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14화 (114/320)

114.

정이한이 조금이라도 풀 죽는 기색을 보이면 나서서 편을 들어줄 태세로 잔뜩 경계하고 있었는데,

“아……. 지금은 괜찮아요.”

잘했다! 별거 아닌 대답이었는데 이상하게 뿌듯해져서 정이한을 마구마구 쓰다듬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정말 다행이다. 아이돌 일이랑 안 맞는 것 같아서 이한이 네가 제일 걱정됐거든. 그래도, 네가 이 일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까……. 나도 많이 도와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미안했어.”

이건 너무도 확실한 거짓말이었다. 멤버들한테 관심 있었다면 우리 영상을 찾아봤을 거 아니야. 그 속에서 멤버들이 얼마나 빛나는지, 정이한이 얼마나 예쁘게 웃는지 봤다면 저렇게 말할 순 없다.

“아니에요. 하온이가 많이 도와줬어요. 저는 하온이만 있으면 돼요.”

“그래?”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한 인사에 교주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봤다.

“우리 애들, 많이 도와주신 것 같아서 마음이 놓여요,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우리 애들이라니. 누가 너희 애들이야. 이젠 아니야. 자리에 앉아 교주를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기분 나빠서 일어날까 했는데, 교주가 이서호보다 큰 탓에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 그냥 앉아 있었다.

대신 나는 편안하게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생글생글 웃었다. 앉아 있는 건 나, 서 있는 건 너. 이 포지션이 나을 것 같다.

“저희 형들이 후배님과 돈독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저도 후배님이 궁금했는데, 이렇게 만나 뵙네요.”

“아, 그렇죠. 제가 그렇게 나가는 바람에…….처음엔 애들이랑 섞이기 힘들어하셨다고 들었어요. 면목 없습니다.”

여전히 디아스 내에서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게 영 꼴 보기 싫었다. 선을 좀 그어 두는 게 좋겠지?

“에이, 아니에요. 지금은 형들이랑 이렇게 잘 지내는걸요. 이미 지나간 일은 신경도 안 쓰여요. 후배님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런 다음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면서 방긋방긋 웃었는데, 어떻게 된 게 보면 볼수록 미소 속에 감춘 속내를 파악하기가 힘든 남자였다. 저 사람이 나를 찔러 보듯이 나도 몇 번 찔렀는데, 영 반응이 돌아오질 않는다. 내가 저런 타입에 익숙해서 다행이야.

“아, 네! 그럼 다행이고요.”

교주가 한시름 놓았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웃었다. 그리곤, 천천히 대기실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사실 오늘 여기 온 건, 나도 데뷔하게 됐거든. 오늘이 첫 무대야.”

“헉! 정말? 와악! 잘 됐다! 진짜 축하해, 형!”

왜 같이 데뷔할 수 없는 거냐며 울고불고하던 이서호는 어디 갔는지 밝게 웃으면서 아낌없이 축하 인사를 퍼부었다. 유찬 형도 잘 됐다면서 한결 편해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응. 꿈을 이루려고 절연까지 했으니 이번에야말로 어떻게든 해보자, 싶어서 기획사에 오디션 보러 다녔거든. 다행히 나를 좋게 봐주신 곳을 만나서 바로 데뷔 조에 들어갔어.”

또 다. 교주는 또 한 번 지그시 나를 보고는 마치 내게 말하는 것처럼 생글거렸다.

“운 좋게 두 번째 기회를 얻은 셈이지.”

두 번째 기회라는 소리에 내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지만, 교주가 어떻게 알겠어? 상식적으로 내가 환생자라는 사실을 추론할 방법은 없을 테니까.

“에이, 운이라니. 형 실력 있잖아. 얼굴도 잘생겼고! 형이 아이돌 안 하면 누가 해?”

“모태 아이돌 이서호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 이상하다. 네 팬분들이 그러던데? 우리 서호는 태어날 때부터 아이돌 마이크 쥐고 나왔을 거라고.”

“으하하! 형! 우리 디어리들 댓글 읽어본 거야?”

“나도 명예 디어리잖아.”

“으히힛, 고마워 형! 형이 칭찬해주니까 너무 좋다!”

