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아, 깜짝 놀랐잖아. 이렇게 갑자기 깜빡이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다고? 사람 심장 떨어지게 만들어 놓고 정작 장본인은 태연했다. 멀뚱멀뚱 날 응시하는 정이한을 마주 보다가 장난이었나, 싶어서 웃음기 섞은 어조로 가볍게 말했다.
“아, 형. 장난하지 말고요. 진짜로요.”
정이한이 헤드셋을 완전히 벗어 목에 걸더니, 내 쪽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진짠데. 아, 제일 좋아하는 순서대로면 첫 번째가 하온이 너, 다음이 꽃이야.”
웃음기라곤 없는 표정으로 하는 말에 괜히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아니, 우리야 뭐 원래 서로한테 좋아한다는 말 아낌없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날 첫 번째로 꼽을 만큼이었다고? 확 몰려온 부끄러움이 강력 접착제라도 되는 양 내 입술을 딱 붙여 버렸다.
좁은 옷장에 단둘이 갇혀있는 듯한 어색한 침묵이 길어졌다. 갑자기 이서호가 보고 싶어졌다. 이럴 때 분위기를 바꿔줄 유일한 사람인데…….
점점 밀도가 높아져만 가는 기묘한 공기를 흩트리기 위해 뇌를 거치지 않고 입부터 열었다.
“그, 어, 솔직히 좀 부끄럽긴 한데 감사합니다……?”
이게……맞나? 정이한은 편안해 보이는데 괜히 나만 좌불안석인 것 같기도 했다. 아, 도저히 못 참겠다. 도망치자.
강현 형한테 초콜릿 더 받아 오겠다고 대충 둘러대곤 침대에서 폴짝 내려왔다. 아니, 근데 정이한은 왜 또 따라 일어나는 거야? 괜히 긴장돼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몇 걸음만으로 거리를 좁힌 정이한이 내 손을 잡아 왔다. 평소처럼 가볍게 잡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정이한의 체온이 얽혀드는 게 느껴졌다. 느른하게 달라붙어 오는 그 온기에 전신이 붙들린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갈피를 잃은 동공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정말이야. 네가 제일 소중해. 하온아, 네 옆에 항상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지금도 항상 옆에 있는데요? 벤 타고 이동할 때 주로 형이 제 옆에 앉잖아요. 룸메기도 하고.”
정이한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하지만 뭔가, 조금 이상했다. 이게 같은 멤버한테 할 법한 말과 행동이 맞나? 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한 분위기라 그냥 모르는 척, 눈치 없이 해맑게 굴었다.
정이한이 말갛게 웃으면서 상체를 숙였다. 꼭 잡힌 손이 아래쪽으로 당겨지면서 앞으로 기울어진 순간이었다. 이마에 따듯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닿았다. ……입술이었다.
깜짝 놀라서 정이한의 손을 뿌리치다시피 쳐낸 뒤 두 손으로 황급히 내 이마를 짚었다. 커다랗게 뜬 눈을 끔벅거리면서 멍청하게 입술만 빠끔거리고 있는데,
“아, 그, 그러니까. 어, 잘 부탁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더듬거리던 정이한은, 너무 놀라 사고가 정지해 굳어 있는 나를 지나 방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붙잡아 나를 반 바퀴 빙글 돌리고는 문밖으로 밀어냈다. 나가려고 한 건 맞지만, 얼결에 정이한한테 쫓겨난 행색이 되고 말았다.
……이, 이건 아니지! 정이한!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도대체 뭐냐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마에 뽀뽀한 건지 따져 물으려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데, 철컥철컥 소리만 날 뿐 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가 열린 게 끝이었다. 뭔가에 걸린 듯이 꼭 닫힌 문틈 사이로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는 정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 조금 이따 들어오면… 안될까…….”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고는 팔뚝에 얼굴을 묻었다. 아, 거기서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있으면 어떡해! 날 쫓아내자마자 문에 기댄 채 주르륵, 흘러내리듯 주저앉았을 정이한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열심히 손으로 부채질하면서 열감을 식히기 위해 베란다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제 곧 여름으로 들어서는 계절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봄이라고 주장하듯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 들었다.
“하온아? 안 자고 거기서 뭐 해?”
