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21화 (121/320)

121.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벽만 쳐다보는데,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정이한도 마찬가지인 듯 조금 전에만 해도 뒤척이는 듯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끌어안은 베개에 이마를 문지르면서 한숨을 삼켰다. 내가 상처 준 걸까…….

“하온아, 잠 안 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 이거, 백퍼 티 났겠다. 정이한이 저를 무시한다고 오해할까 봐 천천히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눈만 나올 정도로 끌어내린 뒤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이불을 거둬낸 정이한이 이쪽으로 건너오는 게 보였다. 침대 한 편에 걸터앉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슥, 길게 쓸어넘겨 준다. 다정한 손길이 평소랑 똑같아서 조금 안심되었다.

“잠 못 자는 거……. 나 때문인가?”

정이한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시무룩한 모습이 왜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는지. 가슴 한쪽이 꽈악 옥죄여오는 듯했다.

“형, 나는 형이 정말 좋아요. 그런데…….”

정이한이 말하는 ‘좋아함’과 내 감정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굿나잇 키스로 치부했을 때 그렇게 대놓고 실망했을 리 없잖아. 어쩌면 내 매력 스탯이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고.

“하온아.”

“……네.”

“아까 내가 네 이마에 키스했을 때, 혹시 기분 나빴어?”

기분? 당황스럽고 놀라기는 했지만, 결코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다 큰 남자끼리 이마 뽀뽀라니, 보통은 불쾌감이 먼저일 것 같은데?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그런 느낌은 전혀 없다.

“아니요. 전혀요.”

정이한이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평소와 똑같이 예쁜 미소를 지으면서 해맑게 말했다.

“다행이다. 실은, 그게 좀 걱정됐었거든.”

“그거 때문에 잠 못 잔 거예요?”

“……응.”

정이한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부끄러워했다.

“그냥 물어보면 될 걸 왜 끙끙 앓아요.”

“네가 나 싫어할까 봐 무서워서…….”

길게 내리깔린 눈꺼풀이 정이한의 눈동자를 숨겨 버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그 작은 움직임조차 예리하게 포착해내고 있었다.

“형, 실망이에요.”

“……어, 어? 왜, 왜?”

눈에 띄게 당황한 정이한이 허둥거렸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 앉은 뒤 협탁의 조명을 켰다. 내 얼굴 확실히 보고, 머리에 새겨 넣어. 또 잊어버리기만 해 봐라.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런데 고작 그런 일로 형을 싫어할 리 없잖아.”

“……아, 기억, 하지. 하고 있지. 당연히…….”

대답해오는 정이한의 목소리가 점점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이쯤 되니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갑자기 왜 울어! 울지 마! 나는 네 눈물에 약하단 말이야!

“안, 아도, 돼?”

“뭘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물어봐요? 그냥… 안으면 되잖아요.”

두 팔을 쫙 벌리면서 대꾸하자 정이한이 내 품에 포옥 안겼다. 확 끌어안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조신하게 안겨들어 올 줄이야…….

내 허리를 꽉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정이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줬다. 평소 정이한이 내게 해주던 것처럼, 그때마다 내가 느꼈던 것처럼.

정이한도 그런 다정하고 따스한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참 동안 얼굴을 묻고 있던 정이한이 나를 올려다봤다.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이 영롱하게 빛났다. 엄지로 눈가를 슥 쓸어주면서 안심할 수 있도록 웃어 보였다.

“너만 있으면 돼.”

아, 또…! 깜빡이 좀 켜자. 아닌가? 지금 비상등 켜놓고 신호 주고 있던 건가?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 우리는 팀인데요? 한 명만 있으면 된다니, 그걸 디아스라고 할 수 있나아…….”

정이한은 어깨를 떨면서 웃었다. 내가 당황한 나머지 못 알아들은 척 헛소리하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상체를 반듯하게 세워 앉은 정이한이 곧장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

“다른 멤버들도 소중하지. 다들 좋아해. 하지만, 네가 사라지면 나는 도저히… 상실감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아.”

정이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가 지닌 감정이 단순한 ‘좋아함’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게 절절하게 와닿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불쾌감이 아닌, 조금의 떨림을 동반하는 커다란 감동 때문이었다. 내 인생에 이렇게까지 날 소중하게 여기는, 이런 사람이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다.

“……약속했잖아요. 저 약속 지키는 사람이에요.”

“응.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냥 가벼운, 스쳐 지나가는 말이라고 생각했거든. 나한테만 귀한…….”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일부러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면서 삐죽거렸다.

“아니거든요.”

“이제 알아.”

조명이 빚어낸 음영이 정이한의 인상을 더욱 환하게 보이게끔 해주는 것 같았다. 마음의 짐을 한결 덜어낸 듯한, 개운해 보이는 미소를 보자 어딘가 모르게 흐릿했던 내 마음도 맑게 개었다.

“우리 하온이, 푹 자야 하는데 나 때문에 괜히 시간 뺏겨서 어떡해. 빨리 자야지.”

내 말이. 벌써 새벽 3시였다. 컨디션을 생각하면 당장 잠들어야 하겠지만, 문제는 지금 내가 너무 말똥말똥하다는 거였다. 정이한 때문에 잠이 싹 달아난 상태라…….

“괜찮아요. 어차피 휴간데, 늦잠 좀 자면 되죠.”

“그래도 밤새우는 건 안 돼. 또 쓰러지면 어떡해?”

“잠 부족하면 낮잠 실컷 자면 되죠. 형 무릎 베고.”

