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19화 (119/320)

119.

이서호의 드라마 까메오 출연이 확정됐다. 덕분에 휴가고 뭐고 이서호는 오늘부터 바로 연기 수업에 들어가게 됐다. 원래는 나도 받는다고 했었지만…….

못 참고 포인트로 올려버렸는걸.

연기는 A-면 족하다. 굳이 더 올릴 필요를 느끼지 못한 나는 은근슬쩍 발을 빼버렸다. 지금은 연기 수업보단 휴식을 취하는 게 우선일 것 같다는 내 말에, 실장님은 앓던 이가 빠진 사람처럼 아주 시원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서호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모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올 줄 알았건만,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도 안 갔다. 다들 며칠은 숙소에서 보낸단다. 그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하온아, 이거 먹을래?”

유찬 형이 불쑥 내 앞으로 코코넛 주스를 내밀었다. 그다지 배고프진 않았지만, 성의를 생각해서 받았다. 달콤하고 쫀득한 코코넛 알갱이가 씹히는 주스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하온아, 배 먹을래?”

정이한이 제 얼굴만큼이나 예쁘고 정갈하게 깎은 배를 접시에 담아 왔다. 배는 맛있으니까 거절할 이유 없지. 곧장 포크를 받아들곤 아작아작 배를 씹어 먹으며 하릴없이 스크린 속을 유영하던 때였다.

“초콜릿 좀 먹을래?”

이번에는 강현 형까지 가세해, 방에서 나오면서 초콜릿을 한 움큼 집어다 줬다. 도대체…….

“형들.”

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나를 봤다.

“저 가지고 내기했어요?”

뭐, 누가 주는 음식을 제일 많이 받아먹나 같은 거? 나는 포크를 빈 접시 위에 올려놓고 팔짱을 낀 채 갸름한 눈을 떴다.

“응? 무슨 내기?”

유찬 형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순박하게 되물었다. 저 반응을 보니까 짜고 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거짓말 못 하는 유찬 형은 금방 티가 나니까.

“그럼 왜 자꾸 돌아가면서 먹을 거 줘요?”

“아. 그거야.”

유찬 형은 검지로 코끝을 긁적이다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내 시선을 피했다. 정이한도 마찬가지로, 나랑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고개를 휙 돌리며 딴청을 피우는 시늉을 했다. 어이가 없어 마지막으로 강현 형을 쳐다봤다.

“그거야, 너 쓰러졌었잖아.”

“그게 뭔 상관인데요? 검사 결과 아무 이상 없다고 나왔는데.”

“걱정되니까 그렇지. 그냥 먹어.”

강현 형은 초콜릿 하나를 까서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잔말 말고 빨리 입 벌리라는 듯 손을 흔드는 모양새가 거절했다간 금방이라도 쑤셔 넣을 기세였다. 못 이기는 척 슬쩍 벌리자 초콜릿이 입 안으로 굴러들어 왔다.

“다 먹어라.”

강현 형이 커다란 손에 가득 쥐고 있던 초콜릿을 내 허벅지 위에 올려두며 그렇게 강조했다. 내 다리 위에 굴러다니는 초콜릿을 형들한테도 나눠주려고 했는데, 다들 나 먹으라면서 거절하기 바빴다.

초콜릿 부자가 됐네.

나는 포장된 초콜릿을 야금야금 까먹으면서 소파와 한 몸이 된 것처럼 굴었다. 덕분에 오전에 엿보기 스킬 두 번 쓴 체력이 전부 회복되었다. 이제 남은 건 유찬 형이랑 강현 형뿐.

강현 형이 방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쓰고, 체력 좀 회복한 다음 유찬 형한테 쓰면 되겠다.

***

멤버들의 엿보기 스킬 정보를 전부 갱신한 건 이서호가 돌아온 직후였다. 이서호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어 던지기가 무섭게 곧장 소파로 다이빙하듯 뛰어들었다. 핼쑥해진 얼굴로 아무래도 자긴 연기 체질이 아닌 것 같다면서 우는소리를 해댔다. 꽤 혹독한 시간이었나 보네.

“초콜릿 먹을래?”

내밀기가 무섭게 초콜릿을 낚아채 우걱우걱 씹어 먹은 이서호가 또 없냐고 물었다. 강현 형이 다 먹어간다 싶을 때마다 리필해준 덕에 주머니 가득 들어 있던 초콜릿을 잔뜩 꺼내 손 위에 올려줬다.

