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저, 저기. 진수야. 폭력은…….”
커다란 덩치와 대조적으로 유순한 인상의 남자가 주춤주춤 끼어들었다. 이목구비가 꼭 곰돌이 같았다.
“야, 박정태. 네 눈깔은 장식이냐? 너한텐 이게 폭력으로 보여? 그냥 붙잡은 게 다잖아? 이게 폭력이면 세상 모든 손잡이는 잡는 게 아니라 후드려 패는 거겠다?”
그런 건 모르겠고 곰치야. 내 체력이 깎이고 있단다. 체력 시스템 민감도 조절 못 하나? 뭐 이렇게 훅훅 깎여. 타인에 의한 일방적 신체 접촉은 배로 떨어지게 해 놓은 건지.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꺼져.”
곰치가 다시 날 봤다. 곰돌이는 그대로 물러설 모양인가 보다. 그러면서 애처로운 눈으로 날 봤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데? 난 도와 달라고 한 적도 없고, 기대한 적도 없다.
지금 내가 피하고 싶은 건 단 하나.
상태 이상 터지는 것뿐이다. 연달아 이틀은 곤란하다. 그랬다가는 내 데뷔가 무산될지도 모른다. 너무 자주 터지면 폭탄밖에 더 되냐고. 실장님도 두 손 두 발 들고 손 뗄지 몰랐다. 그건 싫다.
신체 접촉만 좀 피해 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체력이 안 깎이는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느리게 빠질 거 아냐. 집 버프도 있으니까 플러스마이너스 제로가 될지도 모르고. 집에서는 상대적으로 빨리 차거든. 일단 여기도 집은 집이니까 기대해 볼 만 했다.
“이거 놓고 얘기하는 게 어떨까?”
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정말 상냥하게. 그런데 왜인지 곰치는 더 화가 났다. 악력이 더 강해졌다. 아, 아프다고!
“네가 하라고 하면 내가 해야 하냐? 네까짓 게 뭔데? 어디서 이딴 건방진 새끼가 기어들어 와서 데뷔 조에 들어가? 너 따위가 재혁 형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나야 모르지. 난 그냥 캐스팅된 것뿐인데 나한테 화풀이하면 억울해.”
“니 새끼 태도 봐! 미안한 기색도 없고, 아주 당당하잖아! 화풀이가 아니라 정당한 분노다, 이 씨발놈아!”
입이 너무 험한데. 왜 저렇게 욕을 하지? 아이돌 되려고 연습생 생활하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넌 아이돌 데뷔하더라도 사고치고 사과 편지 쓸 상이다. 꼭 그런 거 있잖아. 방송 종료 안 된 거 모르고 욕하다가 욕한 만큼 욕먹는 애들. 아니면 폭행 가십 터지거나.
아, 체력 떨어진다. 큰일 났다. 어쩔 수 없으니 여기서는 좀 엎드려줘야겠다. 일단 접촉부터 피하자고. 남자끼리 들러붙어서 좋을 게 없어. 내 체력만 빠지지.
“알았어. 미안해. 그러니까 이것 좀 놔 줄래?”
아, 이 정도면 훌륭하다. 엄청나게 엎드렸다. 자 빨리 놔라! 놔! 놓으라고! 놔놔놔!
“개 같은 새끼가!”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가 수그러들었다. 아, 나 배 맞았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해 잡힌 건 풀렸는데 대신 배를 맞았다.
체력이 한 번에 10이나 쑥 빠졌다. 데미지가 크군. 체력 빠진 거에 비해서 아프지는 않았다. 물 주먹이네. 그래, 차라리 이거 한 방이 낫다. 도트형 디버프 걸린 것처럼 찔끔찔끔 체력 빠지는 것보다 훨씬 낫지.
“진수야!”
곰돌이가 출동했다. 곰치가 무시무시한 눈길로 날 노려봤다. 그래도 안 무서운데 어떡하냐. 세상에 죽이겠다고 욕하는 사람치고 정말 죽이려고 달려드는 놈은 없더라. 다들 자기가 소중한 거야. 그러니 암만 노려봐도 여기가 내 무덤은 아닐 테니 무서울 리 없지.
