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여차하면 내릴 생각으로 슬쩍 올라탔는데 엘리베이터는 잠잠했다. 그대로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가 우리를 싣고 고요히 올라갔다. 그 정적 속에서 곰치가 비아냥거림을 시작했다.
“어제 처맞더니 무섭긴 무서웠나 봐? 우리 몰래 슬금슬금 도망쳐다니게?”
아침에는 게으른 너희를 기다리기 싫어서였지만, 지금 혼자 온 건 만나기 싫어서 피한 게 맞다. 숙소에 가는 동안 체력 보존을 해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체력이 남을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도망친 게 맞기에 나는 긍정해줬다.
“네.”
이제 날 내버려 뒀으면. 하지만 곰치는 끈질긴 놈이었다.
“이거 완전 겁쟁이 새끼네?”
그와 동시에 곰치가 뒤에서 내 양쪽 오금을 무릎으로 찍어 눌렀다. 다리가 확 꺾이면서 균형을 잃었다. 어째 이런 애들은 하는 짓이 다 똑같냐.
숙련된 사람으로서 이럴 때 아주 좋은 손잡이가 있다는 걸 안다. 공격자가 무조건 내 등 뒤에 붙어 있거든. 팔을 위로 올려 곰치의 머리를 콱 붙잡았다.
“아, 고맙습니다.”
손잡이 제공에 대한 감사 인사를 했다. 곰치의 얼굴이 얼룩덜룩하게 붉은색으로 익었다.
“이, 이, 이 새끼가! 이거 안 치워!”
내게 머리를 쥐어 잡힌 곰치가 포효했다. 뻔뻔한 연기를 곁들인 만큼 일부러 그런 걸 알아차린 건 아닐 테고, 친절하게 고맙다고 인사까지 했는데 이렇게 화낼 일인가. 게다가 원인 제공은 본인이 하셨으면서.
내 오금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내가 저 머리를 잡을 일도 없었다. 제대로 씻고 오지도 않았는지 떼어 낸 손이 조금 끈적거렸다. 다른 사람의 땀은 불쾌한 것이라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 옷에 닦기 뭐해서 주인에게 돌려줬다.
“너 이 씹새끼, 오늘 내가 너 가만 안 둔다.”
곰치는 제 셔츠에 손을 닦아내던 내 팔을 확 잡아채면서 으르렁거렸다. 곰돌이는 곰치가 아닌 나를 말리고 있었다.
‘네가 그러면 안 돼.’, ‘너 자꾸 왜 그래,’, ‘그냥 사과해.’ ‘진수 무서운 애야.’ 같은 조언 아닌 조언은 죄다 한 귀로 듣고 흘렸기에 머리에 남은 건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질질 끌려갔다. 팔이 아프다. 체력이 또 떨어지고 있다. 전에 살던 반지하 방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돌아가고 싶다. 체력 남겨 오는 게 얼마나 큰 경험치 손실로 이어지는지 너희는 모르겠지. 쌓이는 거 무시 못 한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숙소로 돌아오는 이유가 있다. 멤버들이랑 사이 안 좋은데 숙소 애들이랑도 나쁘다고 귀에 들어가 봐라. 그렇게 되면 모난 돌은 내가 되는 거다. 내 성격이 나빠서 여기저기 척지고 다니는 사람이 되는 거지.
멤버들은 그나마 이해할 구석이라도 있다. 날 오해해서 싫어하는 걸 위에서 아니까. 근데 이 녀석들은?
회사에서 준재혁 패거리를 어디까지 파악했는지 내가 어떻게 아냔 말이지. 설혹 파악하고 있더라도 내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순 없었다. 쪼르르 가서 일러바친들 바뀔 리 없으니까.
“윽.”
곰치 녀석이 나를 날려 버렸다. 힘도 좋지. 바닥에 팔꿈치를 부딪쳐 순간적으로 통증이 몰려왔다. 아파하는 날 보더니 음흉하게 웃는다. 저거 변태네.
“힘도 없는 새끼가 개기긴 왜 개겨?”
“내가 뭘.”
