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이렇게 된 거, 강현 형을 빠트려야겠다. 나는 기습적으로 벌떡 일어나 강현 형의 가슴팍을 어깨로 있는 힘껏 밀쳤다. 하지만 내 발만 미끄러질 뿐, 강현 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와악!”
“악!”
그 순간, 첨벙 하는 소리가 나면서 두 사람이 나란히 물에 빠졌다. 정이한이 4등이라는 걸 보니 유찬 형보다 먼저 물에 닿은 모양이었다.
이걸로 2등 확정이네! 뭔가 어부지리로 얻은 것 같았지만, 2등은 2등이니까.
나는 발가락에 힘을 딱 주고 강현 형을 밀어냈다. 어쩐지 조금씩 밀리는 듯한 느낌이 나서 혹시, 하는 생각이 들 때였다. 그 순간 형이 내 귓가에 “미안.”하고 속삭였다.
뭐가 미안하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과의 이유를 깨달은 건 몇 초 걸리지 않았다. 형이 뒤로 크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무게 중심을 내 어깨에 전부 실어 형의 가슴을 밀던 내가 균형을 잃고 앞쪽으로 꼬꾸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 어!”
앞으로 두어 걸음 튕겨 나갔더니, 부표 끝자락이었다. 강현 형은 확인 사살하듯 균형을 잡으려고 버둥거리는 내 등을 밀쳤다.
“악!”
“1등 백강현!”
물에 빠지면서 들은 소리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으아.”
바닥을 딛고 일어나면서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괜찮아?”
강현 형이 부표 위에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미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장난기가 동한 나는 형의 손을 잡자마자 쭉 잡아당겼다.
내가 노린 건 강현 형과의 동반 입수였는데, 대반전이 일어났다. 강현 형이 날 가볍게 끌어 올려 버린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강현 형한테 팔을 잡힌 상태에서 부표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
이건 거의 아버지가 조막만 한 아들 건져 준 그런 느낌인데…….
허망함에 맥이 탁 풀린 나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주저앉아 바닥만 바라보았다. 강현 형한테는 절대 덤비지 않는 걸로…….
“으하학! 진하온 그렇게 가벼워?”
이서호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놀려댔다. 나도 아까 물에 빠진 이서호를 향해 한껏 웃어줬으니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나는 부표가 풀장 끝에 붙는 걸 기다렸다가 이서호에게 마구마구 물을 끼얹었다. 이서호가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걸 보니 속이 시원했다. 내로남불이면 어때. 복수의 맛이 이렇게 달콤한데!
***
우리는 팀 결정을 위해 재집결했다. 유일하게 얼굴이 젖지 않은 강현 형 홀로 뽀송뽀송한 피부를 자랑하면서 왕의 위엄을 보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왕관이 형의 머리에 둥실둥실 떠 있는 것 같았다.
“형 혼자 뽀송뽀송하니까 좋아요?”
“……크흠.”
민망해하는 강현 형이 귀여워서 슬쩍 웃다가 날 호명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온 씨부터 팀 선택해주시면 됩니다.”
나는 제일 먼저 카메라 코앞에 있는 탁상으로 걸어갔다. 두 개의 팀 조끼가 나란히 놓인 곳 앞으로 다가가는데, 선배님들은 서로 본인의 팀으로 오라며 외치기에 바빴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연두색과 하얀색 조끼를 노려봤다. 연두색은 봉재범 선배님의 팀이었고, 하얀색은 백건 선배님의 팀이었다.
런&런은 체력이 관건이다. 강현 형이 백팀으로 가버리면, 그대로 밸런스 무너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백건 선배님도 체력에 뒤처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봉재범 선배님의 잔머리 또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따금 터지는 봉재범 선배님의 작전에 체력 밸런스를 무시하고 이긴 케이스도 여럿이었다.
좋아. 어차피 예능이니까 좀 더 재밌을 것 같은 곳으로 가야겠다. 나는 곧바로 봉재범 선배님의 연두색 조끼를 집어 들었다. 봉재범 선배님이 환호했고, 백건 선배님은 유앤아이의 정을 잊었느냐며 서운해하셨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반 팔 티셔츠 위에 연두색 조끼를 겹쳐 입었다. 그리고는 봉재범 선배님 곁으로 쪼르륵 달려갔다.
이어서 유찬 형의 차례였는데, 형은 별 고민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연두색 조끼를 집어 들었다. 백건 선배님이 본인은 선택받지 못했다면서 눈물을 흩뿌렸다. 동시에 유찬 형은 정이한을 향해 조끼를 흔들어 보였다.
도대체 왜 정이한한테 자랑하는 거야? 더 황당한 건 그 자랑이 정이한한테 먹혔다는 거였다. 정이한의 어깨가 아래로 처지는 걸 보면서 나는 눈매를 좁혔다.
설마 유찬 형…….
정이한이 나 좋아하는 거 눈치챈 건 아니겠지? 하지만 지금 행동을 보면 나와 정이한을 떨어트려 놓으려고 한 것처럼 보이는데…….
에이, 아니겠지. 아니…겠지? 지금은 촬영 중이니까 나중에 슬쩍 떠봐야겠어. 뭔가 싸한 기분이 들어, 내 촉이 맞는지 따지는 사이 유찬 형이 해맑게 웃으면서 달려왔다.
“하온아, 형아 왔다!”
유찬 형은 나와 똑같은 연두색 조끼를 겹쳐 입으면서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이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보다 문제가 있었다. 유찬 형이 봉팀으로 오는 바람에 이후 팀 선택은 싹 편집되게 생긴 것이다. 정이한과 이서호는 선택할 것도 없이 백팀이니까.