저 봐봐. 곰치도 더는 못 하잖아. 말리는 곰돌이한테 어쩔 수 없이 참는 시늉하는 것 좀 봐라. 더 때렸다가 잘릴까 봐 무서운 거지. 실장님한테 예쁨받는 데뷔 조 멤버니까 더는 못 건드려. 이걸로 됐다. 우리 사이 청산. 오케이?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서 다시 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2층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인 단출한 방이었다. 한 방에 4명씩 12명이 사는 건가? 바글바글하더라니.
왼쪽 1층의 빈 침대라고 했지. 이번에는 가방을 내려놓을 때까지 아무도 나를 잡지 않았다. 체력 회복이 시급했다. 괜히 씻겠다고 나갔다가 또 말려들면 상태 이상 터질지도 모른다. 남은 체력이 고작 5였다.
아슬아슬했네. 잠이나 자자.
씻는 건 내일 아침에 하거나 회사에 있는 샤워실로 가야지. 푹 자고 일어나면 체력 회복되어 있겠지.
무작정 누워 눈을 감으니 그래도 솔솔 잠이 왔다. 그렇게 가물가물 잠들기 직전이었다.
“……이래도 될까? 진수 형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재혁 형이 진수 형 예뻐했잖아. 말 잘 들어야 한댔어.”
“근데 솔직히 쫓겨날 만하니까 쫓겨난 거 아냐? 이유 없이 쫓아낼 분들이 아닌데.”
“야, 너 그 말 진수 형 앞에서 할 수 있어?”
“……못하지.”
“그럼 얌전히 있어. 입 다물고, 우리는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응…….”
방에 들어온 콩나물 몇 명이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 소음은 내 숙면을 방해할 수 없었다.
***
체력 120!
빠방하게 채워진 수치를 보면서 흡족하게 웃었다. 여기 애들은 다 게으른지 아침 7시인데도 쿨쿨 퍼 자고 있었다. 아침에 샤워하면서 보니까 다행히 어제 맞은 데는 멍도 안 들고 깨끗했다. 아프지도 않았고.
이 정도로 체력 10이 빠졌으면, 제대로 맞으면 바로 상태 이상 아닌가? 몸 좀 사려야겠네.
느긋하게 움직였는데도 어째 일어나는 애가 한 명도 없었다. 아파트 1층으로 나오자 여학생 몇 명이 공용 현관 앞에서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에 홍조가 피었다.
“오빠도 연습생이에요?”
겁도 없이 바짝 다가와 묻는다. 카페에서 조심조심 물어보던 여학생과는 전혀 다른 과감함이었다. 내가 대답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당당한 태도는 덤이었다.
“제가 오빠예요?”
“몇 살인데요?”
“열여덟이요.”
“어! 그럼 내가 누나네. 열아홉이거든.”
“아하.”
그렇군. 쓸데없는 정보를 얻었다. 머릿속에서 치워낸 뒤 버스 정거장을 향해 걸었다. 아침에 연습생들 나르는 차가 온다고는 들었지만, 다들 게을러서 퍼질러 자는 중이다.
언제 출발할지 모르니 나 혼자 가는 게 속 편하고 좋았다. 아침부터 기 싸움에 휘말려 체력 깎이는 것도 싫고.
“저기, 이름이 뭐야? 처음 보는데 오늘 첫날이야? 왜 대답 안 해? 너 좀 시크한 편? 아니면 나 무시해?”
아니, 신님. 이유 없이 절 싫어하지 않을 거라면서요. 여기도 딱히 다를 게 없어요. 실장님이랑 보컬 쌤 빼고는 전부 내 적이었다. 적으로 가득한 세상은 어딜 가나 똑같아.
“저 낯가려요. 죄송해요, 누나.”
“어, 응? 그래? 낯가려?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옆에 있으면 불편해?”
“……조금요.”
“알았어. 그럼 나는 갈 테니까 잘 다녀와. 언제 돌아와?”
“……몰라요.”
“응응. 알았어! 기다릴게!”