이서호는 경계하는 법이라곤 모르는 사람처럼 그저 기뻐 보였다. 유찬 형과 이서호가 유달리 믿고 따라서일까, 그래도 저 두 사람한테만큼은 잘해줬던 것 같다.

“사실 밖에 우리 멤버들 있거든. 앨범 들고 인사하러 왔는데 아무래도 내가 먼저 와서 얼굴 본 다음에 서로 통성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기다려 달라고 했어. 애들 들여보내도 될까?”

“어? 밖에서 기다린다고? 빨리 들어오라고 해.”

유찬 형이 놀라서 대기실 문을 열어 주려는데, 교주의 동작이 조금 더 빨랐다. 유찬 형을 제지하고는 본인이 직접 대기실 문을 열더니 고개만 밖으로 빼꼼 내민 채 말했다.

“얘들아, 들어와.”

교주의 신호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다섯 명이 줄지어 들어왔다. 다들 하나 같이 딱딱하게 굳어서는 침을 꼴딱꼴딱 삼키는 게 무척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인사하자.”

“둘, 셋. 안녕하세요! 라스트원입니다!”

멤버들과 나란히 서 있으니 교주가 유독 튀어 보였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만큼 외모며 피지컬이 독보적이긴 했다. 저쪽 기획사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교주를 곧바로 데뷔 조에 합류시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게다가 분위기를 보니 이미 이 그룹 멤버들도 휘어잡은 것 같은데. 정이한처럼 자존감 떡락했거나, 강현 형처럼 겉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첫인상에 그런 걸 전부 파악하기에는 내 촉은 내게 부정적인 쪽으로만 정확한 터라, 판단하기 어려웠다.

“우리도 인사해야지. 얘들아, 빨리 모여 봐.”

“헉, 괜찮습니다!”

라스트원 멤버들이 마구 손을 흔들면서 사양했다. 솔직히 앨범 드리려고 왔는데, 선배님들이 정식으로 인사하려고 모이면 나 같아도 헉, 할 것 같긴 하다. 평소라면 내가 나설 법한 타이밍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나서는 대신 입을 꾹 다문 채 그냥 소파에서 일어났다.

교주는 달갑지 않았지만, 저 사람들은 아무 잘못도 안 했으니까. 소파남처럼 거들먹이나 떠는 선배가 되고 싶진 않았기에 예의상 일어났는데, 정이한이 나를 따라 일어나 옆을 지키듯 서 있었다.

라스트원 멤버가 도움을 구하듯이 교주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멤버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 교주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유찬아, 우리 애들이 너무 부담스러워하는 거 같은데 그냥 편안하게 인사받아주면 안 돼?”

“어……. 괴롭히려고 한 거 아닌데.”

“알지. 네가 우리 애들 존중하는 의미로 인사하려고 한 거, 내가 왜 모르겠어. 나만큼 너를 잘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이번 한 번만 좀 봐주라.”

유찬 형이 부담스럽긴 하려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산뜻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안녕하세요, 후배님들!”하고 편안하게 인사를 받아줬다. 그제야 굳어 있던 라스트원 멤버들의 어깨가 아주 조금, 풀어진 것처럼 보였다.

교주가 뒤를 돌아보자, 토끼 같은 소동물이 저절로 떠오르는 작고 하얀 멤버가 맨 뒤에서 주춤주춤 나왔다.

“저, 이건 저희 앨범인데요…….”

토끼상 멤버가 이마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서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앨범을 건네줬다. 한 명, 한 명. 건네주고는 나한테까지 다가왔다.

“서, 선배님.”

꾸벅 숙이면서 건네는 앨범을 나도 공손히 고개 숙여 두 손으로 받았다.

[1ast 0ne : 0NE, ZER0]

앨범에 잠깐 시선을 뒀다가 토끼상 멤버를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잘 들을게요.”

“우와아…….”

입구에 줄줄이 서 있는 라스트원 멤버 사이에서 감탄사가 들려서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가 삐쭉 솟아있는 한 멤버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러자 그가 놀란 것처럼 갑자기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아하하. 실은 우리 애들이 하온 선배님 팬이에요. 디아스 선배님들 다 좋아하는데, 유독 하온 선배님을 좋아하더라고요.”

“……아. 감사합니다.”

“인기 많으시겠어요. 남팬도 많죠?”

