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13화 (113/320)

113.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았다. 유찬 형이 덮어준 담요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 걸 보고 나서야, 쓸데없이 과민반응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저 사람이 여기에? 혹시 데뷔한 건가? 언젠가 실장님이 교주는 다른 기획사 데뷔 조에 들어갔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러면 데뷔 인사하러 온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같이 온 멤버들이 없는데……. 솔로 데뷔일 수도 있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지금 중요한 건 어떤 이유에서건 교주가 먼저 멤버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었다. 머릿속에 붉은색 경고등이 깜박거렸다.

멤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 특히 유찬 형과 이서호에게는 아직도 그 영향력이 유효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정이한도.

아까 정이한이 움찔거렸던 게 신경 쓰여서 옆을 봤는데, 시선이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직 피곤해하는 날 향한 염려와 걱정밖에 읽히지 않는 정직한 눈동자였다. 그게 조금 안심되어서 나는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재!”

예상치 못한 재회 때문에 잠깐 굳어 있었던 걸까? 한 발자국 늦게 화들짝 놀란 듯하며 큰 목소리로 교주를 부르려던 이서호가 황급히 입을 합, 다물더니 내 쪽을 돌아봤다. 내가 일어나 있는 걸 보곤 눈치 볼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 곧장 “재혁 형!”하고는 큰 목소리로 반가움을 가득 드러냈다.

그걸 보고 조금, 음. 좀 많이 놀랐다. 평소의 이서호였다면 주변 눈치 안 보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교주를 반기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랬다 하더라도 이서호가 얼마나 애타게 교주를 그리워하고, 재회를 손꼽아 기다렸는지 우리 중에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 다들 이해했을 터였다.

그런 감격스러운 재회 순간임에도 내가 피곤해서 자려고 했던 걸 떠올려주다니. 흥분하면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던 그 이서호가.

내가 이서호에게 꽤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솔직히 감동받았다. 그리고 어쩌면 예전만큼 교주에게 휘둘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다들 오랜만이야.”

듣는 것만으로도 호감을 자아내는, 담백하고 상냥한 어조였다. 그에 어울리는 번듯하게 잘생긴 얼굴이 은은한 미소를 띠면서 이서호를 번쩍 들어 올렸다.

잠깐만.

이서호……를 들었어? 어린애처럼 가볍게 들린 이서호가 팔, 다리를 버둥거리자 작게 웃음을 터트리곤 읏차,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내려놓는다.

“우리 서호. 안 본 사이에 더 컸네.”

“혀엉! 형! 형! 왜 이제 왔어! 나 진짜, 보고 싶었는데!”

“미안해. 너희랑은 꼭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그게 뭔데? 실장님은 계속 형이 방출됐다고만 해서, 답답하고 속상했어…….”

교주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렇게 말해 달라고 실장님한테 부탁드렸어. 그때는 솔직히, 다시는 아이돌로 데뷔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 방법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너희를 소중하게 여기듯이, 너희도 내가 소중했잖아.”

“응, 응! 지금은 잘 해결된 거 맞지? 다행이다!”

이서호가 환하게 웃어 보이며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이서호를 물끄러미 보면서 교주가 한 말을 곱씹었다.

교주가 정말 피치 못 할 개인 사정으로 나간 거고, 걱정할 멤버들을 위해 실장님께 부탁드려 회사에서 먼저 방출한 거로 하자고 입을 맞춘 거라면…… 앞뒤가 맞았다. 실장님은 멤버들이 나를 오해할 때 왜 그 오해를 풀어주지 못하는지도 말해주지 않으셨었으니까.

그 모든 게 교주의 배려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데. 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잘 해결됐으니까 지금 이렇게 방송국에 와 있는 거 아닌가?

정말 멤버들이 소중했다면 일이 해결되자마자 먼저 연락했어야지. 아이돌 그만둔다고 몇 년을 같이 동고동락한 사람들과 바로 연 끊을 생각을 했다는 것부터가 이해 안 돼.

이서호만 봐도 그렇잖아. 갑자기 사라진 빈자리에 적응 못 하고, 계속 교주를 찾아 헤맸다. 저 단순한 이서호가 어떻게 나올지 교주라면 분명히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정말 멤버들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거였다면,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사정을 설명해 주고 데뷔를 응원해주는 게 건강한 헤어짐이라는 거, 충분히 알지 않았을까?