아,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입으로 나왔다. 팔로 상체를 버티면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눕혀졌다. 내 위에 올라탄 곰치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기울었다. 고작 이런 걸로 이긴 것처럼 구는 꼴이 우스웠다.
“더 맞기 싫으면 연생 그만두고 나가.”
두툼한 손이 내 뺨을 툭툭 건드렸다. 어디서 본 건 많아서 같지도 않은 협박질이다. 내가 나가면 뭐, 지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가 보지?
“김진수.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때, 화를 꾹꾹 눌러 담아 낮게 깔린 차가운 음성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박유찬 목소리다. 저렇게 정색하고 말할 줄도 아네.
내 멱살을 잡고 있던 곰치가 놀라서 고개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박유찬이랑 친했나 보네.
“아, 형이었어요?”
박유찬이 성큼성큼 다가와 내 위에 올라탄 곰치의 어깨를 쥐었다. 꽉 움켜잡았는지 곰치가 “윽! 혀엉, 왜 그래요?” 하면서 듣기 싫은 콧소리를 냈다. 징그러워 죽겠네.
“일어나.”
하지만 박유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곰치가 주춤거리면서 일어났다. 턱을 짓 쳐들고 보고 있는 내게 박유찬이 손을 내밀었다.
여기선 잡는 게 낫겠지. 내가 일어나자 곰치가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다. “어? 어어?”하는 얼빠진 목소리를 내는 걸 보니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박유찬 한 마디에 물러나는 걸 보니 별거 아니었네. 호랑이 없는 굴의 대장 여우였나보다.
“하온아, 괜찮니?”
박유찬은 곰치를 무시한 채 날 살폈다. 어디 다친 데 없는지 묻는 목소리가 상냥했다. 이게 호감도 ‘좋아함’의 효과인가? 신선하다.
“형은 왜 여기 있어요?”
“내가 여기 있는 게 중요해?”
그럼 뭐가 중요한데? 아, 나한테 괜찮냐고 물었었지. 질문에 대답 안 해서 이러나.
“아, 네. 저 괜찮아요.”
박유찬이 제 얼굴을 짚으면서 한숨 쉬었다. 그리고는 날 볼 때와 다른 매서운 눈길로 곰치를 바라봤다. 회도 뜰 수 있을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곰치도 지금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불그죽죽했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유, 유찬 형? 형 왜 그래요? 왜 그 자식한테…….”
“어떻게 애한테 이렇게 난폭하게, 하. 아무리 네가 재혁이를 따랐어도 선을 넘으면 안 되지. 오늘 일 실장님께 보고할게.”
“잠깐만요, 형! 형도 그 새끼 싫어했잖아요. 제가, 제가 이성을 잃은 건 맞아요. 그건 제가 사과할게요. 죄송해요. 하지만 형도 저랑 같은 마음이잖아요. 이번 한 번만 눈 딱 감고 넘겨주세요. 네?”
“너 사과할 상대가 틀린 거 아니야?”
무뚝뚝한 말을 끝으로 박유찬은 곰치한테서 완전히 등 돌린 채 내게 말했다.
“하온아, 짐 챙겨. 숙소 옮길 거야. 나랑 같은 방 쓸 거니까 가자.”
“저 실장님이 여기서 살라고 했는데요.”
“내가 말씀드렸어. 너 데려가려고 온 거야.”
“아하.”
이미 이야기 끝났다면 상관없겠지. 콩나물이 잔뜩 모여있었는데도 숙소는 조용했다. 위이잉, 하고 주방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혀, 혀엉. 유찬 형!”
곰치가 애절하게 박유찬을 부르고 있었다.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딱히 짐을 풀지 않았기에 챙길 것도 없었다. 아침에 세탁 바구니에 넣어둔 옷만 챙기면 되는데…….
빵빵한 가방을 들고나와서 다용도실을 향했다. 콩나물들이 흠칫거리면서 길을 터줬다.
세탁물을 뒤적거리려니 불쾌한 냄새가 났다. 내 옷이었으면 그냥 버리고 갈 텐데 유연이 돈으로 산 거라서 기어코 챙겨 들었다.
