠네요.”
“그럼 제가 거기서 기다린다고 전해 주실 수 있으세요?”
“우연히 마주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장소가 바뀌었으면 플랜도 바꿔야죠. 제가 그런 스튜디오에서 혼자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이연휘 씨를 만나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그건 그렇죠.”
“뒷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거기로 데리고만 와주세요.”
박현철 씨는 조금 내키지 않는 듯 보였지만 이내 알겠다고 수긍했다. 나는 박현철 씨를 따라 대기실을 나가면서 형들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나: 그분이 못 오게 돼서 제가 별관 A스튜디오 근처로 가는 중이에요. 박현철 씨랑 같이요.]
[디아스-이서호: 어... 위험하지 않아?]
[디아스-박유찬: 왜 틀어졌어?]
[디아스-정이한: 그냥 다음에 하자. 느낌이 안 좋아...]
[디아스-백강현: 그 사람 A스튜디오에 있대?]
[나: 네. 제가 근처로 가서 만나고 이야기해볼게요.]
계획이 바뀌었다는 내 통보 때문에 휴대폰이 계속 울렸다. 나와 나란히 걷던 박현철 씨가 이쪽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둘이 같이 있는데 휴대폰만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계속해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다고 박현철 씨와 대화를 하는 건 또 아니어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낯선 동행자와 걸음을 재촉했다. 별관까지 가는 길이 원래 이렇게 멀었나…….
“이쪽이에요.”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걷던 중, 박현철 씨가 어두컴컴한 복도를 가리켰다. 복도에는 기자재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스튜디오가 이쪽이에요?”
“네. 여기가 지름길이거든요.”
“……아.”
복도를 차지하고 있는 짐 때문에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도 없을 만큼 좁은 길이었다. 방송국에 이런 곳도 있었나. 별관에는 예능 촬영하면서 몇 번 와봤는데, 내가 다녔던 길은 항상 밝고 깨끗했었다.
“가시죠.”
좁고 어두컴컴한 복도를 반쯤 지나왔을 때 나는 형들에게 메시지를 한 번 더 보내려고 톡 방을 켰다. 음. 현재 위치도 알려주는 게 낫겠지? 사진 찍어서 보내줘야겠다. 별생각 없이 카메라 모드로 전환했을 때였다. 내 휴대폰에 잡힌 앵글 속에서 박현철 씨가 나를 돌아보며 스산하게 웃고 있었다.
몸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뭐지? 뭔가…… 이상한데?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박현철 씨를 경계했다.
“하온 씨.”
미묘한 열기를 품은 목소리였다. 발끝에서 시작한 소름이 머리끝까지 내달린 건 한순간이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해요? 섭섭하게.”
내가 뒷걸음질 친 만큼 박현철 씨가 큰 보폭으로 내게 다가왔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다가 쌓여 있던 자재에 부딪혔다. 텅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섭섭하게 한 게 있었나. 뭐, 괜찮아요. 이제부터 우린 같이 지낼 거니까.”
박현철이 웃었다.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스토커였어!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돌아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나보다 박현철이 더 빨랐다. 그가 뒤에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잡힌 팔을 빼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거 놔요! 놔! 도와주세요!”
“하온아, 그러면 안 되지.”
다정한 어조로 날 부르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박현철이 발버둥 치는 나를 확 끌어당겼다. 몸이 훅 끌려감과 동시에 입이 틀어 막혔다. 내 등에 박현철의 가슴이 닿았다.
“읍!”
내 입을 덮은 손등을 마구 긁어댔는데도 박현철은 꿈쩍도 하지 않고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다리 힘으로 버티려고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맞아! 스프레이!
나는 곧장 주머니에 손을 넣어 스프레이를 꺼내 들었다. 그 순간 박현철이 내 팔목을 쳐냈다.
깡!
바닥으로 떨어진 스프레이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았다. 박현철은 스프레이를 가볍게 발로 차서 밀어낸 뒤 내 귓가에 속삭였다.
“스프레이 가지고 있는 걸 훤히 아는데 당할 순 없지.”
박현철은 한쪽 팔로 날 제압한 채 근처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렇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절대 끌려가면 안 돼! 나는 박현철의 정강이를 노리고 있는 힘껏 발차기했다. 하지만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두어 번의 헛발질을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한 번 더!
“윽.”
맞았다! 박현철이 고통 어린 신음을 냈다. 순간 내 입을 가린 손이 떨어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박현철의 손을 물어버렸다.
“악!”
됐다! 이제 도망치면……!
털썩.
갑자기 다리가 저리더니 힘이 쑥 빠졌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벌벌 떨리는 손을 내려봤다. 바닥을 짚고 있는 두 팔이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일어서 보려고 했는데 계속 몸이 무너졌다.
“하, 시발.”
등 뒤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온몸의 체온이라도 빼앗긴 듯 손끝부터 차게 식어갔다. 왜, 안 움직이는 거야? 도대체 왜?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박현철이 내 옆에 쪼그려 앉아 내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내 쪽으로 밀어 넣었다. 치켜 올라온 그의 눈동자는 기분 나쁜 빛을 띠며 일렁이고 있었다.
“코코아는 맛있었어? 우리 하온이가 좋아하는 거잖아.”
설마 핫초코에…… 약을 탔어?
차가운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기어 다녔다. 그 손을 쳐내고 싶었으나 마비된 것처럼 손가락질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박현철은 덜덜 떨고 있는 나를 안아 올렸다. 팔과 다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으, 윽.”
이상한 느낌이 들었을 때 경계했어야 했는데. 내 안일함이 이 사달을 만들었다. 박현철은 나를 그리 넓지 않은 어두컴컴한 방으로 데려갔다. 그 순간 복도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으아, 이게 다 뭐야?”
“누가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었어?”
“젠장.”
인상을 찌푸린 박현철은 가슴 안주머니에서 꺼낸 천을 내 입에 물리고 벌떡 일어나 제 몸을 정리한 뒤 나가 버렸다.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던 문이 닫히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 찾아왔다.
“읍, 윽, 흐으, 윽.”
도움을 청하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정작 새어 나온 건 울먹임 같은 희미한 소리뿐이었다. 힘이 안 들어가…….
“죄송합니다. 비품실 정리 중이라서요.”
“어우, 현철 씨였어? 그래도 그렇지. 복도에 이렇게 늘어놓으면 통행에 방해되잖아요.”
“금방 정리하겠습니다.”
약효가 점점 강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소리를 지를 힘조차 없어서 나는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지나가던 이들의 목소리가 빨리 정리하라는 말과 함께 점점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