“글쎄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많을 것 같은데. 일단 우리 애들은 다 선배님 팬이거든요.”

“저, 정말 팬입니다…….”

“존경해요, 선배님!”

라스트원 멤버들이 내게 보이는, 존경심마저 느껴지는 호의가 당혹스러워서 어색하게 감사 인사만 한 뒤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뭔가……. 기분이 이상해.”

인사하는 내내 조용했던 이서호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칭얼거리듯 말하자. 교주가 상냥하게 이서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가 이상한데?”

“형한테 막내는 항상 나였는데……. 이제 내가 아니잖아.”

“음. 그래도 나한테 디아스의 막내는 여전히 서호야.”

또 시작이다. 다정한 말을 가장해 자연스럽게 나를 배제하며 콕콕 찔러대는 거.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쪽이 나를 인정하든, 말든 내가 디아스의 진하온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디어리들은 나를 사랑해.

형들도 나를 소중히 여겨.

그 사실이 방패처럼 나를 든든하게 막아주고 있는 이상, 교주의 말은 가소롭기만 할 뿐이었다. 열심히 찔러 봐라. 내가 반응하나.

“……뭔 소리래. 진하온이 막내거든?”

“알지. 근데 그냥 나한테 디아스는, 너희 그 자체거든. 우리 함께한 추억이 많잖아. 그런 의미로 말한 거야. 다른 뜻은 없어.”

“그건 그래. 디아스는 형 있을 때랑 진하온이 들어온 뒤랑 완전히 다르거든!”

“그래? 어떻게 다른데?”

이서호만의 악의 없는 솔직함이 튀어나왔다.

“음. 잘 모르겠는데 분위기가 달라. 진하온이 오고 우리가 더 돈독해진 느낌이랄까? 형이랑 있을 땐 솔직히 강현 형, 이한 형이랑은 좀 데면데면했거든.”

“그렇구나. 하온 선배님이 중심을 잘 잡아주시나 봐.”

“어? 그런가?”

이서호가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빠르게 눈을 깜박거리던 이서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응.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다!”

교주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안광이라곤 비치지 않는, 진한 검은색 눈동자가 나를 직시해온 건 바로 그때였다. 마치 내게서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듯 진득하게 훑고 내려가는 시선이 미묘했다. 왠지 소름 돋아서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막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그럼 우리는 다른 선배님들께도 인사드려야 하니까 이만 가볼게.”

대기실 문을 나서며 이어진 교주의 말은 순간 귀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불길하게 들렸다.

“디아스 활동이 끝나서 아쉽네.”

***

교주의 방문이 의외로 내 정신줄을 많이 갉아먹었는지, 남은 체력이 처참했다. 그 때문에 정이한의 허벅지를 혹사시켰다. 다리가 저렸을 법도 한데, 정이한은 귀찮거나 힘든 내색 없이 눈 감고 자는 척하는 내 머리를 열심히 쓰다듬어주었다.

교주를 만나서 그런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서 체력 회복 못 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정이한 덕분에 가까스로 무대에 설 정도는 회복할 수 있었다. 서브 미션이 계속 안 나와서 체력 회복 약 수급이 안 되는 게 너무 아쉬웠다.

교주와 재회한 건 무대를 마치고 1위 발표를 위해 전 출연진이 무대 위로 모였을 때였다. 라스트원은 우리 바로 뒷줄에 자리하고 있었다. 위치를 보니 소속사의 힘이 조금 작용한 모양인데, 내 뒤에 교주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우리는 두 번째 1위를 거머쥐었다. 우리를 위한 종이 꽃가루가 흩날리면서 떨어졌다. 멤버들이 어제보단 확실히 정돈된 수상 소감을 돌아가며 전하는 동안 선배님들이 우리에게 축하 인사를 하면서 멀어졌고, 교주 역시 멤버들과 한 명, 한 명 포옹하면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알만한 사람들은 교주가 오랫동안 디아스 데뷔 조였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이상해 보이진 않을 테지만, 뭔가 좀…….

강현 형과 가볍게 포옹을 나눈 교주는 마지막으로 나까지 안아 주려고 했다. 생방송에서 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라 얌전히 품에 안겼을 때였다.

“인생 2회차, 할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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