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50화 (150/320)

150.

……나 너무 붙었나? 정이한이 긴장한 게 맞닿은 옷깃 너머로도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뭔가 괴롭히는 느낌이 들 정도라서 바르작 떨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제야 정이한이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뱉은 뒤 여전히 시뻘건 얼굴로 웅얼거렸다.

“그, 나 화장실 좀…….”

“어? 네. 다녀오세요.”

꼭 나를 피해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허둥거리면서 뛰쳐나간 탓에 다른 멤버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서호가 이한 형 왜 그러냐고 물었고,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화장실이 급했나 봐.”

“으하학!”

“이서호, 집중해.”

가차 없이 끊어내는 강현 형 때문에 이서호가 입을 합, 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진지한 눈빛으로 제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이었다면 좀 더 놀고 싶다고, 쉬었다 하자고 칭얼거렸을 텐데, 잘하고 싶다던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덕분에 나만 할 일이 없어졌다. 정이한을 기다리는 동안 아무렇게나 바닥에 주저앉아 세 사람이 연습하는 걸 구경했다.

심심한데 언제 오지…….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정이한은 도무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무료함을 참지 못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서호가 준 캔 음료로 목을 축인 뒤 슬그머니 세 사람에게 합류했다.

강현 형이 이서호를 전담하고 있길래, 나는 유찬 형을 봐줬다. 형은 잠깐 사이 대부분의 안무를 다 숙지한 상태라, 일부 디테일만 같이 보면 될 것 같았다. 유찬 형이 안무를 마스터했을 때쯤 정이한이 돌아왔다.

화장실 간다더니 샤워라도 하고 온 건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머리카락을 끝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어깨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샤워했어요?”

정이한에게 다가가서 어깨의 물기를 털어 내주며 묻는데, 손에 달라붙은 물방울이 무척 차가워서 깜짝 놀랐다.

“어? 으, 으응. 너무 더워서 찬물로 세수만 좀……. 미안. 오래 기다렸어?”

“괜찮아요. 유찬 형 연습 도와주고 있었어요.”

정이한은 땀에 절어 휴식을 취하는 유찬 형을 힐끔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유찬 형은 다 배웠어?”

“네. 이제 혼자 연습해도 될 것 같아요.”

“……그럼 나, 음.”

무슨 말을 하려고 내 눈치를 보는 거지? 멀뚱멀뚱 쳐다봤더니 정이한이 정말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유찬 형한테 배워도 될까…….”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나 차였어? 차인 거야? 나 가르치는 거 더럽게 못 하나 봐…….

“……제가 그렇게 별로예요?”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무척 시무룩하게 느껴졌다. 아, 원래 다른 건 몰라도 서운한 감정은 잘 숨기는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멤버들 앞에서는 잘 안 된단 말이야…….

“어어? 아, 아니! 하온이가 아니라 내 문제야. 내가… 그, 어, 그러니까…….”

말 못 하네. 나한테 배우기 싫은 게 틀림없었다.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터덜터덜 몇 발자국 옮겼을 때, 어깨가 붙잡혔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사색이 된 정이한이 열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하온아. 오해하지 마…….”

“…오해 안 해요. 그냥 제가 못 가르치니까 그런 거잖아요. 괜찮아요, 형도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말까지 하겠어요. 유찬 형은 잘 가르쳐 줄 거예요.”

“아니야. 그게 아니라, 그…….”

우물쭈물하던 정이한이 한숨을 내쉰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르쳐주는 건 너무 좋은데, 아까처럼 붙지만 않으면…….”

붙지 말라고? 정이한 스킨십 싫어했나? 아닌데. 평소에 나랑 제일 많이 붙어 다닌 멤버가 정이한이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잠깐. 정이한이 거절 못 하는 성격인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잖아. 지금까지 싫은데도 싫다고 말 못 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헐, 미쳤다. 그럼 나 지금까지 진상짓 한 거네.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눈치 없이 기대도 되냐고 물어보고, 손잡고, 끌어안고…….

너무 많이 달라붙어서 어디서부터 사과해야 할지 손에 꼽을 수도 없었다.

“아… 미안해요. 형이 싫어하는 줄 몰랐어요. 혹시 저랑 손잡고 그러는 것도 싫었어요? 편하게 말해줘도 돼요. 앞으로 조심할게요.”

“아니! 나 하온이랑 손잡는 거 좋아해. 그런데 그, 거울로 보니까 뭔가 부끄러웠어…….”

정이한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채 속삭였다. 부끄럽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웠다나.

“아하.”

그럴 수 있지. 붙는 것만 조심하면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이한이 누군가. 내 부탁이라면 무조건 들어주고, 나한테 싫은 소리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정이한이 유찬 형에게 배우고 싶다는 얘길 꺼낼 정도면, 그만큼 나한테 배우는 게 불편했다는 뜻일 터였다. 뭔가 나한테 말 못 하는 숨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더 어린 내가 가르쳐주는 게 자존심 상해서 그런…건 아니겠네. 그동안 강현 형한테 배웠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정말 저로 괜찮아요?”

“응. 나는…….”

정이한이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곧 주눅 든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하온이가 좋아.”

……나한테 안무 배우는 게 좋다는 소리 맞지? 근데 왜 이렇게 고백…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네. 괜히 나까지 얼굴에 열이 쏠리는 것 같았다. 민망함에 헛기침하면서 정이한의 팔을 툭툭 두들겼다.

“크흠, 좋아요. 그럼 다시 시작해요!”

“응! 열심히 할게!”

활짝 웃는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봐줄 생각 없으니 각오하라고!

