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우리 쪽 사람이 한 명 많아서 봉팀이 먼저 도전하기로 했다. 우리팀 첫 번째 순서는 강현 형으로, 회사원 쪽지를 내밀자 형의 품에는 수트 하의, 와이셔츠, 재킷, 넥타이, 양말에 구두까지 주어졌다.
워터슬라이드에서 나왔을 때 제대로 착용한 피스 하나당 일 점이라고 했는데, 솔직히 1점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실내용 워터슬라이드라서 그렇게 길지도 않았고, 씌워 놓은 검은 천 때문에 어두울 테니 아무것도 안 보일 것 같단 말이지. 옷의 종류가 많으면 오히려 방해될 듯했다.
나는 강현 형한테 다가가서 뭐든 상관없으니 딱 하나만 제대로 착용할 수 있는 걸 노리라고 언질을 줬다.
“서 피디! 양말은 하나만 제대로 신어도 1점 입니까?”
봉재범 선배님이 서 피디님께 묻자, 양쪽 다 제대로 신어야만 1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찬 형은 넥타이가 제일 쉬워 보인다고 했고, 봉재범 선배님은 구두를 노리라고 조언했다.
강현 형은 마지막으로 내 의견도 물었다. 나도 봉재범 선배님과 마찬가지로 구두에 한 표를 던졌다. 넥타이는 물에 젖으면 구멍 찾기가 힘들어 보이지만, 구두는 형태가 온전히 유지 되니까.
“그럼 구두만이라도 제대로 신는 걸로 하겠습니다.”
짧은 작전 회의 끝에 강현 형이 워터슬라이드에 올랐다. 우리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열심히 강현 형의 이름을 외치면서 응원했다. 위에서 “도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기다리길 십여 초.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강현 형이 물속에 잠겼다. 멋들어지게 물기를 털어내면서 밖으로 나온 강현 형의 팔에는 넥타이가 끼워져 있었다.
다른 옷은 동실동실 떠다녀서 볼 것도 없었고, 어째서인지 재킷의 한쪽 팔이 발목에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구두는 한 짝밖에 못 신었다. 영락없는 취객이 된 모양새가 너무 웃겨서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백강현 0점!”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더 어렵네요…….”
강현 형의 허망한 얼굴이 웃겨서 도무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하학!”
와, 미쳤다. 진짜 너무 웃겨! 강현 형은 우리를 머쓱하게 보다가 결국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형의 잘생긴 얼굴도 취객 패션 앞에서는 빛을 잃었다. 아니, 아니지. 오히려 잘생긴 얼굴로 저러고 있으니까 더 웃겨!
다음 차례는 백팀이었는데 이서호가 쪽지를 들고나오면서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저는 바나나입니다!”
“푸흡!”
바나나 뭔데! 바나나가 된 이서호를 상상하면서 조금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뭘 받을지 지켜봤다. 이서호가 받은 건 바나나 옷이었다.
목까지 통짜로 된 바나나 옷은 엉덩이 부분이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거기에 커다란 노란색 신발과 머리에 쓰는 바나나 꼭지까지, 웃기지 않는 게 없었다.
유찬 형의 기린도 저런 느낌이겠구나. 소품만 봐도 웃겨서 뺨이 당길 지경이었다. 이서호는 제 몸보다 큰 바나나 옷을 들고 워터슬라이드 위로 올라갔다.
이서호보다 먼저 바나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 나왔고, 이어서 솜옷에 뒤엉킨 이서호가 쓸려 나왔다.
“악! 이거 절대 못 입어요!”
물살을 헤치고 일어나자마자 바나나 옷을 끌어당기면서 울상을 지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서호는 신발을 제대로 신고 있었다. 본인도 놀란 듯 “이게 왜 됐지?”하고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다 뒤늦게 1점 이겼다면서 깡충 뛰었는데, 신발만 두고 발만 쏙 빠져나와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했다.
이어서 우리 팀의 봉재범 선배님은 기관사 의상의 모자 하나만 사수했는데, 앞뒤를 반대로 써서 0점이었다. 백건 선배님은 치킨을 뽑았고, 이서호 때와 같은 인형 옷을 받았다. 백건 선배님도 다른 건 다 버리고 오직 치킨 모자만 사수해서 백팀이 한 번 더 1점을 얻어갔다.
0대 2로 뒤처지는 상황에서 나와 유찬 형이 1점씩 얻어도 동점이 된다. 첫 번째 게임부터 많이 불리해졌는걸…….
“……이거, 어. 음.”
유찬 형은 건네받은 기린 옷을 들고 당황스러워했다. 확실히 당혹스러울 만했다. 앞선 바나나, 치킨 옷과 달리 유찬 형의 기린 옷은 목 중간에 얼굴이 빼꼼 나오는 형식이었다. 기린의 긴 목을 생각하면 이게 맞는 것 같긴 한데, 워터슬라이드 안에서 입기엔 난이도가…….
“저는 장갑만 노립니다.”
유찬 형은 신발보다 장갑이 쉬워 보인다면서 도톰한 솜 장갑을 옆구리에 끼웠다. 이서호와 마찬가지로, 유찬 형도 기린 옷들과 뭉쳐진 채 쓸려 나왔다. 기적적으로 장갑을 제대로 착용해서 우리 팀은 가까스로 1점을 얻었다.
상대 팀의 마지막 도전자, 정이한은 자신 없는 듯 연거푸 한숨 쉬면서 쪽지를 내밀었다.
“정이한 씨, 나이트!”
나이트? 기사 할 때 그 나이트인가? 내 의문은 스태프들이 들고나온 박스를 보자마자 풀렸다.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푸학! 저게 뭐야!”
