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드모드 아이돌-19화 (19/320)

19.

그냥 한탄하는 거 잔뜩 들어주고 신경질도 받아주고 하면 스트레스 좀 풀리지 않을까. 손 올릴 것 같은 사람은 아니니까 체력 뚝뚝 떨어질 일은 없겠지.

문 두들기면 거절할 게 뻔했기에 그냥 열어봤다. 잠기지 않은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자기 문이 열려 놀랐는지 박유찬의 턱 끝이 천장 쪽으로 들렸다.

“……내가 먼저 왔어.”

“알아요. 형 따라온 거니까.”

“미안하지만 할 말 있으면 다음으로 미뤄줘.”

기운 없어 보이는 목소리였다. 커다란 체격임에도 몸을 꾸역꾸역 접어 웅크린 모습은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참 안쓰럽기도 하지. 내 눈에는 다 애들이다. 박유찬도 리더라지만 고작 22살이다.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춤과 노래가 인생의 전부였을 아이. 나이에 비해 정신적으로 어릴 게 뻔했다. 그러니 의지했던 사람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체하러 들어온 사람을 원망하는 건 당연하다.

오히려 중립이었던 멤버 한 명이 더 신기하지. 원래 리더였던 사람을 안 좋아했나. 나는 보컬룸 문을 닫고 꼼꼼하게 잠그기까지 했다. 이제 소리쳐도 밖에선 안 들린다.

“왜 혼자 웅크리고 있어요? 이렇게 혼자 삭히는 거 되게 위험한데. 언젠가는 터져버릴걸요?”

“너랑 상관없잖아.”

“제가 원인이니까 상관없진 않죠.”

나는 박유찬의 반대편에 똑같이 웅크리고 앉았다. 무릎을 세워 두 팔로 끌어안은 채 우리는 마주 봤다. 키 차이가 있어서 내가 조금 올려다봐야 했지만. 그러고 보니 여기는 전부 나보다 큰 사람들뿐이네.

전생의 나는 175cm 부근에서 성장이 멈췄었다. 어릴 때부터 눈칫밥 먹으면서 구박받은 거에 비해선 잘 컸다고 자부한다. 이번 생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 자꾸 다른 생각 하네. 이야기 좀 시작해 볼까.

“그분한테 많이 의지했어요?”

“……그러니까,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했잖아. 이해 안 돼?”

“혼자 남은 것 같아서 무서워요? 아니면 버림받은 것 같아서 속상해요? 그것도 아니면 그 사람의 다른 면이 보이기라도 해요?”

박유찬의 눈가가 새빨갛게 물들더니, 제법 사나운 눈길로 날 노려봤다. 혼자 삭히는 사람은 알게 모르게 안이 곪아 있기 마련이다. 아이돌은 가뜩이나 힘든 일이 많은데 전부 쌓아두다가 도망치면 어떡해.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 스트레스 푸는 것도 마찬가지. 나는 날 감정 쓰레기통으로 쓸 수 있게끔 박유찬의 트리거를 작정하고 건드렸다. 싫은 놈이 앞에서 아는 척하면서 깝죽대면 누구나 터지기 마련이잖아. 그게 외면하고 있던 내용이라면 더더욱.

“아까 형이 왜 그렇게 충격받았는지 생각해봤거든요. 형은 제가 오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분 아웃이라는 거 깨달은 거죠? 실장님한테 들은 게 사실이라는 거요.”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철컥, 방아쇠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박유찬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까득까득 긁어내렸다.

아, 저거 피 나면 어쩌려고. 이런 버릇은 미리 잡아놔야 한다. 데뷔하고도 저러면 곤란해.

손을 뻗어 아랫입술을 건드리자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면서 상체를 꼿꼿하게 세운다. 박유찬의 입이 벌어졌다. 입술은 그새 붉게 변해 있었다. 가만 보니 거칠거칠한 게 자주 저랬나 보다.