그나마 남은 편집 포인트는 강현 형뿐이었다. 엘리트인 강현 형을 노리는 리더들의 팀 어필 경쟁이 어마어마했다.
“막둥아!”
봉재범 선배님이 갑자기 내 팔목을 휙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내 어깨에 양손을 올려 앞쪽으로 밀더니 “강현이를 향해 애교 발사!”하고 외쳤다.
……선배님? 통할 리 없잖아요? 우리가 보이그룹이라는 걸 잊으신 건가.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그런 거 못 한다고 잡아 뺐다. 강현 형이랑 사이 틀어지면 어떡해!
“뭐? 우리도 질 수 없지! 서호야!”
백건 선배님이 이서호를 잡아끌어 앞에 내세웠다. 이서호는 얼굴에 뻔뻔함을 두른 채 “형아~ 백팀으로 와줘잉!”한 뒤 입으로 뿌잉뿌잉 소리를 냈다. 강현 형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저것 봐요. 역효과 난다니까요.”
나는 강현 형의 미간을 가리키면서 뒷걸음질 쳤다. 봉재범 선배님이 너는 통할 거라면서 나를 설득하는 사이 강현 형이 우리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서호 애교 잘 봤고. 하온이는?”
“…….”
이거, 이 형. 의외로 예능에 진심이네. 어떻게든 편집점을 살리겠다는 형의 각오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뺄 순 없지. 그래, 눈 딱 감고 하자.
나는 세 살 어린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바름을 머금어 뺨을 부풀렸다.
“하오니는 형아랑 하고시퍼요.”
애기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최선을 다 해봤지만, 도저히 부끄러워서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귓불이 점차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붉어졌을 게 분명한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선 유찬 형은 내가 제일 귀엽다면서 평소처럼 주접 리더형 모먼트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어린애를 대하는 듯한 강현 형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하온이는 형이랑 뭐가 하고 싶은데?”
이거 놀리는 게 분명해! 이럴 땐 뻔뻔하게 나가야 하는데. 뻔뻔하게…….
“가튼 팀…….”
역시 난 못 하겠어…….
“백강현 봉팀 선택!”
피디님의 낭랑한 목소리에 손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강현 형이 연두색 조끼를 집어 들어 셔츠 위에 겹쳐 입으면서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야, 강현아 부럽다. 하온이 애교 완전 레어템인데.”
유찬 형이 헤죽거리면서 나를 놀렸다. 그 사이 봉재범 선배님은 백 팀을 향해 이미 다 이긴 게임이라면서 도발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이기면 어떡할 건데요!”
봉재범 선배님이 한껏 비아냥거리면서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준다!”하고 외쳤다. 그러자 백건 선배님이 그 말을 덥석 물었다.
“콜! 저희가 이기면 뭐든 들어주는 겁니다?”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어느새 피디님까지 참전하여 새로운 규칙이 추가됐다. 이긴 팀은 패배 팀 중 한 명을 호명하여 소원을 요구할 수 있고, 지명 당한 사람은 그 소원을 들어주기로.
그러자 백팀은 무조건 이기자면서 전의를 다잡았다. 백팀의 어마어마한 기합 사이에서 정이한의 굵은 목소리가 유달리 선명하게 들렸다. 우리 팀에 오지 못해 서운한 것 같았는데,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었다.
***
첫 번째 게임 진행을 위해 우리를 데려간 장소는 실내에 있는 워터슬라이드였다. 레일을 보니 뱅글뱅글 돌기는 하지만 통으로 되어 있어서 내부가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심지어 통에 검은 천을 뒤집어 씌워놔서 내부에 들어가면 어두컴컴할 것 같았다.
실내용 풀과 워터슬라이드 출구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발목까지 찰랑찰랑 적시는 곳에 서서 피디님의 설명에 주목했다.
“첫 번째 게임은 워터슬라이드에서 옷 입기입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피디님은 들고 있는 상자 안에 우리가 입어야 할 ‘의상’이 들어 있다면서 상자를 물 위에 내려놓았다. 피디님은 둥실둥실 떠 있는 상자를 가볍게 밀어 우리 쪽으로 보냈다. 떠밀려 오는 상자를 봉재범 선배님이 주워 드셨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한 뒤 줄줄이 상자 속에서 쪽지를 뽑아 들었다. 나는 내 쪽지에 적힌 글자를 보고 눈을 끔벅였다. 이거 맞아?
“하온이 뭐 뽑았어?”
유찬 형이 물어와서 쪽지를 보여주며 울상을 지었다. 형은 내 쪽지에 선명하게 적힌 ‘백설 공주’ 네 글자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흐흫흐흐, 기, 기대된다, 하온아.”
나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유찬 형을 노려봤다.
“그러는 형은 뭔데요.”
웃음을 뚝 그친 형이 내게 쪽지를 내밀었다.
“나는…….”
“……기린이요?”
“으응.”
도대체 기린 옷이란 게 뭔데……. 기린 인형 옷이라도 입는 건가? 이쯤 되니 강현 형도 뭘 뽑았는지 궁금해져서 곧장 물었다. 형은 회사원이라는 무난한 선택지를 뽑았다.
진짜 신에게 선택받은 남자 아닌가. 알고 보면 강현 형은 인생 3회차 아니냐고. 이렇게까지 축복받을 수 있나. 나는 내 백설 공주를 힘없이 들여다봤다.
심지어 봉재범 선배님도 ‘기관사’라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걸 뽑았다. 백팀은 뭘 뽑았는지 궁금했는데, 이 또한 정보라면서 절대 알려 주지 않았다. 승부욕에 활활 타오르는 걸 보니 백팀이 이기면 곤란한 소원을 빌 것 같았다. 나는 전의를 다잡으면서 꼭 이기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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