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1화 (21/320)

21.

“저 춤 못 추잖아요. 이리저리 추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죠.”

전생의 내가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이렇게밖에 말 못 한다. 그리고 주간 미션이 아니었다면 원곡 안무를 바꿀 필요도 없었을 거다. 높은 등급을 받아 내기 위한 일종의 꼼수였다.

똑같이 추는 것보다 디테일을 조금 바꿔서 추는 게 등급이 더 잘 나오더라고. 바꾼 게 별로면 오히려 확 떨어지지만.

“군무로 추면 각도 맞추는 그림이 더 잘 나올 테지만, 진하온 솔로 댄브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이게 더 낫네. 확 늘어지는 느낌이 너한테 어울려. 네 실력이 부족한 게 좀 아쉽지만.”

아무렴 그렇겠지. 안무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히트곡 안무다. 당연히 잘하는 사람들이 머리 맞대고 고안했을 거다. 하지만 군무용과 개인용은 조금 차이가 있고 내게 어울리는 춤도 다르다.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게 달라?”

박유찬이 우리 대화를 지켜보다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백강현이 뭐가 어떻게 다른지, 느낌이 어떻게 바뀌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저 없는 단조로운 어조였지만, 눈이 반짝거려서 잔뜩 신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형 무뚝뚝한 줄 알았는데 은근 말 많이 하네. 대화 주제가 춤이라서 그런가?

처음에는 열심히 듣던 박유찬이 이내 인상을 찡그리면서 “이제 됐어!”하고 항복했다. 짧은 동작 하나에 저렇게 많은 말을 뽑아낼 수 있다는 건 재능의 영역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춤 스탯 경험치가 올랐을 거라는 데에 며칠 전에 깎은 내 손톱을 걸 수 있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오늘은 멤버가 다 모이는 날인가? 이서호도 등장했다. 이서호는 가방을 한 손에 든 교복 차림이었다. 학교 끝나고 왔나.

그럼 마지막 멤버인 양아치……. 이름이, 나는 한 번 더 메인 미션을 커닝했다. 아, 정이한. 그래. 정이한도 나타나지 않을까?

“수업 일찍 끝났어?”

이서호는 박유찬을 째려본 뒤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오늘 종업식이라 빨리 끝났어.”

“아, 그래. 그랬었지.”

박유찬이 한숨 쉬면서 제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갑갑한가 봐. 나보다 서이호를, 아니. 정이한 때문에 헷갈렸잖아. 이서호를 더 잘 알 테니까.

“너는 왜 여기 있냐고.”

이서호가 날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박유찬이 날 힐끔 보는 게 느껴졌다. 나로선 가만히 있어 주는 게 좋다.

좋아하는 형1을 내가 없앴는데 좋아하는 형2마저 자기편 안 들어주면 저 어린애가 얼마나 서럽겠어. 이서호를 잘 알아서인지 다행히 박유찬은 얌전히 굴었다.

“보컬은 오후부터라서 오전에 춤 연습하려고 왔지. 할 거면 너도 해. 지금 ‘휘스트’ 연습하고 있으니까.”

“갑자기 그 노래는 왜 하는데? 강현 형, 쟤가 하고 싶대? 왜 다 같이 사이좋게 있는 건데?”

이서호가 백강현을 보면서 물었다. 이 연습실의 통제권은 아마도 백강현이 가지고 있나 보다. 리더는 박유찬인데 자연스럽게 저쪽한테 물어보네.

“나한테 하는 소리냐?”

백강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서호가 놀라서 움찔거렸다. 눈에 뵈는 거 없이 덤볐다가 호랑이 똥 냄새를 맡은 강아지 같았다.

이거 좀 곤란하네. 분위기가 이래서야 연습도 못 할 것 같고. 흠. 슬슬 사라져 줄까. 좀 이르지만 점심 먹고 쉬어야지.

“나는 갈 테니까 이제 너 하고 싶은 거 해.”

“내가 형이라고 했지!”