뭘 알았다는 거고, 왜, 어디서 기다린다는 거지? 여학생은 힘차게 팔을 흔들더니 같이 서 있던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아오! 귀여워! 낯가려요, 누나. 이러는데 어색해하는 거 대박 귀여워! 볼따구 왕왕 깨물어주고 싶다…….”
“그래서 처음 온 거 맞대? 연습생 맞대?”
“몰라. 못 들었어.”
“왜? 그거 물어보러 간 거 아냐?”
“아기가 불편하다는데 어떡해? 내가 비켜줘야지.”
“……그 새 감겼냐?”
“어. 완전.”
내가 아기인가. 고작 한 살 차이인데 아기 취급은 조금 그렇네. 이래 봬도 나 전생에선 27년이나 살았는데.
조용한 아침,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서 묵묵히 걷는 내게 대화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시비 안 거는 게 어디냐. 싫어하는 것보다는 낫지. 정정할게요. 이유 없이 미워하진 않나 봐요.
***
숙소에서 회사까지 버스 한 번이면 해결됐다. 그것도 10분밖에 안 걸린다. 이동 시간이 짧아지니 그만큼 연습할 시간이 늘어서 좋았다.
오늘부터 주간 미션을 위해 댄스 연습을 할 생각이다. 그리고 오후에는 보컬 쌤이랑 10시까지 있어야지. 댄스보다는 보컬에 계속 집중해서 경험치를 올려야 했다. 메인 미션이 막혔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A- 찍으니까 경험치 올라가는 속도가 B의 세 배는 느려진 것 같았다. 요구 포인트 차이가 세 배였으니 그런 개념인가? 은근히 밸런스가 잘 잡혀 있단 말이야.
3층에 도착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연습실을 둘러봤다. 데뷔 조는 3번 연습실이다. 아직 아무도 없었다. 컴컴한 연습실의 불을 켜고 노래를 골랐다. 노래는 보컬 쌤과 스탯 덕분에 진작에 S등급을 받아놨다. 춤은 여전히 골치였지만.
정 안되면 더블 포인트를 포기하기로 했으니 일단 댄스 B등급 받는 걸 목표로 춰보자. 나중에 예능 나갈 것까지 고려해서 유명한 댄스곡을 하나씩 독파하는 중이다.
이어폰을 낀 채 노래를 틀고 열심히 춤추고 있을 때였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처음 만났던 날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보며 삐딱하게 서 있던 조각남이 서 있었다. 이름이 뭐더라.
메인 미션을 열고 이름을 확인했다. 백강현.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창을 닫으려는데 이서호의 호감도가 ‘매우 싫어함’에서 ‘싫어함’으로 바뀌어 있는 게 보였다.
언제 바뀌었지? 전혀 몰랐네.
예상보다 빠르게 중립으로 바뀌겠어. 근거 없는 희망 회로를 돌리면서 다시 내 춤에 집중했다. 모르는 사람이라 할 말이 없어. 저쪽도 딱히 말 걸 생각은 없는 것 같고.
평소 하던 대로 연습하는데 거울 속 내 모습이 참 볼품없었다. 집에서는 거울이 없으니 다 끝나고 한숨 쉬었는데 지금은 실시간으로 흑역사를 적립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데다가 바로 옆에는 아주 멋들어지고 파워풀하게 춤추는 백강현이 있었다. 비교되고 좋네.
아, 그렇지. 보컬도 코칭 받으면서 좋아졌으니까 당연히 댄스도 그렇지 않겠어? 지금 내 옆에는 무척 실력 좋은 메인 댄서가 있잖아. 말 꺼내 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저기요. 형.”
결정했으면 실행. 곧바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무뚝뚝한 백강현은 날 힐끔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팍팍하시네.
“저 춤 연습 도와주실 수 있어요? 그냥 몇 마디 조언만 좀 해주셔도 좋은데.”
“……내가 왜.”
“이유는 없긴 하죠. 되게 잘하시길래 그냥 물어봤어요. 싫으면 어쩔 수 없고요.”
나는 결단력이 빠른 만큼 포기도 빠른 사람이었다.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거부당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익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