“어우, 좀 살 것 같다. 역시 사람은 당이 중요해! 당 떨어지면 피곤하다니까~”

하긴, 당 떨어지면 힘들…… 아아!

그제야 형들이 왜 자꾸 달달한 걸 내 입에 밀어 넣었는지 알았다. 우리 형들 너무 귀여운 거 아닌가? 입이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했던 건 초콜릿만이 아니었다. 괜히 기분 좋아서 헤실헤실 웃고 있는데, 이서호가 나를 수상쩍다는 듯 흘겼다.

“뭐야? 이거 그냥 초콜릿 아니지?”

“응? 그냥 초콜릿인데.”

“근데 왜 그렇게 야시시하게 웃어?”

“내가 뭘?”

“…이거 복불복 초콜릿이지!”

이서호가 위험한 폭발물이라도 만지는 사람처럼 초콜릿을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그냥 초콜릿 맞아. 강현 형이 준 거야.”

“아닌데. 수상한데. 진하온이 날 보고 저렇게 웃을 리가 없는데.”

내가 평소에 이서호한테 너무 박하게 굴긴 했나 봐. 얼굴 보고 웃었다는 이유로 의심하다니. 앞으로 자주 웃어줘야겠네. 의심을 쉽사리 거두지 못하고 초콜릿을 더 먹을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서호 앞에 강현 형이 나타났다.

“서호 준 거야? 서호건 따로 챙겨뒀는데.”

또 초콜릿이 양손 가득해졌다.

“그럼 하온이 더 먹어.”

“……형.”

“응?”

“초콜릿 몇 박스씩 사고 그런 건 아니죠?”

“…….”

강현 형은 한참의 침묵 끝에 ‘비밀이야.’하곤 슬그머니 멀어졌다. 저 형 질렀네, 질렀어. 아무래도 숙소로 쉼 없이 배달되어 오던 택배 박스 중 하나에 강현 형이 대량주문한 초콜릿이 가득 담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진짜 강현 형이 준 거였어?”

“그렇대도.”

“오오! 그럼 더 먹을래!”

“이것도 먹어.”

강현 형에게 받은 초콜릿을 내밀자 신나게 받아먹으려던 이서호가 일순 멈칫했다. 그러더니 내 손등을 감싸서 손을 오므리게 만들곤 가슴 쪽으로 밀었다.

“아니다, 너 다 먹어. 너는 좀 많이 먹고 쪄야 해. 그래야 체력도 붙지.”

“이미 많이 먹었어.”

“됐네요, 나는 밥 먹을래! 배고파!”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이서호가 냉장고로 쪼르륵 달려가면서 외쳤다. 하지만 오늘 점심에 냉장고 털이용 요리를 잔뜩 만들어 먹은 터라, 냉장고에 먹을 것 따위는 없었다.

“딱히 뭐 없을걸? 유찬 형이랑 이한 형 장 보러 갔어.”

“오! 오늘 저녁 메뉴 뭔데?”

“모르겠어. 보고 고른다던데.”

이서호는 고기 많이 사오라고 해야지, 하며 곧장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톡을 보내고 아무리 기다려봐도 1이 사라지지 않길래 전화까지 걸었는데도 둘 다 연락이 되지 않았다.

“우우! 진하온 네가 해 봐. 내 전화라서 안 받는 건 아니겠지?”

“설마.”

“아, 빨리빨리!”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도 이서호처럼 형들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연락이 안 되니까 묘하게 불안해졌다. 설마 교주가 두 사람한테 찾아간 건 아니겠지? 나는 건들지 않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괜히 신경 쓰여 연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형들한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유찬 혀엉! 나 고기고기!”

옆에서 진동이 울리기가 무섭게 전화를 받은 이서호가 곧장 제 목적을 알렸다. 동시에 내 휴대폰으로는 정이한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무슨 일 있는 거냐 묻는데, 목소리에서 걱정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아무 일 없어요. 그냥 서호 형이 해보라고 해서요. 고기 먹고 싶대요.”

- 아, 우리 계산하느라 못 받았지. 안 그래도 고기 많이 샀어.

다행히 교주랑 얽힌 건 아닌 모양이다. 내가 생각해도 좀 우스웠다. 잠깐 연락 안 된 걸 가지고, 곧장 생각이 그쪽으로 기울 정도로 교주를 의식하고 있다는 게. 그쪽도 막 데뷔한 아이돌이니 한창 스케줄로 바쁠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교주가 또 멤버들에게 허튼짓을 한 대도 내 쪽에서 곧바로 알아차릴 방법은 없었다.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거나 평소랑 다르게 굴 때 혹시, 하고 의심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

만약…….