이제 곰치는 박유찬의 다리에 들러붙어 거의 빌고 있었다.
“진수야, 너 어쩌려고 그래.”
바짓가랑이 부여잡고 애원하는 곰치에게 박유찬이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음성이 사뭇 다정했다. 이제 화가 좀 풀렸나.
솔직히 나는 박유찬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가 안 간다. 자기가 당한 것도 아니고 나 하나 밀쳤다고 뭐,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나로선 손해 볼 일 없는 상황이니까 그냥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어쨌든 박유찬의 호감도가 좋으니까 같은 방을 쓴다면 체력 회복에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잘못했어요, 형. 정말 잘못했어요…….”
곰치는 급기야 울먹거리고 있었다. 무릎 꿇고 그 위에 양손을 올린 뒤 뚝뚝 눈물을 떨궜다.
“하온이 아니야. 하온이가 재혁이 쫓아낸 거 아니라고. 쟤는 그냥 우연히 캐스팅돼서 오디션 본 것뿐이야. 우리가 오해할 법한 타이밍이었던 거 나도 알고, 나도 그래서 하온이 오해했었어.”
“그럼 재혁 형은 왜 쫓겨난 건데요? 쟤 꽂으려고, 메보 포지션 겹치니까 재혁 형이 쫓겨난 거 맞잖아요!”
박유찬은 길게 한숨 쉰 뒤 말했다.
“재혁이가 노래를 못 불러? 비주얼이 딸려? 뭐 꿀리는 거 있었어?”
“없었죠!”
“그럼 대표님이 왜 완성된 재혁이 쫓아내고 하온이 데려왔을까? 우리, 그러니까 데뷔 조 멤버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거 알고 계셨을 텐데.”
“그건……, 그건…….”
곰치는 답을 내리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준재혁 대신 나를 넣은 타당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모양이다. 멤버가 꼭 다섯 명일 이유는 없으니까.
“나도 이유는 몰라. 나도 모르지만 재혁이가, 재혁이가 원인 제공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게다가 하온이는 애초에 비주얼 멤버로 캐스팅된 거야. 메보가 아니었어. 재혁이가 잘못한 게 없었으면 여섯 번째 멤버가 됐겠지.”
“재혁 형이 잘못했을 리 없잖아요. 그 형이 어떤 사람인데…….”
이 정도면 광신도 아닌가. 거의 사이비 교주 수준인데? 얼굴도 모르는 준재혁의 별명은 앞으로 교주다. 나중에 이름 까먹을 테니까 교주로 기억해 둬야지.
“나도 이성을 잃었어. 너랑 똑같이 생각했거든. 그런데 하온이는 원망도 안 했어. 이해한대. 자기가 오해받을 상황이었으니까 그럴 수 있다더라. 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니?”
“…….”
“난 이해 못 할 것 같거든. 쟤 고작 열여덟 살이야.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지 난 감히 상상도 못 하겠어. 그만큼 하온이한테 미안하고, 진짜 좋은 애라는 거 알았거든. 그래서 난 오늘 일 입 다물어 줄 수 없을 것 같다.”
어떤 마음이냐니. 말 한 그대로였는데? 이 대목에서 나는 박유찬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 복잡해 보이던 시선이 저런 의미였나? 그럼 호감도 오른 이유가 오해 때문인 걸까. 오해 때문에 깎였다가 오해 때문에 올라가네.
곰치는 망부석이 된 것처럼 널브러졌다. 박유찬이 내 어깨를 감싸 안듯이 끌어당겼다.
“가자. 우리 숙소는 옆 동이야.”
미묘한 기분이었지만 내 체력은 소중하므로 얌전히 굴었다. 안녕, 콩나물들아. 안녕, 곰치랑 곰돌아.
“지금 숙소에는 서호 혼자 있어. 걱정하지 말고 나한테 맡겨.”
“네에, 뭐 걱정은 안 해요.”
박유찬이 씩씩해서 좋다고 날 칭찬하면서 웃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