“알았어, 알았어. 서호 형. 됐지? 간다.”

“어디 가는데!”

나가려니까 또 붙잡는다. 얘는 버릇 고치랬는데 아직도 이러네. 꽉 잡힌 팔을 내려보면서 반대쪽 손으로 손등을 툭툭 두들겼다. 무의식중에 잡은 건지 본인도 깜짝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잽싸게 날 잡아채고 있던 손을 풀었다.

“어디 가긴. 밥 먹으러 가지. 나 배고파.”

“……너는 사람 오해하게 그딴 식으로 빠지지?”

“뭘 오해해?”

“내가 쫓아내는 것 같잖아!”

쫓아내려고 이러는 거 아니었어? 몰랐던 사실인데. 이서호의 얼굴이 뒤죽박죽이었다. 신경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미안해 보이기도 하고.

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본인도 갈피를 못 잡는 모양이다. 상태 이상 한 번 유발했다고 되게 미안해하네. 사과도 받아줬는데 말이지.

“어, 그럼 나도 먹어야겠다.”

박유찬이 덩달아 점심 먹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더니 잠시 주저하다가 백강현에게 물었다.

“강현아, 같이 먹자.”

“……나?”

“응. 너도 같이. 싫어?”

백강현은 특유의 무감정한 얼굴로 박유찬을 올려봤다. 생글거리는 박유찬의 이마에 보이지 않는 땀방울이 흐르는 것 같았다. 고요히 응시하던 백강현의 고개가 위아래로 미세하게 움직였다.

“가자.”

박유찬의 얼굴이 밝아졌다. 되게 어려워하네. 뭐 해달라고 하면 의외로 잘해주던데. 어떻게 나보다 더 자기 멤버를 몰라. 전 리더가 중간 다리 역할 했던 것 같은데 이런 것도 안 알려줬어? 진짜 혼자 다 해 먹은 사람이었나 보다.

“나도 같이 먹을 거야. 네가 우리 형들한테 꼬리치는 거 감시할 거라고!”

꼬리 친다니. 내가 옴므파탈도 아니고. 아닌가? 따지고 보면 꼬리 칠 거 다 친 것 같긴 하다. 백강현한테 댄스 코칭 받았고, 박유찬이랑 오해 풀어서 호감도까지 올려놨으니까. 이거 알면 배 아파하겠지? 강아지 발작 버튼일 테니 함구해줘야지.

“난 혼자 먹을 거니까 걱정 마.”

“어?”

“응?”

“왜!”

박유찬이 놀라서 반문했고, 그 반응에 나는 얼빠진 소리를 냈으며, 이서호가 빽 소리쳤다.

“무조건 같이 가! 내가 너 감시 한다고 했잖아! 어딜 도망가려고? 같이 먹어!”

이서호가 아르릉거렸다. 나 싫다면서. 진짜 특이한 애야.

“알았으니까 소리 지르지 마.”

“어? 어. 알겠어. 알았으면 됐어.”

***

우리 네 명은 다 같이 지하 식당을 찾았다. 11시 40분이라 조금 이른 시간인데 사람이 꽤 많았다. 내가 한식을 고르자 이서호는 감시하겠다면서 날 따라왔고, 박유찬이 그 뒤를 따랐다. 백강현도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한식을 골랐고.

멤버들과 함께 밥 먹기.

전생에 해보고 싶은 일이었는데 황당하게 오늘 해보네.

다시 옹기종기 모인 것까지는 뭐 그렇다고 친다. 하지만 우리에겐 사이좋게 대화를 나눌 공통된 화제도 없고,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었기에 기묘한 침묵이 감도는 식사 시간이 됐다. 나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은 불편하지 않으려나.

이서호는 감시자 역할에 충실하려는 듯 날 보면서 신경질적으로 음식을 퍼먹고 있었다. 참 피곤해 보였다. 그래서 일부러 천천히 느긋하게 먹었다. 계속 피곤하라고. 건드리는 대로 팔딱거리는 게 보면 볼수록 귀엽단 말이야.