“그게 정말 우리를 위한 일이었어……?”

유찬 형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 교주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중얼거리듯 되물었다. 조금은 책망하는 듯한 어투였다. 교주는 잠깐 턱을 들었다가 다시 유찬 형을 보면서 민망한 듯 웃었다.

“그때는 그랬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너희들을 위한답시고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굴었던 것 같아. 미안해. 생각이 짧았어. 다들 마음고생 많이 한 거 알아. 특히 유찬이. 리더 역할 하느라 힘들었지?”

이걸 또 순순히 인정하네? 좋은 사람인 척 자신을 포장하는 일에 능숙해 보였다. 어쩌면, 그땐 정말 자신의 꿈이 좌절되었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건지도…… 생각할수록 헷갈리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난 일단 의심해야겠어. 다른 건 몰라도 정이한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처박은 원흉이라는 건 확실하니까. 의심했다가 아니면 나 혼자 미안하고 말 일이지만, 아니라면 대응할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거니까.

“나도 진짜 힘들었어……. 대체 왜 그랬어? 유찬 형이랑 형 자취방에까지 찾아갔었어. 그런데 텅 비어있고, 톡은커녕 아무리 전화해도 연락도 안 되고. 우리 버린 줄 알고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데…….”

교주는 난처하게 웃으면서 정말 안쓰러워하는 듯 이서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우리 집, 알지? 어떤 분위기인지.”

“아, 으응. 알아…….”

“응……. 그게 이유였어. 집안 반대. 더 솔직히 말하면, 음.”

말을 고르던 교주의 시선이 잠깐 내게 닿았다가 떨어진 것 같았다. 왜 나를 보지? 아니면 정이한을 본 건가?

“……말해도 되려나.”

이서호가 단박에 “말해도 되지, 왜 안돼! 우리한테 못할 얘기가 어딨어?”하고 성내듯 말하자 교주는 하나도 안 변했다면서 시원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또 한 번 내게 시선이 닿았다. 이쯤 되면 착각일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나를 곁눈질했다. 묘한 기분이 들어서 교주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 그때 가족이랑 인연 끊고 나왔어. 그래서, 늦었지만 너희한테 다시 날 받아줄 수 있을지 용서를 구하려고 했는데……. 이미 메인 보컬 포지션에 너무 실력 좋은 분이 합류했더라.”

“아…….”

이서호와 유찬 형이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색하지 않게, 최대한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어요’ 하는 무해한 표정을 가장하는 것뿐이었다.

“그, 그래도 오지 그랬어! 형까지 포함해서 여섯 명으로 데뷔해도 됐잖아! 그럼 더 좋았을 거야…….”

아니, 이서호의 말처럼 됐을 리가. 그랬다면 나는 디아스에 합류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교주가 언제 돌아오려고 시도했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메인 보컬 자리를 노리고 노래에 투자하던 중이었다.

누구 하나 구멍이라곤 없는 실력에, 사이까지 돈독한 다섯 명의 멤버. 이미 완성형인 조합에 굳이 나까지 끼워서 데뷔시켰을 리가 없다.

아마 나를 1군으로 내려서 후발 그룹 데뷔 조 메인 보컬 자리를 주고, 교주가 원래 위치로 재합류했겠지. 굳이 사이 안 좋았던 나를 끼워 데뷔시킬 이유가 없었다. 원인 제공은 교주가 한 거고, 그게 오해였다 하더라도 똑같다.

“으음, 아니……. 메보급 보컬을 두 명이나 데리고 가진 않았을 거야. 자칫하면 내가 하온 선배님을 쫓아내게 되는 그림이 될 것 같더라.”

둘 중 쫓겨나는 건 당연히 네 쪽이었을 거다. 그러니까 내가 양보한 거야……. 과대 해석일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교주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개인 사정 때문에 나간 건 나였으니까, 철판 깔고 돌아갈 수가 없었어.”

