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2화 (22/320)

22.

그나저나 이 양아치, 아까 이름 봤는데 또 까먹었다. 한 번 더 보자. 오케이. 정이한.

“안녕하세요.”

내 목소리에 바닥을 향하고 있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그제야 날 알아보고는 꾸벅 마주 인사한다. 잊진 않아서 다행이네.

“……안녕하세요.”

정이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음울한 기색이 물씬 느껴졌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얘도 멘탈 약하거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어떻게 된 게 멤버들 중 정상적인 사람이 하나도 없다. 멤버가 넷이면 그냥 앞뒤 없이 천성적으로 밝고 희망찬 사람 한 명쯤 있을 법하잖아. 명색에 아이돌 그룹인데 문제 하나씩 끌어안고 있는 애들뿐이다. 이런 애들만 모으는 것도 이 회사의 능력이다.

준재혁이 있을 때는 좀 달랐으려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렇게 된 건가? 내가 오기 전엔 어떤 분위기였을지 알 수 없으므로 속단하는 건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 못 외우는 내가 외워버렸을 정도로 귀에 박힌 이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뭔가 진 느낌이야.

띵, 소리와 함께 3층에 도착했다. 도착한 층수를 확인한 정이한이 당황해했다. 밖을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다 내가 얼굴을 빤히 보고 있는 걸 깨닫고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서 피한다. 작은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내리는 거 아니었어요?”

우호도 중립의 위엄인가. 순수한 궁금증을 담고 있는 물음이었다. 목소리가 무척 낮아서 무뚝뚝하게 들렸지만 눈을 보면 안다. 이 사람은 날 싫어하지 않았다. 불편해하긴 하지만.

“그러려고 했는데 궁금해서요.”

“뭐가요?”

“형 어디 가는지. 따라가도 돼요?”

침묵이 흘렀다. 엘리베이터 문은 다시 닫혔고,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를 가려고 했던 건지 정이한은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로 아무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 승강기는 그대로 멈춘 채였다.

“옥상에 갈까 했는데…….”

옥상에 뭐가 있더라. 카페테리아가 있고, 공원처럼 인공 조경을 만들어놨다고 했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보컬 쌤이 쉬는 시간마다 가는 곳이었다.

얘도 코에 바람 넣으러 가려던 건가.

“……그냥, 집에 가려고 했어요.”

“네? 왜요?”

갑자기 목적지를 바꾸는 이유가 뭐지? 내가 따라간다니까 부담스러웠나? 그럴 수 있지. 우리는 매우 어색한 사이니까. 그냥 내가 비켜주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바닥을 파고 멘틀까지 뚫고 들어갈 것 같은 우중충한 기색이 신경 쓰였다. 데뷔 조 멤버만 아니었어도 신경 딱 끊을 수 있을 텐데.

“……놓고 온 게 있어서요.”

거짓말인 건 알지만 내가 불편하게 한 거라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갔다.

“아하. 갔다가 다시 오시는 거예요?”

“……네. 그래야겠죠?”

말끝이 빼꼼히 기어 올라갔다. 나한테 묻는 건가?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누군가가 소환한 모양이었다. 도착지는 5층이었다. 그곳에는 대표님과 실장님이 있었다. 실장님이 우리를 보면서 상냥하게 인사하셨다. 나도 인사하려고 했는데 시야 끝에서 정이한의 팔이 바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하온 씨, 안녕하세요?”

부드럽게 물어온 건 대표님이었다. 정이한이 신경 쓰였지만 일단 인사부터 하자. 대표님께 먼저 인사하고, 그 뒤에 실장님한테도 제대로 인사했다.

“저 보러 오신 건가요?”

그러고 보니 5층에는 대표실이랑 VIP 전용 응접실만 있다고 했었나. 보통 대표실은 꼭대기에 있기 마련인데 위치가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었다. 중간 좋아하는 분인가 봐.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

“아, 아니요. 형이랑 이야기하느라 버튼을 안 눌렀나 봐요.”

정이한이 팔을 구부렸다. 다른 손으로 팔꿈치를 잡고는 벽에 딱 달라붙어 버렸다. 왜 저렇게 불안해 보이지? 대표님이랑 실장님이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왜 저 두 사람이 무서운 것처럼 구는 걸까. 아니면 나인가?

“친해졌나 봐요.”

대표님이 질문하셔서 신경을 돌렸다. 친해졌냐는 물음에 딱히 할 말이 없으므로 그냥 웃었다.

보고는 받고 계실 텐데. 나랑 멤버들 사이 안 좋은 거 뻔히 아시면서. 가만. 나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거 아니야?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지금 생각하니 갑자기 나온 우호도 메인 미션도 무척 의미심장했다. 지금까지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기본 중의 기본인 게 있잖아. 관계성.

전생의 소속사는 자금이 부족했고, 나 아니면 대체 인력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싫어도, 멤버들이랑 사이 안 좋은 거 알면서도 나를 안고 갔다.

하지만 여기는 전생의 소속사와 근본부터가 다르다. 데뷔 전부터 사이 나쁜 애들을 하나로 엮어서 그룹 데뷔시킬 이유가 없다. 아이돌 불화설이 도는 건 최악이니까. 전생의 경험 때문에 간과해 버린 사실이었다.

지난번에 느꼈던 찜찜함이 이거였구나…….

나는 아직 나이도 어리니까 다른 사람 껴서 데뷔시켜도 회사는 손해 볼 게 없다. 그리고 4년이나 5년 뒤 세 번째 데뷔 그룹 멤버로 날 넣는 거지…….