등 뒤에서 유찬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컵을 손에 든 채 베란다 쪽으로 다가오던 형이 대뜸 걸음을 서둘렀다.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너 또 열나는 거 아니야?”
다급히 내 뺨에 손을 얹어본 형은 뜨겁다면서 팔목을 바짝 잡아끌었다.
“아니에요, 형. 열나는 게 아니라…….”
“아니긴. 뜨거운데.”
곧장 나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는 형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뒤꿈치에 힘을 딱 주고 버텼다.
“유찬 형, 잠깐, 잠깐! 저 열 좀 식히려고 나온 건 맞는데……. 이게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럼 뭔데?”
가느다랗게 좁아진 유찬 형의 눈매가 이실직고하라고 날 채근해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정이한과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말할 수도 없고…….
“그, 그러니까……. 댓글을, 봤어요.”
“댓글?”
번뜩 떠오른 변명거리치곤 꽤 그럴싸해서, 나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저희 팬메이드 영상에 댓글이 많이 달렸길래……. 그, 디어리들이 저한테 써준 댓글이 민망하면서도 좋아서, 그래서 괜히 혼자 얼굴 빨개진 거예요.”
“아.”
그제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둔 유찬 형이 푸흐, 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웬일이야? 네가 우리 영상을 다 보고.”
“어쩌다 보니 우연히…….”
우물쭈물 흘러나온 내 말에, 형은 짓궂은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는 엄청난 비밀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듯 은밀하게 속삭였다.
“내가 몇 개 더 보여줄까?”
“……아니요!”
“으하하!”
유찬 형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자 기다렸다는 듯 이서호가 방문을 쾅 열고 나왔다.
“뭐야 뭐야? 뭐가 그렇게 신나? 나도 같이 놀아!”
유찬 형에게 대강 전후 사정을 들은 이서호까지 합세해 나를 놀려댔다. 이 녀석은 진짜, 정도가 없다. 심지어 이서호는 디어리에 빙의라도 한 듯 댓글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하온 오빠~ 오빠는 너무 완벽한 것 같아요. 오빠 인생의 유일한 오점이 되고 싶어요~”
이쯤 되니 변명이 아니라 진짜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마아아!”
이서호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달려들자, 토끼발을 하고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층간소음에 예민한 유찬 형이 잠잠할 만큼 조용하지만 약삭빠른 발놀림이었다.
아오, 쟨 진짜 저런 쪽으로는 머리가 좋다니까! 어쩔 수 없이 이를 꽉 물고 이서호를 쫓아가는데 그사이에도 녀석은 댓글 읽는 걸 멈추지 않았다.
“하온 오빠를 음정으로 표현하면 레가 아닐까? 도는 넘었고 미치기 직전이니까!”
“악! 아악!”
“우리 하오니는 린스 필요 없겠다~ 프린스여서!”
간신히 막다른 곳까지 몰았는데,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상체를 숙여 빠져나가 버렸다. 잡힐세라 제 방으로 도망치는 이서호를 따라 들어갔다. 침대를 등 뒤에 두고 좌우로 알짱거리면서 나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갔다.
“잡히기만 해 봐!”
“아 오빠 그거 알아요? 정말 잘생긴 사람을 보면 단기 기억 상실증이 온대! 아 오빠 그거 알아요? 정말 잘생긴 사람을 보면 단기 기억 상실증이 온대!”
와중에 숨도 안 차는지 열심히 댓글을 읽어대는 이서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제야 꼼짝없이 나한테 붙잡힌 이서호가 어어, 하더니 뒤로 풀썩 넘어갔다. 푹신한 침대가 우리 둘의 몸을 부드럽게 받아줬다.
이서호에게서 휴대폰을 빼앗으려고 손을 뻗어 여기저기 더듬는데 별안간 내 밑에 깔린 이서호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아~ 오빵……!”
“악, 미쳤냐? 미쳤어?”
소름이 쫙 돋아서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진저리쳤다.
“그거 알아요? 정말 잘생긴 사라암, 으브브븝!”
아오, 이게 진짜 끝까지! 나는 이서호 위에 올라탄 채 놀려대느라 바쁜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콱 막아버렸다. 발버둥 치는 이서호의 옆구리를 허벅지로 꽉 조였더니, 그제야 얌전해졌다.
