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이미 수두룩한 거절로 다져진 내 무쇠 신경은 아주 단단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았어. 내게 마음을 열어줄 단 한 명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여기저기 말 걸고 다녔다. 마지막엔 방에 처박혀서 궁상떨긴 했지만 노력할 만큼은 했던 것 같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한숨 나오는 어정쩡한 춤을 계속 췄다. 포인트가 필요해. 하지만 메인 미션은 너무 꽉 막힌 절벽이야. 진퇴양난이었다.
댄스 쌤한테 빌붙어야 할 타이밍인가. 내 체력 문제에 대한 타협만 잘 되면 좋겠는데. 하루 만에 말 바꾸기 민망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시간 버리는 느낌이 들더라도 9시 지나서 실장님 출근할 때까지는 혼자 해야지.
“그거 엑시엘의 휘스트야?”
응? 생각 바뀌었나? 가르쳐 줄 마음이 들었다면 붙잡을 요량으로 잽싸게 대답했다.
“네.”
백강현이 본인 휴대폰을 블루투스 스피커와 연결해 연습실 전체에 노래가 나오게 해줬다.
“오!”
감탄하면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봤다.
“강현 형, 도와주시려고요?”
친근감 있게 불러주겠어. 거절은 거절한다. 백강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너, 이름 뭐였지?”
“하온이요. 진하온.”
“춤추는 거 좋아해?”
“네! 왜요?”
“표정이 좋길래.”
“제가요? 완전 썩은 얼굴 아니었나.”
춤 가르쳐 줄 것처럼 굴더니 왜 질문만 하는 걸까.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보통 싫어하는 상대를 궁금해하진 않던데.
“어. 좀 썩어 있긴 했는데 춤이 싫은 게 아니라, 못 하는 게 아쉬워서 그런 것 같길래.”
“네. 맞아요.”
격하게 동의한다는 표현으로 고개도 같이 끄덕여줬다. 주간 미션 때문에 하는 건 맞지만 그건 동기부여일 뿐이다. 애초에 난 춤과 노래 다 좋아했으니까.
전생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는다면 무대 위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가장 아팠지만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포기 못 한 거였고.
그러니 지금 내가 얼마나 신나겠는가. 멤버들이 보이는 귀여운 적대감은 가볍게 무시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매일이 즐겁다. 백강현은 날 물끄러미 보더니 고개를 까딱이면서 말했다.
“춰봐. 도와줄 테니까.”
“와! 고맙습니다.”
마음 바뀌기 전에 재빠르게 지금 나오는 구간의 춤을 췄다. 백강현은 중간중간, 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히 조언해줬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고칠 점투성이였다는 소리다.
나도 안다. 내 눈에도 보인다고. 하지만 남의 입으로 들어야 효과 있는 걸 어떡해!
***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지금 내 춤 스탯으론 절대 S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백강현의 코칭 덕분에 C+에서 B-로 올라간 게 놀라웠다. 몇 시간 만에 경험치가 무려 180이나 올랐다는 의미다.
보컬 쌤한테 트레이닝 받을 때와 비슷한 성장 폭이었다. 이유는 짐작 갔다. 백강현이 짚어주는 포인트들은 그만큼 완벽했다. 전생의 댄스 트레이너보다 훨씬 나았다.
“이해력 좋네. 박자감도 좋고. 말하는 대로 잘 따라와. 어설프고 체력은 좀 부족해 보이지만.”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헉헉거렸다. 체력 수치가 낮아져서 일부러 더 힘든 척하는 중이었다.
“연습실에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동안 왜 안 왔어?”
“보컬 연습했어요. 잘 부르고 싶어서.”
“춤 좋아한다며?”
“저 춤이랑 노래 다 좋아하는데요. 욕심부리면 안 돼요?”
대답은 없었다. 난 그냥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500밀리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목이 말라서 체력이 더 안 차는 느낌이다. 물을 보충해주자.
“아! 그런데 형.”
내가 부르자 백강현의 고개가 삐딱하게 내 쪽으로 기울였다. 부르면 부르는 대로 반응도 잘해준다. 처음 봤을 때도 나름 인사를 해주긴 했었지. 고개만 까딱한 거지만.
“저 왜 싫어하시는 거예요? 형도 그……. 이전 리더분 때문에 저 싫어하세요?”
아, 나 이름 또 까먹었네. 뭐였지. 재훈인가 준환인가. 괜히 잘못 부르면 뭐 하니까 이전 리더로 퉁 치기로 했다.
“내가 왜 널 싫어해?”
메인 미션에 싫어한다고 되어 있던데. 아니야?
“아니에요?”
“어. 너한테 관심 없어.”
“아하.”
그냥 무관심이면 싫어함인가. 차라리 관심 없는 게 훨씬 낫긴 해. 백강현은 중립으로 돌리기 쉽겠다. 그나마 한 명이라도 꽁으로 먹는 게 어디야. 그런데 따지고 보면 중립이 곧 무관심 아닌가. 알쏭달쏭하네.
“왜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싫어하길래요.”
“난 멤버들한테 관심 없어. 널 싫어할 이유도 없고.”
“그렇구나.”
체력이 조금 차올라서 다시 일어났다. 춤이랑 노래는 체력이 많이 소모될 것 같은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내가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체력은 심리 상태를 착실하게 반영하니까.
나는 다시 연습에 매진했다. 관심 끊은 줄 알았던 백강현이 중간중간 한 번씩 코칭해줬다. 고맙게 받아먹으면서 경험치 올리는 데 한창이었을 때, 벌컥 연습실 문이 열렸다. 강아지 형이었다. 아, 또 이름 까먹었네. 나는 다시 미션 창을 보고 이름을 확인했다. 박유찬이군.