그렇게, 나는 정이한이 더는 못한다고 울 때까지 스파르타식으로 안무를 주입 시켰다. 역시 한국인은 하드모드지, 일취월장했네!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곧장 샤워실로 직행했다. 피로가 누적돼서 그런지 늦잠을 잔 덕분에 서둘러야 했다.

컴백 예정 날짜가 다가올수록 우리의 스케줄은 점점 더 바빠졌다. 8월 초에 미니 앨범을 내고, 9월부터 2주 동안 서브 타이틀로 활동. 이후 11월 초에 바로 미니 앨범 2집으로 컴백해 올해 신인상을 노리자는 게 우리의 플랜이었다. 덕분에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나마 드라마 촬영은 막바지로 접어들어, 앞으로 한 씬만 더 찍으면 끝이라 다행이었다. 과거 회상에만 나오는 조연치고 이것저것 너무 많이 찍은 것 같았지만…….

실제로 드라마 방영할 때 어떤 장면이, 어떻게 편집돼서 나올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찍을 수 있는 모든 구도와 연출로 다 찍어 두고 필요에 따라 자른다고 했으니 방송을 직접 보는 수밖에.

뽀송뽀송하게 씻고 나왔더니, 이서호를 제외한 멤버들이 전부 일어나 있었다. 오늘은 O.D.I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제발 주한 형이랑 같이했으면 좋겠다……. 교주는 없었으면 좋겠고.

먼저 준비를 끝내고 앉아 있다가 마지막으로 이서호가 씻으러 들어가는 걸 확인하곤 아침을 차리려고 움직였다. 아침이라고 해봤자 샐러드를 꺼내는 게 전부였다. 컴백이 코앞으로 다가온 만큼 유찬 형은 빡세게 식단 관리 중이었고, 정이한과 이서호는 근육을 만들겠다고 단백질 귀신이 되었다.

강현 형은 원래 소식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상관없다면서 샐러드 먹는 중이었고. 덕분에 나 혼자 뭔가 거하게 챙겨 먹긴 귀찮아서 멤버들과 나란히 샐러드를 주워 먹는 중이었다.

“하온아, 너는 밥 먹으라니까.”

부엌으로 들어온 정이한이 의자를 빼 앉으면서 말했다.

“이것도 맛있어요.”

유찬 형은 내 샐러드 위에 참깨 드레싱을 듬뿍 짜 주면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으, 나는 소스도 못 먹으니까 대신 하온이 맛있게 먹어…….”

“너무 많이 뿌리면 짜요.”

“이 정도가 딱 좋아…….”

유찬 형은 생양배추를 아삭아삭 씹으면서 울상을 지었다. 정이한은 단백질이라도 풍족하게 먹으라면서 제 몫의 닭가슴살을 내게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다시 정이한에게 돌려줬다.

“근육 만든다면서요? 단백질 필수!”

“……단백질 쉐이크까지 먹고 있잖아, 나랑 서호는.”

“하아, 나 포기할까…….”

이서호가 젓가락으로 샐러드를 깨작거리면서 한숨 쉬었다. 하지만 디어리를 이내 디어리를 위해서라면 돌도 씹어먹을 수 있다며 의지를 다잡았다.

“내일은 촬영 없지?”

“내일은 연습실에 18시간 수납되어 있을 예정…….”

유찬 형이 조금 질린 듯한 얼굴로 힘없이 대꾸했다. 강현 형은 샐러드를 삼킨 뒤 말했다.

“그럼 우리 내일 점심으로 소고기 먹자.”

“소?”

“소고기 먹어도 돼?”

“어. 소금 안 찍고 먹거나, 찍더라도 아주 조금만 찍어서 먹으면 돼.”

그 말에 다들 소고기는 거절할 수 없다면서 환호했다. 나도 열렬한 박수를 보내줬다.

기계적으로 샐러드를 먹어치운 후, 대강 설거지가 끝나자마자 매니저 형이 도착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양치질을 끝낸 뒤 형을 따라나섰다.

샵에 들러서 간단하게 메이크업 받고 옷을 갈아입은 뒤 곧장 합숙소 인근에 지정된 주차장을 향했다. 참가자들은 실제로 원곡 그룹이 오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전 무대 결과에 따라 순위가 높은 사람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곡 이름이 써진 방으로 들어가고, 해당 곡 멤버의 인원수가 다 차면 마감되는 형식이라나.

그런 만큼 당연히 멤버 구성도 어떻게 될지 복불복이었다. 랩이 주력인 곡에 랩퍼만 잔뜩 몰릴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랩이 주력이라고 해봤자 아이돌 곡이다. 보컬이 없으면 무대 구성이 힘들어지겠지.

그렇게 우리는 방에 설치된 캠을 보면서 우리 방에 들어오는 참가자를 지켜보면서 리액션 촬영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방송에는 한두 컷 정도만 잘라 내보낼 거면서, 아주 골수까지 빨아 먹으려고 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기 시간이 따로 없다는 거였다. 아예 우리 밴에 모니터를 설치해줘서 편안하게 볼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모니터와 함께 관찰 카메라도 잔뜩 붙었지만.

실시간으로 띄워주는 현장 상황을 모니터링하며 적당히 리액션을 했다.

참가자 전원의 성적 발표가 끝난 뒤 드디어 곡 선택의 시간이 왔다. 주한 형은 무려 8위라는 높은 성적을 기록했다. 8명 뽑는 오디션이니까 데뷔 라인에 안착한 셈이다. 출발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하윤이었는데…….

14위라는 꽤 높은 순위를 받았다. 솔직히 이번 주차에는 떨어졌을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뭐든 상관없으니 우리 곡만 선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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