“하… 그만하자?”
이서호가 고개를 한번 까딱였다. 영 미심쩍어서 불신을 가득 담아 노려봤더니, 그제야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량 대시보드에 부착된 흔들 인형처럼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바람에 입을 막은 손이 자연스럽게 스르르 떨어졌다.
“푸하……, 야! 진하온!”
“뭐.”
“너 이렇게, 막, 어? 외간 남자 위에, 막! 올라타고, 어? 그러면 안 되지!”
“뭐라는 거야.”
“욱, 아, 빨리 내려가!”
이서호가 양쪽 팔꿈치를 지지대 삼아 상체를 일으키자, 그 반동으로 이서호의 배꼽 쪽에 앉아 있던 내 균형이 흐트러졌다. 다급하게 팔을 뒤로 뻗어서 이서호의 양 허벅지를 움켜쥐어 무너져 내릴 뻔한 균형을 다 잡았다.
어떻게 내가 올라타 있는데 가뿐히 무시하고 일어날 수 있지? 코어 힘이 좋은 건지, 팔심이 센 건지……. 둘 다인가?
“뭐야? 왜 이렇게 힘이 세? 우리 몰래 복근 운동해?”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이서호의 배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더니, 움찔하면서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꽤 단단하길래 찰싹찰싹 두들겨 보는데, 평소 같았으면 단단한 제 복근을 자랑하며 호들갑을 떨고도 남았을 이서호가 영 조용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본 이서호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소리를 빽빽 질러댈 것 같아, 잽싸게 손을 떼고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너, 너, 너!”
“나 간다!”
도망치듯 자릴 뜨는 내 뒤로 이서호가 ‘으아아!’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쟤는 진하온이야!’를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새삼스럽기는.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진하온이었다.
그래도 이서호 덕분에 뭔 생각으로 그런 건지 모르겠는 이마 뽀뽀 사건이 좀 희석된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외국에서는 뭐… 이마 뽀뽀 정도야 굿나잇 키스로도 많이 하고, 인사로도 많이 하잖아. 잘 부탁한다는 의미의 뽀뽀겠지? 그렇다고 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 일도 없던 척 방으로 들어갈 용기가 생겼다. 똑똑, 노크하자 이번에는 부드럽게 방 문이 열렸다. 그런데 내가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앉아 있던 정이한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거의 뭍에 건져진 물고기 수준으로 팔딱댄 탓에 모른 척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
“…….”
인사만 나눈 초면 사이에서나 흐를 법한 껄끄러운 정적이 이어졌다.
“형.”
“어? 어!”
화들짝 놀라면서 대답하는 걸 보니, 내버려 뒀다간 한동안 어색해하는 티를 팍팍 내면서 다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럴 순 없지. 자칫하다간 불화설이 돌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싫었다. 정이한이랑 어색해지는 것만큼은 절대 사양이야.
정이한 옆에 풀썩 주저앉자 침대가 가볍게 출렁거렸다. 정이한은 내 쪽을 힐끔 보더니 곧장 시선을 제 발끝으로 옮겨갔다. 반듯한 열 개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미안.”
“뭐가요?”
“놀라게 해서…….”
“놀라긴 했죠.”
잊고 있던 감촉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괜히 손가락으로 이마를 한번 문지른 뒤, 결심과 함께 정이한을 향해 아예 자세를 틀어 앉았다.
“형, 저 봐봐요.”
정이한은 내 말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슬그머니 나를 향하는 얼굴을 보면서 가볍게 픽, 웃은 나는 정이한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싸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똑같이 기습적으로 이마에 쪽, 하고 뽀뽀한 뒤 벌떡 일어났다.
“잘 자요. 그리고 저도 잘 부탁해요. 그런 의미로 한 인사 맞죠?”
웃으면서 내 이마를 톡톡 두들겨 보였다. 따라서 예쁘게 웃어줄 줄 알았는데 정이한은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응, 잘 부탁해.”
그래도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긴 하네…….
정이한이 나한테 뭘 바라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날 어떤 의미로 좋아한다는 건지, 내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대면서까지 얻고 싶었던 게 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