5년이 지나도 나는 23살이다. 이제 곧 1월이니까 한 살 올려봤자 24살이다. 아이돌로서는 늦은 편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데뷔 가능한 나이다.

메인 미션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면서 손 놓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였다. 이번 그룹에서 데뷔가 무산되면 내게 남은 길은 둘 중 하나다.

소속사를 옮겨서 다시 새로운 데뷔 조에 들어가거나, 여기서 데뷔시켜 줄 때까지 연생 고인물이 되어 알박기하는 것.

그러면 메인 미션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미 멤버들 이름 딱딱 박혀서 나왔는데? 실패로 인정되는 건가? 아니면 평생 클리어 못 하는 건가?

뭐가 됐든 그 상황에 닥쳐서 알아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관계 개선. 무조건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박유찬의 호감도가 왜 ‘좋아함’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식사는 했어요?”

대표님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물었다. 나는 먹었고, 정이한은 모른다. 하지만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저희 둘 다 먹었어요.”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면 어떡해? 그리고 자연스럽게 1층 버튼을 눌렀다. 목적지가 옥상에서 집으로 바뀌었으니 1층 맞겠지. 실장님은 지하 4층을 누르셨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정이한을 데리고 내렸다.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묵례한 뒤 엘리베이터를 떠나보냈다.

“후우.”

비록 한숨이었지만, 대표님과 실장님을 만난 뒤 정이한이 처음으로 큰 소리를 냈다. 얘는 어떡하지? 이대로 안녕! 하고 헤어질까? 중립은 더 손 안 써도 되고, 당장 급한 건 싫어함 두 명이다. 이서호는 답이 안 보이지만 백강현은……. 백강현, 백강현도 답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잠깐 딴생각하는 사이에 정이한이 멀어졌다. 커다란 뒷모습을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엘리베이터를 호출했다. 미션이 먼저지. 그 전에 체력 회복이 먼저고, 그리고 스탯도 올려야 한다.

무엇보다 저 사람, 그만둘 것 같거든.

***

보컬 쌤과 보내는 시간은 항상 즐거웠지만 오늘은 그렇지 못했다. 아까 그냥 보내버린 정이한이 내내 신경 쓰였다. 내가 원래 이렇게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나?

오늘 올린 경험치를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숙소 앞이었다. 아침에 봤던 여학생이 날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친구는 어디 갔는지 안 보이고 혼자였다.

“꺄악! 어서 와!”

인사해도 되는 건가? 잠깐 고민하다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너는 왜 혼자 다녀? 아, 그리고 자꾸 너라고 부르기가 좀 그런데 이름이라도 알려줄래? 어색해하는 거 넘 귀엽다! 너 진짜 예쁘게 생긴 거 알아? 본인도 알겠지. 그러니까 연생 하는 거겠지. 아우, 이대로만 예쁘게 커 주라. 절대 역변은 안 돼. 알겠지? 근데 넌 지금 1군이야? 아니면 2군? 아, 맞다! 재혁 오빠 어디 갔는지 알아? 요즘에 안 보이더라고.”

질문과 혼잣말이 혼재되어 혼란스러웠다. 어느 쪽도 딱히 내 대답을 들으려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다시 부지런히 걸음을 서두르려는데, 여학생이 계속 날 따라오면서 말을 걸었다. 조류원 한가운데 서서 일제히 울어대는 새들의 지저귐을 듣는 기분이다.

“나 혼자 의리있게 너 기다린 거 넌 모르지? 다른 애들은 다 주차장 입구 쪽으로 갔거든. 벤 돌아올 시간 돼서. 가끔 오빠들 기분 좋을 때 창문 열고 인사해 주거든. 그거 외에는 외출할 때만 기다리면서 계속 입구에서 진 치고 있는데 난 너 걸어올까 봐 혹시나, 하고 여기 있었어. 내 촉 장난 아니다! 그치?”

“……네에.”

“아! 벌써 다 왔네. 바로 들어갈 거야? 보내주기 아쉬운데 나랑 이야기 좀 더 해주면 안 되나? 안 되겠지?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는데 그냥 얼굴 못 보니까 아쉬워서. 너 빨리 데뷔했으면 좋겠다. 아침저녁에 찔끔찔끔 보니까 감질나. 나 진짜 너한테 완전 꽂혔거든. 내가 원래 잘생쁜 남자 좋아하는데 넌 진짜 하늘이 점지해 준 내 취향이야! 빨리 데뷔해라! 연생 조공 안 받아주는 거 알잖아. 너 데뷔해야 내가 조공도 하지!”

“고, 고맙습니다.”

“꺄악꺄악! 나한테 고맙대!”

여학생이 두 뺨을 감싸 쥐고는 폴짝폴짝 뛰었다. 그사이 나는 잽싸게 고개를 숙인 뒤 아파트로 들어갔다. 유리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여학생은 날 향해 열성적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 여학생은 실장님이 주의하라고 했던 사생이다. 하지만 아까 들은 말은, 한마디 한마디 전부 내가 좋다는 내용뿐이었다. 이런 건 처음이라 낯설기만 하다. 그래도 나쁜 사람 같진 않은데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숙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어제 본 얼굴들이 있었다. 당연히 곰치랑 곰돌이도 있었다. 나머지 흐릿한 인상의 콩나물들이 콕콕콕. 나까지 타면 정원 초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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