나는 박유찬의 입술을 주시하면서 조금 더 방아쇠를 당겼다.

“저 메보가 아니라 비주얼 멤버로 캐스팅된 거 깨달은 거죠? 어쩌면 지금도 찾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 사람 대신할 메인 보컬.”

이서호의 머릿속은 꽃밭이라 믿고 싶은 것만 믿지만, 박유찬은 생각할 줄 아는 것 같다. ‘새로 온 멤버가 비주얼 멤버로 캐스팅됐다.’라는 사실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멘탈 터진 거고.

“너 일부러 나 긁는 거지?”

“네. 스트레스 푸시라고요. 저한테 아무 말이나 해도 돼요.”

“……무슨 말.”

“말 그대로 아무 말. 쌓아둔 거 아무거나. 욕하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요.”

“……너한테 화풀이하라고?”

역시 똑똑하네. 정말 편하게 대해도 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가벼운 어조로 “네.” 하고 대답했다. 잠시 날 응시하던 박유찬은 시선을 내리깔면서 한숨과 함께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

박유찬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유를 모르겠어……. 왜 재혁이가 쫓겨나야 하는데? 왜 잘린 거야? 속 시원하게 알려주질 않으니까 답답해 죽겠어. 당연히 너 때문인 줄 알았지. 그래서 너 지키려고 말 못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당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날 희생양 삼은 거지. 정확하게는 희생양이 된 걸 알지만 손 쓸 생각이 없는 거고.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날 보던 실장님이 떠올랐다. 좋은 사람이라니까.

“이전 리더분 되게 좋은 사람이었나 봐요. 여기저기서 평가가 좋네요.”

그만큼 날 싫어하지만. 뭐 어때.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날 겨냥해서 괴롭힌 것도 아닌데. 그저 타이밍이 안 좋았던 것뿐이다. 나도, 이 사람들도.

“응. 우리 모두를 살뜰하게 살펴주는 진짜 리더였어. 데뷔 조뿐만 아니라 연생 애들도 친동생처럼 대했거든. 다들 재혁이를 믿고 따랐는데…….”

“이유를 들으면 형들이 상처받을까 봐 숨기는 거 아닐까요. 실장님 상냥한 거 아시잖아요. 실장님이 ‘우리 애들’이라고 하던데.”

“……알아. 나도 좋아하고, 의지 많이 되는 분이셔.”

“그런 실장님이 숨기는 건 숨길만 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형이 납득하기 어려울 순 있지만.”

득득 긁어서 소리치게 할 생각이었는데,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되었다. 이건 그 위로……같은 건가. 내 주제에 퍽이나 잘도 남을 위로하겠다. 욕받이를 자처하는 건 몰라도 위로하는 일에는 소질 없었다. 좀 망한 것 같네.

“나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긴 했어. 하지만 내가 본 재혁이는 정말 좋은 애라…….”

“준재혁은 좋은 사람이에요. 형도 좋아하고, 서호도 좋아하고, 저 숙소 들어갔는데 거기 사람들도 다 좋아하더라고요. 그런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 없잖아요.”

이것도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그런 사람 중에 나쁜 사람 많다. 여기저기 알까기 하는 사람치고 좋은 사람 못 봤다. 대부분 목적이 있으니까 잘해주는 거거든.

내가 본 사람들은 그랬다. 정말 소수의 좋은 사람도 있긴 하더라. 뉴스에서 봤다. 뉴스에 실릴만한 일이라는 건 흔치 않다는 의미 아닌가?

그래도 믿고 싶어 하는 걸 믿는 게 멘탈 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그냥 그렇게 두면 된다. 본인도 어느 정도 ‘혹시.’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 땅 파고 있는 걸 테니까 긍정이나 해줘야지.

그렇게 좋은 사람이 갑자기 잘릴 이유가 뭐가 있겠어. 박유찬도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을 거다. 인성 문제. 그거 말고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으니까 못 믿어서 더 저러는 거다. 그 괴리에서 오는 혼란함에 눈 감고, 귀 막은 거겠지.