손가락질하며 웃는 유찬 형과 달리, 시름이 깊어진 듯한 정이한은 두 손으로 박스를 받았다. 그 안에는 중세 기사들이 입었을 법한 갑옷 파츠가 여럿 들어 있었다. 쇠가 아니라 솜으로 된 갑옷들이었는데,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 구현해 놔서 거의 꽝이라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정이한 도전하겠습니다.”
터덜터덜 걸어 올라가는 정이한의 뒷모습은 애처로운 만큼이나 웃겼다. 나는 유찬 형에게 매달려 큭큭거리면서 웃음을 삼켰다. 결과가 나온 건 순식간이었다.
워터슬라이드를 미끄러져 나온 정이한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거의 맨몸으로 나온 정이한의 뒤를 이어서 솜 갑옷 파츠가 후두둑 쏟아졌다. 정이한은 멍하니 제 등을 때리는 솜들을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정이한 0점! 이걸로 봉팀 1점, 백팀 2점입니다!”
만약 내가 1점을 득점한다면 대표끼리의 연장전으로 가는 거고, 실패하면 그대로 패배였다. 나는 당당하게 백설 공주 쪽지를 건넸다. 이서호가 어울린다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윽. 이서호 복수할 거야.
어차피 백설 공주 인형 옷을 줄 테니까 머리 하나 잘 뒤집어써서 동점으로 만드는 게 내 계획이었다. 그런데 내 손에 쥐어진 건 진짜 드레스였다. 원피스로 된 드레스, 구두에 심지어 왕관까지 있었다.
“……피디님?”
“네, 하온 씨.”
“왕관은 손으로 잡아도 인정해 주시나요? 고정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정확한 위치에 있다면 인정합니다.”
동시에 우리 팀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백팀에서는 야유가 터졌다. 봉재범 선배님이 대표로 나서서 백설 공주 왕관을 옹호하는 사이 나는 재빨리 워터슬라이드로 올라갔다.
“진하온 도망친다!”
이서호가 나를 저격하길래 상큼하게 웃어준 뒤 호다닥 걸음을 서둘렀다.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올라 워터슬라이드 꼭대기에 다다랐다. 왕관 하나만 사수하자.
나는 굳게 결심한 뒤 도전을 외치고 워터슬라이드 출발점에 앉았다. 띠링, 소리와 워터슬라이드 통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런데 예상보다 실내가 훨씬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빨라!
“아아악!”
나는 정신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몸뚱이를 제어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정신 차리고 허겁지겁 왕관을 찾았다. 그런데 내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빛이 조금 들린다 싶더니 끝이었다. 풍덩, 하는 물소리와 함께 머리까지 물에 잠겨 버렸다. 대비하지 못하고 빠지는 바람에 물을 한껏 먹어 벌떡 일어나자마자 콜록거렸다.
“켁, 콜록.”
“진하온 0점!”
“……아.”
씁쓸하게 기어 올라왔더니 유찬 형이 괜찮다면서 웃어 보였다. 봉재범 선배님도 다음에 이기면 된다면서 내 등을 철썩철썩 두들겼다. 아, 아프다.
“첫 번째 어드벤티지 카드는 백팀이 획득했습니다!”
백건 선배님이 대표로 나와 ‘A 카드’를 받아 갔다.
***
유수풀 이어달리기, 워터봅슬레이 타고 내려오면서 적힌 문장 맞추기, 서핑 오래 버티기까지 진행한 끝에 어드벤티지 카드는 봉팀이 2개, 백팀이 2개로 팽팽한 접점을 만들었다.
이어지는 마지막 경기는 어린이 풀장에 만들어 놓은 외나무다리 싸움이었다. 연두색과 하얀색 봉이 각 팀에 하나씩 주어졌다.
“데스 매치니까 강현이가 마지막 순서로 가면 어떨까요?”
유찬 형의 의견에 봉재범 선배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한 명 많으니까 그게 좋겠어. 앞에서 최대한 힘을 다 빼놓자고.”
최근 정이한이랑 이서호 모두 근력 운동을 열심히 한 탓에, 사실 저 둘도 만만치는 않았다. 봉재범 선배님도 두 사람의 존재가 걱정이었는지, 이서호와 정이한의 팔 근육을 보고는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일단 내가 처음으로 나가서 물귀신 작전으로 한 명이라도 무조건 끌고 들어간다.”
“제가 두 번째 할게요.”
내가 지원하기가 무섭게 두 형들이 ‘안 돼.’를 외쳤다.
“하온이는 마지막 하자.”
유찬 형이 내가 안고 있는 봉을 콕콕 찌르면서 이거 아플지도 모른다면서 겁을 줬다. 재질이 폭신해서 그렇게 아프지 않아 보이는데.
“저 마지막은 부담돼요…….”
솔직히 백팀 세 명 모두 내가 힘으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럼 세 번째나 네 번째로 나간다고 했더니, 강현 형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럼 내가 두 번째로 나가는 건?”
“안 돼요. 형이 뒤에 있어야 든든해요.”
“…….”
강현 형은 날 물끄러미 보다가 크흠, 하고 헛기침했다. 그러더니 평소 형답지 않은 부끄러운 듯한 투로 “그럼 세 번째로 나갈래?”하고 물어왔다.
그건 괜찮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더니 강현 형이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이제 유찬 형만 통과하면 되는데. 유찬 형을 향해 열심히 눈을 깜박거리면서 마지막이 싫다는 걸 어필했다.
“……으. 알겠어. 그럼 내가 두 번째. 하온이 세 번째.”
유찬 형은 마지막으로 봉재범 선배님께 순서가 괜찮을지 물었다. 선배님은 호쾌하게 우리가 정한 순서에 동의하셨다.
작전 타임이 끝나고 곧바로 본 경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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