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20화 (20/320)

20.

“전부 다. 첫날 너랑 인사했을 때 서호 막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어쨌거나 우리 멤버로 들어왔는데 신경 안 쓴 것도 미안해.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기도 했거든.”

“괜찮아요. 이제 안 피하실 거죠?”

“……응. 리더로서 널 책임질게.”

“뭐 그렇게 거창한 소리를 해요? 저는 제가 책임져요. 형한테 책임 전가 안 해요.”

“똑 부러지네.”

박유찬이 하하, 하고 웃었다.

“형도 힘든 일 있으면 이렇게 틀어박히지 말고 멤버들한테 말해요.”

“내가 어떻게 말하니. 리더고 형인데. 나 혼자 감당해야 해지.”

이건 또 무슨 한심한 소리인가. 나는 눈매를 좁힌 채 고개를 저었다. 박유찬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왜.”하고 물었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인 이유가 뭔지 알아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혼자서는 힘들다는 의미예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도 괜히 있는 거 아니고. 리더라고 고립될 필요 없잖아요. 주변에 도와줄 사람 많으니까 손 내밀어 봐요. 손잡아줄 사람 옆에 두고 안 잡으면 손해예요.”

당신은 나랑 다르게 친한 사람들이 많잖아. 멤버들한테 도와 달라고 하면 다들 도와줄 텐데 왜 땅 파고 있냐? 고립을 자처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멍한 얼굴로 날 보던 박유찬이 고개를 저으며 작게 감탄했다.

“너 열여덟 맞아? 인생 다 산 사람처럼 말하네.”

뜨끔했다. 진짜 1회차 인생 끝내고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이럴수록 당당해야 한다. 내가 인생 2회차인 거 어떻게 알겠냐고. 난 뻔뻔하게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스레 말했다.

“주민등록증 보여줘요?”

“아하하. 됐어. 알았어. 고맙다.”

박유찬이 처음 듣는 유쾌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번에야말로 보컬룸을 나가려는 데 날 또 부른다.

“아, 그런데 하온아.”

“네?”

“숙소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OO아파트?”

“네. 거기요.”

“몇 호야?”

“1201호요.”

“……그럼, 그. 진수 있는 곳이야?”

진수가 누구지. 사람 이름 외우는 거 진짜 어렵다. 내가 정한 별명 리스트라도 공유해주고 싶다. 별명만 봐도 얼굴이 떠오르도록 지었는데 말이야. 얼마나 찰떡같이 외우기 좋냐고. 쉬운 길 두고 어려운 길로 가려니 피곤하다.

“모르겠어요.”

“맞는 것 같은데……. 일단 알겠어.”

“네. 저 먼저 갈게요.”

“아, 같이 가! 나도 연습해야 해.”

“그럼 빨리 일어나요.”

태평하게 앉아 있는 박유찬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박유찬은 잠시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안 잡을 건가? 더럽진 않은데.

머쓱함에 손을 치우려고 했을 때 뒤늦게 내 손이 꽉 붙잡혔다. 박유찬이 또 웃었다.

***

기적이다!

박유찬의 우호도가 ‘좋아함’으로 바뀌었다. 중립도 아니고 좋아함이다. 싫어함에서 껑충 뛰어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모르겠다.

오해가 풀렸을 뿐 딱히 날 좋아하게 될 만한 계기나 이유는 없었다. 원래 사람 쉽게 좋아하는 편인가 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덕분에 두 명 패스했고, 두 명 남았다.

이제 남은 건 여전히 날 싫어하고 있는 두 분.

백강현은 조금 버그 아닐까 싶기도 하고. 관심 없다고 했는데 왜 싫어함인지 모르겠다.

적당히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왔다. 그런데 복도에서 박유찬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지?

“여기서 뭐해요?”

“너 기다렸지.”

“왜요?”

“이거 받아.”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알루미늄 캔이 보였다. 쓰레기? 본능적으로 받았더니 묵직하다. 내용물이 꽉 찬 음료수 캔은 아직 따지 않은 새것이었다.

“왜 주는 거예요?”

“위로해 준 것에 대한 작은 감사 인사.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데 지금 당장 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네.”

나한테 위로받았다고? 그러니까 이게 나한테 고마워서 주는 선물이라는 거지? 따뜻한 음료수 캔을 꼼지락꼼지락 만지작거렸다. 먹기 아깝네.

“어……. 잘 마실게요.”

“가자.”

내가 옆으로 갈 때까지 박유찬은 날 기다렸다. 그러더니 내 보폭에 맞춰 걸었다. 여기서 우리 연습실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이걸 기다려?

괜히 속으로 툴툴거렸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낯간지럽고, 묘한 뿌듯함과 성취감이 함께 느껴졌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네. 실장님이랑 쌤은 처음부터 내게 호감을 보이던 사람들이다. 날 싫어하던 사람과 관계가 바뀐 건 처음이라 당혹스럽다.

“형.”

“응?”

“저 좀 어색해요.”

“아까는 말 잘하더니?”

“그랬어요?”

“응.”

“그랬나…….”

어색해 죽겠네. 이거 체력 빨리는 거 아닌가? 슬쩍 확인했는데 좀 떨어져 있긴 해도 하락 폭이 눈에 띄진 않았다. 체력 떨어지는 기준 중 하나는 내 심리 상태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젠 헷갈린다.