이 사람은 또 강아지랑은 다른 방향으로 날 싫어했던 거구나. 이서호는 말 그대로 ‘네가 우리 형 쫓아냈어! 빼애앵!’이었다.

반면, 박유찬에게 나는 ‘증거’였다. 전 리더를 의심할 증거.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날 떠올릴 때마다 ‘혹시.’ 하는 생각이 든 거겠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고, 실장님의 설득이 계속되면서 설마 했던 마음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을 거다. 그래도 믿을 수 없으니까 부정하고, 또 부정하다가 오늘 나랑 마주치게 되면서 터진 거고.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었으니 내 말도 통한 거다. 강아지였다면 ‘거짓말!’하고 성질냈을걸.

“응. 좋은 사람이야. 맞아. 그런데 왜 쫓겨났냐고…….”

아이고. 원점으로 돌아갔다. 본인이 의심하는 게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박유찬은 팔에 이마를 대고 고개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얌전히 앉아 정수리를 바라봤다.

한참 숙이고 있던 박유찬이 길고 긴 숨을 뱉었다. 팔에 닿았던 이마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꾹꾹 누르고 있었나 봐.

“……추태를 보였네.”

여전히 우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만들어진 미소를 되찾은 얼굴이었다. 표정 관리를 할 정도로는 추스른 것 같다. 신기하네. 정말 혼자서도 잘 추스르는 타입인가. 내가 도움 됐을 리 없으니 괜한 오지랖 부렸나 싶다.

그래도 스트레스 해소는 못 했네. 결국 안에 담아 둔 거잖아. 이왕 오지랖 부린 김에 조금 더 부려볼까?

“더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무슨 말?”

“그냥 이거저거다. 아무 말이나 괜찮아요. 저 친구 없어서 새어 나갈 걱정도 없거든요.”

“친구가 왜 없어. 많을 것 같은데.”

“그래요? 칭찬 고마워요.”

박유찬이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면서 날 봤다. 미남이라 그런지 고개를 갸웃하는 것만으로도 은근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잘생기고 볼 일이야. 나도 좀 선이 굵직한 인상이었으면 어땠으려나. 덜 괴롭혔을까? 만만한 취급 받았던 데에는 인상도 한몫했을 것 같거든.

“그게 칭찬으로 들려? 그런데 나 칭찬한 게 아니라 진짜 그렇게 생각한 건데. 학교에 친구 많지 않아?”

“학교 안 다녀요. 집이랑 회사 왔다 갔다 하는 게 전부예요.”

“……너도 나만큼 삭막하게 사네.”

나는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형이 삭막해요? 되게 섬세한 사람 같은데.”

“내가 어딜 봐서?”

“느낌이 그래요.”

멘탈 약해 보이는데, 사실대로 말할 순 없으니 섬세하다고 돌려 버린 거지만. 박유찬이 푸스스 웃음소리를 흘렸다. 어쩐지 분위기가 괜찮은 것 같은데? 표정도 훨씬 좋아졌고. 굳이 ‘속내를 털어놓아라!’하고 들쑤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형 괜찮아졌으니까 가봐야겠다. 강현 형이 저 기다리고 있거든요.”

“백강현이?”

“네. 기다려 준대요. 되게 좋은 형이에요.”

“너도 참 대단하다. 걔 쉽게 말 붙일 만한 애가 아닌데.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이잖아. 우리랑은 아직도 어색하거든. 전부 재혁이가……아, 아니, 아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인 뒤 웅크리고 있던 자세를 풀었다. 막 일어나려는데 박유찬이 날 불렀다.

“하온아.”

“네?”

“미안해.”

“뭐가요.”

여기도 사과하네. 벌써 두 번째 받는 사과다. 멤버 별로 사과받기 챌린지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은, 이상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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