또 멤버들의 마음을 제 입맛대로 바꿔버린다면…….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정확한 파훼법을 모르니까 대응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내가 아는 건 신뢰를 잃어버리면, 능력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추측뿐이었다.

그럼 그 신뢰를 어떻게 떨어트리는데? 사실대로 말한다 한들 믿겠냐고. 제대로 된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초조해졌다.

“…형, 빨리 와요.”

- 배고파?

“아니요, 그건 아닌데.”

걱정된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마트는 코 앞이다. 뭐가 걱정되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어리광부리는 척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냥 보고 싶어서요.”

짧은 침묵 끝에 정이한이 황급히 대꾸했다.

- 어, 어어, 알겠어. 금방 갈게.

“네. 기다릴게요.”

- 응, 조금 이따 보자.

전화를 끊고 현관 쪽을 보니 이서호가 운동화를 구겨 신고 있었다.

“어디가?”

“장 봐온 거 무거울 거 아냐. 마중 가려고. 고기고기~”

이서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마중 가는 게 형들이냐, 고기냐. 아무래도 고기 같다.

***

저녁은 꽤 훌륭했다. 소고기를 잔뜩 사 온 덕에 고기 파티가 열렸다. 곁들여 먹을 된장국은 정 쉐프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내가 손수 끓였다. 선생님이 훌륭해서 그런지 상당히 맛있었다. 물론 마지막에 정이한이 간 맞추는 걸 도와주긴 했지만, 지난번 미역국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성장이었다.

뒷정리까지 끝내고 거실에 모여서 하릴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9시가 되기 무섭게, 형들이 나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빨리 씻고 자야 한다면서 모두가 성화였다.

덕분에 젖은 머리를 얼른 말리고 곧장 침대에 올라야 했다. 베개를 세워서 편안하게 등을 받친 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자기 전에 확인할 게 있으니, 오히려 잘 됐지 뭐. 휴대폰을 보는 척하면서 오늘 갱신한 엿보기 스킬 결과를 확인했다.

[박유찬]

재능: 작곡의 마에스트로가 될 자격 있어요!

개화 조건: 몸과 마음이 안정적인 지금이 가장 효과적이에요!

유찬 형은 이번 휴식기 동안 최대한 작곡에 전념할 수 있도록 등 떠밀어주면 될 것 같았다. 빠르면 다음 앨범, 늦어도 정규 앨범이 나올 즈음엔 유찬 형의 곡이 우리 앨범에 실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정이한]

재능: 백 년에 한 번 나올까요? 박자의 신! 그야말로 천재 랩퍼!

개화 조건: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뭉치면 최강!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일단 풀 좋아하는 건 아는데……. 다른 건 또 뭐지? 최근 정이한은 너튜브에서 마사지하는 법 강의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마사지…를 좋아하나? 이따 물어봐야겠다.

[백강현]

재능: 두말할 것 없는 타고난 댄싱머신!

개화 조건: 뚜렷한 목표는 뛰어난 성장의 비료죠!

뚜렷한 목표……. 목표. 데뷔라는 꿈을 이룬 지금, 강현 형의 목표는 뭘까? 평생 춤추면서 사는 건가? 이것도 물어봐야겠네. 문제는 이서호였는데…….

[이서호]

재능: 의외로 연기에 소질 있네요!

개화 조건: 으이구! 철들려면 멀었네요~

…….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스킬 창을 꺼버린 뒤 진지한 얼굴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검색어를 입력했다.

[철드는 법]

나올 리가 없지. 이런 걸 검색한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래! 일단 쉬운 것부터 하자. 나는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정이한을 불렀다. 헤드셋을 끼고 있었지만, 항상 볼륨을 낮춰놓는 건지 정이한은 여느 때처럼 곧장 내 목소리에 반응했다. 한쪽 헤드셋을 귀 뒤로 넘기면서 눈을 마주쳐온다.

“형 좋아하는 거 뭐예요?”

“좋아하는 거?”

“네. 제일 좋아하는 거 두 개만 골라보세요.”

“어……. 두 개. 음.”

정이한은 한참 고민하다가 “물건?”하고 물었다. 식물은 물건이라고 할 수 없는데, 정이한은 확실히 식물을 좋아했다. 그래서 일단은 구분 없이 다 통틀어서 제일 좋아하는 것 두 개만 골라 달라고 했더니, 한다는 말이…….

“꽃, 그리고 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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