“서호야.”

“왜?”

“진수 1201호지?”

“맞아. 왜?”

내 숙소다. 아까부터 왜 자꾸 내 숙소를 궁금해하는 거지?

“아니야. 확인할 게 있어서.”

궁금했지만 대화를 끝내 버렸다. 이서호가 “뭔데?” 하면서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라면서 단절시켰다. 이서호는 잠깐 서운해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열심히 견제했다. 바쁜 녀석이군.

그러거나 말거나 난 내 식판에만 집중했다. 그랬더니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이상하다. 나 진짜 느릿느릿 천천히 먹었는데, 왜 이서호랑 동시에 식사가 끝났지? 저 녀석 허겁지겁 먹지 않았나? 심지어 박유찬은 아직 절반밖에 안 먹었다. 어리둥절한 마음을 숨기고 숟가락을 내려놨다.

“벌써 다 먹었어?”

박유찬이 텅 빈 내 식판을 보면서 물었다. 조금 놀란 모양이다.

“네. 오늘은 좀 천천히 먹었는데…….”

“그게 천천히 먹은 거라고? 너 식충이냐? 배에 거지가 들었어?”

이서호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끼어들었다. 나는 바닥까지 긁어먹어 반짝반짝 빛나는 이서호의 식판을 빠안히 바라봤다. 방금 한 말이 제 얼굴에 침 뱉기였다는 걸 알려줄 심산이었다. 보아라, 깨끗한 너의 식판을.

작은 머리에 눈치 정도는 탑재하고 다니는지 내 의도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뭐! 난 빨리 먹은 거거든? 넌 천천히 먹은 거라며!”

“초딩이냐. 이런 거로 트집 잡게?”

“내가 너보다 한 살이나 많거든? 내가 초딩이면 넌 유딩이게?”

“트집 잡는 방식이 어리다는 거잖아. 이해력이 부족하면 공부를 좀 하던가.”

“아이씨, 너 진짜. 내가 형이라고!”

“말문 막힐 때마다 그 소리 하네. 형형. 서호 형. 서호 형. 서호 형아~ 됐냐? 만족했지?”

“짜증 나!”

아주 그냥 찌르면 찌르는 대로 찰진 반응이 돌아왔다. 머리가 나쁘니 말싸움만 했다 하면 무조건 밀리는 것도 유쾌하고. 나도 머리 굴려 가면서 단어 고를 필요가 없어서 편안했다. 놀리는 맛이 있어. 나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일어났다.

“또 어디가!”

“밥 다 먹었으니까 자러 가. 나 자는 것도 감시하려고? 그게 아니면 같이 자줄까? 혼자 자는 거 무서워해? 서호 형아~ 동생이 재워줘?”

“꺼져버려!”

가지 말라고 해도 갈 생각이다. 이쯤하고 가야지. 놀아주는 것도 좋지만 시간 아깝다.

“형들 맛있게 먹어요. 저 먼저 가요.”

“어, 으응.”

대답은 박유찬에게서만 돌아왔다. 이서호가 왜 대답해주냐고 씩씩거렸다. 그 말을 들은 박유찬은 진지하게 이서호에게 밥 먹고 이야기 좀 하자면서 운을 뗐다. 긁어 부스럼만 안 만들면 좋겠는데.

뭐 저 녀석 성격은 잘 파악하고 있을 테니 알아서 하겠지. 박유찬은 이성적이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믿어보자.

식판을 정리하고 올라가는 길에 보컬 쌤을 만났다. 잔뜩 신이 나서 쌤이랑 인사하고, 조금 이따 보자면서 손을 흔들었다. 얼른 나의 보금자리로 가서 한숨 자고, 일어나서 오후 트레이닝도 힘내야지!

오늘은 몇 번 보컬룸이 비어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엘리베이터가 2층에서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그곳엔 양아치가 있었다.

전 멤버 집합.

지나가듯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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