너희를 위해서라도. 그런 말을 덧붙인 교주는 이서호를 방패 삼아 그 뒤에 있는 나를 지그시 봤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눈이 마주친 걸 느꼈다. 나를 도발하고 싶은 걸까? 내가 어떻게 대응하길 바라길래 아까부터 미묘하게 신경을 긁는 거지?

“아, 하온 선배님 탓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냥 그때 상황을 허심탄회하게 말하려다 보니, 뉘앙스가 조금 이상해졌네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교주가 빈말이 아니라는 듯 날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기분 나쁠 법한 말은 다 해놓고 이제 와서 사과한들, 이미 불쾌해진 기분이 나아질 리 없었다. 하지만 함정에 걸려 넘어가 줄 생각도 없지. 당신 지금, 나 일부러 툭툭 건드려 보는 거잖아.

그래서 나도 방긋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 아니에요, 후배님. 저도 같이 데뷔했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네가 와도 나는 쫓겨나지 않았을 거라는 의미를 담아, 일부러 후배님이라고 칭했다. 교주는 그런 나를 향해 화사하게 웃으면서 “그러게요.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하고 대답했다.

교주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연신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그게 사람의 분위기를 무척 온화하고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 저게 정말 만들어진 모습이라면, 저 인간의 자신을 포장하는 위장술은 몸 전체를 흙 속에 파묻어 버리는 가오리 급이었다. 가오리는 맛있기라도 하지.

“아, 강현이랑 이한이도 잘 있었지?”

앞선 두 사람과 회포를 푸는 건 이걸로 끝났다고 판단한 건지, 이번엔 멀찍이 앉아 있던 두 사람에게 관심을 보였다.

다들 아무도 눈치 못 채지 못한 것 같은데, 교주는 아직 내게는 정식으로 인사하지도 않았다. 선후배라는 위치를 떠나서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필요할 때만 나를 끌어들일 뿐 배제하는 느낌이 강했다.

이것도 일부러 이러는 거겠지?

굳이 나서서 친밀하게 굴지 않아도 아쉬울 게 없으므로 일단은 가만히 상황을 관전하기로 했다. 굳이 대화에 끼기보단 저 사람의 시야 밖에서 관찰하는 게 훨씬 이로울 테니까.

“어, 뭐.”

강현 형은 교주를 힐끔 보고 무뚝뚝하게 대답한 뒤 주머니에서 무선 이어폰을 꺼내 껴버렸다. 딱 잘라 대화를 단절하려는 듯한 행동에 교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강현이는 여전하네. 나 없어서 유찬이가 고생이겠다. 강현이 다루기 힘들지? 그래도 그룹엔 강현이처럼 묵묵하게 중심 잡아줄 멤버가 필요한 것 같아.”

아, 대체 말을 왜 저렇게 할까. 대놓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닌데 자꾸 기분 나쁘게 굴었다.

강현 형이 뭐! 우리 형이 얼마나 잘생기고, 몸 좋고, 상냥하고, 착하고, 배려심도 넘치는데! 장점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었다. 교주한테 자랑할 필요도 없고, 교주가 알 필요도 없으므로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어? 아니. 강현이가 우리 춤 많이 가르쳐주거든. 도움받았으면 받았지, 힘든 건 없었어.”

“그래? 강현이가 많이 바뀌었구나.”

“바뀐 건가? 그건 잘 모르겠어.”

“……그래?”

비록 1~2초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처음으로 교주가 뜸을 들였다.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순 없었지만, 유찬 형의 대답이 예상과 달라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했다.

물론, 대답만 그랬을 뿐 표정엔 미세한 균열 하나 없었다. 교주는 신뢰감을 자아내는 맏형 같은 미소를 띤 채 이번엔 정이한에게 관심을 뒀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와 함께 천천히 걸어온 교주가 정이한 앞에 섰다. 온통 내게만 신경을 쏟던 정이한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교주를 봤다.

“이한이는 이제 괜찮아?”

“……네?”

“한동안 슬럼프였잖아.”

도대체 이 사람 원하는 게 뭐야?

우리 멤버들을 한 명씩 건드려서 본인이 뭐 얼마나 이득을 얻길래, 그 기저에 깔린 고약한 심보가 뭔진 모르겠지만 쉽지 않을 거야.

건드리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니까. 우리 멤버들, 내 소중한 사람들은 내가 지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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