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49화 (149/320)

149.

드라마 야외 촬영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틀째라 그런지 어제보다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는데, 그나마 촬영지에서 꽤 먼 곳부터 통제 중이라 다행이었다.

“고우진 배우님 먼저 도착해 계신다는데?”

“헉, 제가 1등 아니에요?”

“……그러게. 우리도 빨리 온다고 왔는데.”

나는 곧장 선배님께 인사드리기 위해 서둘렀다. 벤에서 내리자 멀리 통제 구역 바깥에서 서성이다가 날 발견한 디어리들의 함성이 들렸다. 선배님의 벤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들겼다. 자동문인지 혼자 스르륵 열리길래 잠깐 신기해하다가 올라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진하온입니다!”

기합을 잔뜩 넣어 씩씩하게 인사하자, 고우진 선배님이 들고 있던 대본을 내려놓으며 인사를 받아주셨다.

“오늘이 우리 첫 촬영이죠? 오디션 때 보여준 연기가 너무 좋았어서 기대하고 있어요.”

“헉, 노, 노력하겠습니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내 대답에 선배님이 왜 그렇게 긴장했냐고 웃음을 터트리시더니 편하게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벤 내부는 가끔 너튜브에서 보던 캠핑카처럼 꾸며져 있었다. 가운데에 놓인 길고 얇은 타원형 테이블을 기준으로 U자 형태의 맞춤형 벤치가 둘려 있었다. 차량 시트 같은 건 운전석 뒤에 있는 좌석 하나뿐이었다.

“서 있지 말고, 와서 앉아요.”

선배님은 가장 뒷줄에 앉아 계셔서 오른쪽 창가 쪽 벤치에 앉았다. 신기한 마음에 두리번거리다가 차량용 냉장고를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헐, 와! 냉장고도 있어!

“응? 푸하핫, 이거 마음에 들어요?”

“앗, 죄송해요. 신기해서요…….”

어쩐지 촌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좀 부끄러워져서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 포커페이스의 귀재 아니었나 봐…….

“응? 죄송할 게 뭐 있어요. 마음껏 봐요. 제 자랑이니까 좋아해 주면 저야 좋죠. 덥죠? 보리차 괜찮아요?”

“넵! 좋아해요!”

선배님은 컵에 보리차를 따르더니 얼음까지 동동 띄워 내 쪽으로 밀어주셨다. 우와아. 우리도 이런 거 있으면 좋겠…지만, 멤버 수가 많아서 밴에 냉장고 넣을 자리가 없네. 더위 많이 타는 유찬 형과 이서호한테 맞춤일 것 같은데, 아쉽다.

“어제 두들겨 맞는 씬은 잘 찍었어요? 얼굴에 상처는 안 남은 거 같네.”

“아, 네! 금방 끝났어요!”

보호구를 단단히 착용한 덕에 소리만 요란하지 아프지도 않았고, 두들겨 맞는 건 실전으로 학습되어 있어서 진짜 금방 끝났다. 그리고, 그렇게 대답함과 동시에 선배님과의 대화도 끝났다…….

어떡하지? 나 할 말 없는데……. 뭐 더 안 물어보시나? 마가 뜨는 게 어색해 보리차를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벌써 바닥을 보이려 하고 있었다.

용기 내어 뭐라도 말을 꺼내 보려던 순간, 벤이 열리면서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승리한이었다! 매번 밉상이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환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승리한을 반겼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

승리한은 잠깐 멈칫한 상태에서 날 바라보다가 뒤늦게 “아, 네. 하온 씨. 안녕하세요.” 인사하고는, 자연스럽게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선배, 저도 보리차.”

“맡겨놨냐? 주세요는 어디 갔어? 주세요는?”

“주세요~”

저 사람한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뭐랄까, 처음으로 승리한이 배우가 아닌 평범한 그 나이대의 남자로 보였다. 두 분이 꽤 친한가 보네.

“하온 씨도 더 줄까요?”

“넵!”

컵이 완전히 비어 버리면 어색한 상황일 때 더 어색해질 것 같으니 리필은 환영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리한이 너 하온 씨한테 엄청 빡빡하게 군다면서? 소문이 자자하더라.”

오, 그게 소문이 날 정도야?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했는데, 승리한은 날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렇죠. 선배도 처음에 나 그렇게 굴렸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13살 코흘리개였을 때.”