“그… 그건 좋지만, 네가 아픈 건 싫어.”

정이한이 나를 침대에 눕혀주려고 하는 것 같길래, 알아서 꼬물꼬물 이불로 들어갔다. 꾸겨진 이불을 반듯하게 펴서 내게 덮어준 정이한은, 바로 돌아갈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다시 내 침대에 걸터앉더니 황당한 말을 했다.

“자장가라도 불러줄까?”

“……자장가요?”

황당해서 반문했는데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정이한이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일정한 박자로 내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나직하게 읊조리듯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아니, 정말 이걸로 나를 재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린애도 아닌데 자장가 좀 듣는다고 잠들 리 없잖아. 하지만 뭔가… ‘날 위한 자장가’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지금 이 분위기가 내 가슴을 찡하게 만들어서 그만두라고 말리고 싶지 않았다. 이런 밤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편안히 기대기로 했다.

조곤조곤한 선율에 정이한의 자상한 저음이 어우러지자 믿을 수 없게도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정이한은 폭신하고 새하얀 솜뭉치 같은 미소를 띤 채, 졸려서 고개를 까딱이는 나를 두 눈 가득 담고 있었다.

나만을 위한 자장가는 처음이었는데, 왜 아이들이 엄마의 자장가에 잠드는지 알 것 같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다정한 목소리가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점차 눈을 깜박거리는 속도가 느려지고, 그에 따라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정이한의 목소리가 깊고 넓은 강의 수면처럼 잔잔하게 너울거렸다.

“형… 목소리 진짜 좋다고… 내가 말했었…….”

***

뽀뽀 사건 이후, 정말 다행히도 정이한의 태도는 평소와 똑같았다. 덕분에 나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평소처럼 정이한을 대하는 한편 형들의 재능 개화를 위한 밑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정이한에게 깜짝 선물로 사 온 화분을 건네준 게 첫 번째였다. 화분을 선물해 준 뒤로 정이한은 내가 깨우지 않아도 벌떡벌떡 잘 일어났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눈곱도 떼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화분을 지켜보는 게 정이한의 일상이 되었다. 내가 선물한 화분을 애지중지하는 걸 보니 뿌듯하기도 하고, 진작 하나 사줄 걸 하는 미안함도 들었다.

“하온아, 하온아!”

화분을 들여다보던 정이한이 다급하게 나를 불러왔다. 혹시 무슨 문제 생겼나? 죽으면 엄청 속상해할 것 같아서 일부러 키우기 쉬운 식물로 추천해 달라고 해서 사 왔는데…….

“여기 봐! 여기! 새잎 나왔어!”

뭐야, 별일 아니었잖아. 호들갑 떨길래 깜짝 놀랐네. 하지만 정이한이 정말 기쁜 듯이 해맑게 웃고 있어서, 나도 덩달아 함박웃음을 지으며 쪼르르 곁으로 다가갔다.

“정말요? 어디요?”

“여기!”

커다란 이파리들 사이로 아주 작은 연두색 잎 하나가 돌돌 말려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우와! 귀여워요.”

“그치그치? 이렇게 작은데도 벌써 갈라진 잎이 나오네. 신기하다…….”

정이한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몬스테라 잎이 귀하디귀한 보석이라도 되는 양 바라봤다. 화분을 애정 듬뿍 담아 돌봐주는 건 기쁘지만, 왠지 모르게 좀……. 우리 형 뺏긴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인가? 분명 내가 선물한 건데 말이지…….

“그렇게 좋아요?”

“응. 너무 좋아.”

“저보다?”

정이한은 화분에서 시선을 떼고는 날 보면서 환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어? 아니. 하온이가 사준 선물이라 좋은 건데.”

이렇게 단호하게 대답할 줄이야. 괜히 물어봤어. 부끄럽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급의 유치한 짓을 한 것 같아서 헛기침한 뒤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다음엔 다른 화분 사러 같이 가요.”

이번에는 강현 형과 둘이 다녀와서 조금 서운해했던 눈치라 슬쩍 말해봤더니 단번에 생기가 돌았다.

“응. 그러자.”

정이한은 벌써 기대된다면서 상기된 얼굴로 방긋방긋 웃었다. 조만간 날 잡아야겠네.

“그런데 형.”

“응?”

“유찬 형이랑 몇 시에 나가기로 했어요?”

“아, 열…시! 늦었다!”

시계를 힐긋 보며 대꾸하던 정이한이 별안간 벌떡 일어났다. 허겁지겁 방문을 열자마자 맞닥뜨린 유찬 형은, 마침 노크를 하려고 했었는지 어정쩡하게 팔을 들고 있었다.

“형, 미안! 빨리 씻고 나올게!”

“어어. 괜찮아. 천천히 해.”

이미 외출 준비를 끝낸 유찬 형이 여유롭게 소파로 가 앉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유찬 형과 정이한, 두 사람이 세화 형의 작업실에 가는 날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작업물을 가지고 가서 피드백을 받기로 했는데, 오늘이 대망의 첫 만남 자리였다.

내가 주선한 모임이라 원래는 나도 같이 가기로 했었지만…….

“하온이는 몇 시에 나가?”

“두 시요. 그때까지 일어나겠죠?”

불안한 마음에 굳게 닫힌 이서호의 방문을 힐끔거렸다.

“그때면 일어나긴 할 텐데……. 안 일어나면 정곤 형한테 깨워 달라고 해.”

나는 이서호의 드라마 촬영장에 따라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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