“사실 나도 좀 어색해.”

“그렇죠? 우리 사이 안 좋았잖아요.”

“이제부터 좋아지면 되지. 네가 나 미운 게 아니라면.”

미워할 이유가 어딨지? 멘탈 터진 사람이 발악 좀 한 게 다잖아.

“안 그래요.”

“나라면 날 싫어했을 것 같은데. 억울하지 않았어?”

“이야기 들어보니 오해할 만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죠.”

박유찬이 헛웃음 소리를 냈다. 날 보는 눈초리에 나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복잡해 보이는데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런 시선으로 날 보지?

박유찬의 눈동자가 한쪽으로 굴러갔다. 그리고 다시 날 향했을 땐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왜 오해 풀어보려고 안 했어?”

“말한들 믿었겠어요? 형도 혼자 생각하고, 정리한 다음에 저한테 물어본 거잖아요. 제가 억지로 설득해봤자죠. 반발심에 오해가 더 깊어지면 모를까.”

“아니라곤 못 하겠네.”

“그렇죠? 솔직히 소 뒷걸음질 치다가 개구리 잡은 격이라 저도 얼떨떨해요.”

박유찬이 유쾌하게 웃으면서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풀린지 몇 분이나 됐다고 이런 과감한 신체 접촉을!

“너무 스스럼없이 대하는 거 아니에요? 형 저한테 미안하다면서요?”

“거리를 좀 뒀으면 좋겠어? 네가 불편하면 원하는 대로 할게.”

박유찬이 손을 거둬들이고는 슬쩍 멀어졌다.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가시라는 건 아니고. 박유찬은 멘탈이 약하니까 내 옆에 딱 붙여서 감시하면 나도 편하고 좋지. 그런 생각을 하며 얼른 다시 박유찬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쩔 수 없죠. 형은 섬세한 사람이니까 제가 봐줄게요. 편하게 해요.”

“응. 고마워.”

미소가 돌아왔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멤버 중 한 명이랑 친하게 지낼 수 있다니. 감히 상상도, 바라지도 않은 일이었다. 멘탈 약한 박유찬 내가 잘 돌봐줘야지.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재능은 뭘까? 체력 좀 좋을 때 엿보기 스킬이라도 써 볼까? 잘하는 거 더 잘하게 해주면 좋잖아.

나란히 연습실로 돌아갔더니 백강현이 최초의 미스테리를 발견한 학자처럼 우리를 봤다. 나를 한 번 보고, 박유찬을 한 번 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빨리 회복했네?”

“원래 더 오래 걸려요?”

“하루나 이틀쯤.”

이거 예상외의 폭탄이었다. 한창 활동할 때 멘탈 터져서 하루, 이틀 죽상하고 있으면 스케줄은 어떡해? 무대 컨디션까지 다 망칠 거 아니야. 예능이라도 나가서 하하 호호 웃어야 하면 그건 또 어떡할 거고.

“강현이 네가 어떻게 알았어?”

“보이니까 알지. 내 눈이 동태도 아니고.”

“아무도 모를 줄 알았지…….”

백강현이 소리 내서 혀를 찬 뒤 말했다.

“그럼 더 잘 숨기던가.”

“이제 괜찮아. 하온이한테 손잡아 달라고 할 거니까.”

박유찬이 내 어깨를 잡아당겨 옆에 세우면서 말했다. 나는 멀뚱멀뚱 서서 박유찬을 올려봤다. 이 타이밍에 이렇게 나를 끼운다고?

“그렇지?”

동의를 구하듯 날 보면서 물었다. 아까 말한 손 잡아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멤버들이긴 했지만……. 일단 동의해줬다.

“네, 뭐.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백강현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등을 돌려버렸다. ‘오글거리게 뭐 하는 거야.’ 하는 작은 투덜거림이 들렸다. 나도 동의하는 바다. 이렇게 쓰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시스템: 흑역사 하나를 적립했습니다.> 같은 메시지가 나와도 받아들일 자신 있었다. 안 나오나? 흑역사 적립은 안 알려줘?

나는 조용히 백강현 옆에 나란히 섰다. 아까 내가 연습했던 곡이 계속 나오고 있길래 알짱거리면 또 가르쳐 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박자에 맞춰서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데 백강현이 날 불렀다.

“진하온.”

오, 좋아! 기다리고 있었다고.

“네!”

“조금 전에 ‘너를 보는 나를.’ 부분 팔 각도 일부러 그렇게 한 거야? 아까부터 계속 그렇게 추던데.”

“네.”

“왜?”

“저한테 더 어울리니까요?”

강현 형이 휴대폰을 조작해 음악을 멈췄다. 다시 재생됐을 땐 아까 멈췄던 대목에서 한 박자 앞으로 당겨져 있었다.

다시 해보라는 무언의 압박에 몸을 움직였다. 가볍게 턴 한 뒤 팔을 구부리고, 어깨를 내리면서 양팔의 각도를 달리했다. 원래는 같은 각도로 맞추는 동작이었다.

거울을 보니 나와 똑같은 안무를 더 완벽하게 추는 백강현이 옆에 있었다. 머리 굴려서 비튼 포인트 중 하나였는데 잘하는 사람이 추니까 확실히 멋지긴 하다.

“이런 건 어떻게 생각했어?”

춤의 정점에 계신 분이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의미로 묻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알맹이는 빼고 껍데기만 알려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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