“크하하! 그거야 배우로 대성할 싹이 보였으니까 그랬지.”

“그리고 최근에는 딱히 괴롭히지도 않아요. 잘하고 있으니까.”

“……저 잘하고 있어요?”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반문하는 말이 튀어 나갔다. 승리한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나를 한 번 보고는 컵을 흔들었다. 달그락거리는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단순히 보리차를 마시는 건데 손에 든 게 꼭 보드카처럼 느껴질 정도로 우아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네. 잘하고 있어요. 촬영 시작하면 진하온 씨는 사라지고, 정현만 남아요. 사소한 행동거지, 걸음, 말투. 그리고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버릇까지. 연기하는 배역이 가졌을 법한 버릇까지 만들 만큼,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신 거겠죠. 최선을 다해서.”

……진짜 사소한 부분까지 다 봐주고 있었구나. 이거 뭔데 감동이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인정받았다는 기분에 솟구치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요?”

“넵! 그럼요!”

“왜 정현이가 머리 만지는 버릇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질문은 쉽지!

“형이 머리를 자주 만져주니까요. 그래서 정현이에게 버릇이 있다면, 그런 쪽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머리를 만지면서 형에게 받은 애정을 떠올릴 것 같아서요.”

승리한은 날 보면서 천천히 미소 지었다.

“좋네요.”

와, 나 합격했나 봐!

“오호, 그래? 이 친구도 빡세게 가르쳐주면 그만큼 성장하는 타입?”

고우진 선배님이 눈을 빛내면서 나를 봤다. 승리한 2가 재림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반사적으로 엄살 부리는 말이 튀어 나갔다.

“사, 살살해 주세요…….”

“하핫! 그래요, 저라도 살살할까요?”

“네, 부디…….”

고우진 선배님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귀엽다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온 선배님이셨다. 그러니 까라면 까야겠지만, 그래도 살살해줬으면 좋겠다…….

“이따 제가 멋지게 구해줄 테니까 기대하세요.”

아! 오늘 제일 먼저 찍을 씬 이야기다. 지갑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진이 있어서 불량배한테 뺏기지 않으려고 두들겨 맞던 정현이를 형사 박대길이 구해주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정현을 찾아낸 정준이 인상 사나운 형사를 보고 오해하여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는 씬을 원큐에 찍기로 되어 있었다.

“네!”

“아학학! 농담이었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대답하니까 민망한데요?”

어……. 그럼 뭐라고……. 당황해서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승리한이 끼어들었다.

“구해내고 난 다음엔 저한테 얻어맞을 예정.”

“음? 가만. 너 감정 실어서 치면 안 된다?”

“글쎄요?”

두 사람이 어쩐지 살벌하게 들리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웃었다. 근데, 방금 나 민망할까 봐 중간에 끼어들어 준 건가? 에이, 아니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승리한인데.

***

최근 며칠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드라마 촬영도 큰 문제 없이 술술 진행되고 있었고, 승리한과의 관계도 꽤 유들유들해졌다. 그렇다고 편해진 건 아니고……. 서울과 뉴욕까지의 거리가 서울과 강원도 정도의 거리감으로 좁혀진 느낌이랄까.

친해졌다, 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건 오히려 고우진 선배님이었다. 대선배님이라서 매번 뻣뻣하게 굳기만 했던 거 같은데, 어째서인지 나를 예뻐해 주셔서 감사하기만 했다.

고우진 선배님의 SNS에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올라갔는데, 우리 디어리들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아해 준 것도 신기하고, 기뻤다.

매니저 형이 댓글을 몇 개 보여줬는데, 디어리들은 내가 촬영장에서 선배 배우님들께 귀염받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내 일을 본인들의 일처럼 생각하고 좋아해 주는 우리 디어리들이 있어서 항상 든든했다.

드라마 촬영과 더불어 미니 앨범 준비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다시 무대에 서서 디어리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레서 잠도 잘 안 왔다.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싶은 나날들이었다.

O.D.I 촬영만 없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텐데…….

“으앗! 차가워!”

갑자기 목덜미에 닿아온 냉기에 화들짝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이서호가 낄낄거리면서 음료수 캔을 흔들고 있었다. 찬기가 닿았던 뒷덜미에 소름이 돋아서 슥슥 문지르는데 이서호가 캔을 내 쪽으로 던졌다. 높은 호선을 그리며 추락하는 캔을 본능적으로 잡아챘다.

“더 쉴 거야?”