“안녕하세요.”
손등으로 땀을 닦아낸 뒤 인사했다. 박유찬은 날 보고 멈칫하더니 생글거렸다. 여우인가. 싫어하고 있으면서 잘도 날 보고 웃네. 카메라 앞에서 완벽하게 연기해 줄 타입이었다.
“안녕하세요. 하온 씨. 춤 연습하시나 봐요.”
“네. 오후에는 보컬 트레이닝 받기로 해서 점심까지 하려고요. 제가 어린데 말 편하게 하세요.”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은 여전했지만, 언뜻 싫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나 싫어하는 건 귀신같이 안다. 박유찬의 시선이 백강현에게 짧게 닿았다가 내게 돌아왔다.
“그래, 네가 막내니까 그래야겠지. 강현이랑 둘이 있었어?”
어조는 부드럽고 상냥했지만, 데뷔 조 멤버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준다는 뉘앙스였다.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타입이다. 이 사람은 여러모로 느낌이 좋네. 비즈니스 관계로 잘 지낼 수 있겠다.
“네. 제 춤 봐주고 있었어요.”
“……그래?”
이번에는 대놓고 고개를 돌렸다. 대답을 요구하는 시선이었다. 백강현은 작게 한숨 쉰 뒤 몸을 돌려버렸다. 명백한 무시에 박유찬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날 볼 때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나도 웃는 얼굴 잘 만드는데 저 사람도 만만찮다.
“힘들지 않아?”
“네. 할 만해요.”
“……그래.”
대화가 뚝 끊겼다. 박유찬은 가방을 내려놓고 몸풀기를 시작했다. 유연한 몸이 쫙쫙 잘도 접혔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
“저요?”
“응.”
“네, 물어보세요.”
박유찬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고민했다. 그러다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날 봤다.
“대표님이 너한테 뭐라고 하면서 데려온 거야?”
얘는 뭔가 감 잡은 모양이지?
“제 외모가 매력적이래요. 시선을 잡아끈다고. 아이돌 관심 있으면 오디션 한 번 보러 오라고 하셨어요.”
“어디서?”
“회사랑 가까워요. XX카페요.”
“사실이야?”
“네. 저 그 카페 한 2주 다녔어요. 명함 받을 때 알바 누나도 봤으니까 원하신다면 확인시켜드릴 수 있어요.”
박유찬의 질문이 멈췄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너 원래 노래 불렀어?”
날 향한 속눈썹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마치 내게서 듣길 원하는 답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게는 거짓말할 이유가 없으므로 솔직하게 말했다. 믿거나 말거나.
“취미로요. 캐스팅될 땐 노래나 춤 잘 추냐고 안 물어보셨어요. 오디션 볼 때도 가르쳐 줄 테니까 부담 없이 편안하게 하라고 하셨고요.”
박유찬이 눈에 띄게 굳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 속 동공이 흔들렸다. 입술이 더듬거리듯 붙었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숨을 토하는 사람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정말. 아니, 그럴 리 없어.”
박유찬이 비틀거렸다. 휘청거리는 게 위험해 보여서 팔을 뻗었는데, 화들짝 놀라면서 내 손을 쳐냈다. 제 손을 내려본 박유찬의 눈동자가 스스로의 행동에 놀란 듯 크게 뜨였다. 그러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미안, 하고 사과하면서 뛰쳐 나가버렸다.
“또 저러네.”
백강현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또요?”
“신경 쓰지 마. 감정관리 안 되면 저러니까. 알아서 추스르고 돌아올 거야.”
가뜩이나 신경 쓰이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더 신경 쓰인다. 신경 안 쓰길 바란다면 아무런 액션도 하지 말아야지. 이건 뭐 신경 써달라고 고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뭔지 몰라도 혼자 추스른다는 거, 그거 되게 힘든 거다. 꼭 개미지옥에 빠진 것처럼 끌려 들어가거든. 한 번 가라앉으면 밑바닥까지 떨어져야 다시 기어 올라올 수 있더라. 나는 그랬다. 저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디 있는지 알아요?”
“가보게?”
“네. 저 때문인 것 같아서.”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준재혁 추종자라 그런 거니까.”
“그래도요. 알면 알려주세요.”
모르면 뒤져 봐야지. 일단 체력 회복 조금만 하고. 생수통을 집어 들어 남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5번 보컬룸.”
얘도 거짓말쟁이네. 팀원한테 관심 없니 어쩌니 하더니 알건 다 알잖아. 관심 없다면서 춤 알려 달라니까 알려줘, 내 잘못 아니라고 위로도 해줘, 궁금하다니까 결국 어디로 갔는지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우호도가 중립으로 바뀌면 꽤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나쁘지 않고. 미션이 걸려 있으니 이왕이면 중립 부탁해요!
“고마워요, 형. 덕분에 많이 배웠어요. 다음에도 기회 되면 저 좀 봐주세요!”
“……나한테 더 배우려고?”
“어, 형만 괜찮으면요?”
백강현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봤다. 뭔가 물음표가 담겨 있는 표정이다. 내가 한 말 중에 이상한 게 있었나? 꽤 확실하게 말한 것 같은데.
“흐음. 오늘은 다시 안 올 거?”
“올 건데 형 없으면 어떡해요. 인사는 해 놔야지.”
“난 계속 여기 있어.”
다시 오면 춤 봐준다는 거 맞지? 그런 뉘앙스라 나는 활짝 웃으면서 경쾌하게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하고 덤덤하게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곧장 5번 보컬룸을 향했다. 어차피 싫어하는 거, 뒷일을 걱정할 필요 없는 관계였다. 잃을 게 없다는 건 뭐다?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이다. 피차 바닥을 보이더라도 상관없는 사이라는 의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