“응.”

“그럼 나도 좀 쉬어야겠다.”

이서호가 내 뒤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얼마 안 가 등을 꾹꾹 눌러오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무게를 못 이긴 상체가 앞으로 수그러졌다.

“무거워!”

“좀만 기대자~”

고작 음료수 캔 하나로 힘을 얻어 버텨내기엔 무겁기도 무겁지만, 무엇보다 맞닿은 등이 더웠다.

“더워……. 벽에 가서 기대, 에어컨 바로 밑이라 시원하잖아…….”

“거긴 딱딱하잖아.”

“나도 딱딱하거든?”

“아닌데? 완전 몰랑거리는데?”

아니? 이 자식이?

“나 안 몰랑하거든!”

“엉? 그래? 확인해 볼까?”

이서호가 팔을 뒤로 돌려 내 옆구리를 움켜잡았다. 조물조물 움직이는 손가락이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워 몸이 절로 베베 꼬였다.

“어엄청~ 부드럽다아~”

“가, 간지러워! 아, 그만, 아하학!”

이서호의 팔목을 잡아서 꾹꾹 내리눌렀는데, 팔에 힘줄이 돋을 만큼 힘을 딱 주고 버틴다. 이 자식, 나 놀리는데 진짜 진심이라니까?

“이, 이한, 형! 으하학! 이한 형, 도와줘요! 도와줘!”

근처에 있던 정이한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길래 다급하게 도움을 청했다. 이서호는 정이한을 보자마자 잽싸게 손을 거둔 채 도망쳐 버렸다. 어, 억울해! 억울하다고!

애꿎은 연습실 바닥만 주먹으로 쾅쾅 내리치고 있는데, 강현 형이 외쳤다.

“연습하자!”

그래……. 연습, 연습하자. 이서호, 너한텐 언젠가 꼭 복수한다. 때마침 정이한이 손을 내밀어줘서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타이틀곡 안무는 어느 정도 익힌 상태라서 요 며칠은 강현 형의 시간을 갈아 만든 서브 타이틀곡 연습에 한창이었다. 안무가가 강현 형이다 보니 훨씬 디테일하고 까다롭게, 작은 동작 하나하나 세세한 코칭이 들어왔다.

안무 창작에 미력하게나마 힘을 보탰던 덕에, 우리 중에 유일하게 안무를 제대로 숙지한 사람은 나 혼자였다. 게다가 강현 형의 취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선이 복잡하고 박자를 잔뜩 쪼갠 안무 때문에 다들 중심을 못 잡고 헤매는 중이었다.

안무 복사기로 통하는 유찬 형마저 헷갈릴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하지만 그만큼 잘 빠져서 다들 이 악물고 연습하는 중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즈음, 강현 형이 뭔가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노래를 껐다. 다들 숨을 헐떡이면서 강현 형을 바라봤다.

“지금 이한 형이 제일 못 따라오는데, 내가 유찬 형이랑 서호 디테일 봐줄 테니까 하온이가 이한 형 전담해줄래?”

“네. 그럴게요.”

“그럼, 잠깐 개별 트레이닝 받고 다시 모여서 연습하자.”

간단히 자리를 정리한 강현 형이 유찬 형과 이서호를 끌고 갔다. 정이한은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왔다.

느린 배속으로 곡을 틀고, 맨 처음 동작부터 하나씩 정이한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정이한이 완벽하게 안무를 딸 때까지 반복하다가, 어느 정도 숙지했다 싶으면 디테일 코칭에 들어갔다.

“형, 여기서 팔은 좀 더 들고. 허리는 세워주세요.”

나는 정이한의 뒤쪽에 서서 아예 손으로 직접 정이한의 팔뚝을 들어 올려 각도를 조절해주고, 다른 손으로는 등을 꾹 눌렀다.

“어? 으, 응.”

“그리고 다리도 좀 더 벌려야 해요. 좀 더. 아니, 좀 더, 더. 좋아요. 오른쪽 무릎이 바깥쪽을 향하게 틀어 주세요.”

아, 이게 또 미묘하네. 나는 자세가 흔들리지 않도록 팔을 붙든 손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이한의 다리 사이로 무릎부터 쑥 집어넣어 바깥쪽으로 밀어줬다.

“됐어요. 거울 봐봐요. 이렇게…….”

말을 이으며 거울을 바라본 순간,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정이한이 보였다. 어,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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