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어디 보자.
지금 내 포인트가 2,340.
어제 B로 올리자마자 그 난리가 벌어진 덕에 현재 경험치는 0이었다. 2,100포인트를 투자하면 A-까지 올라간다. 원래는 A-까지 쌤한테 배우면서 올리고, 그동안 모은 포인트로 단숨에 A까지 올릴 생각이었다.
당연히 등급이 올라갈수록 경험치 차는 속도는 느려진다. 똑같은 경험치 500을 얻는다고 했을 때 B보다 A가 훨씬 오래 걸릴 거니까. 그래서 일부러 모아두고 있었는데…….
메인 미션이 요원해 보이니 빨리 포지션 확정받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왠지 느낌이 안 좋단 말이야.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쓸 수 있는 거 아끼다가 똥 되는 건 사양이므로 계획 수정이다. 극한의 이득을 못 보는 건 아쉽지만……. A급이면 막 꿀리진 않겠지?
S급을 솔로 가수 실력이라고 가정하면 A-는 성장하는 신인 아이돌 메인 보컬 감으로 봐줄 만하지 않을까. 일단 올리고 주변 반응을 살펴보면 알겠지.
더 고민하지 않고 2,100포인트를 투자해서 보컬을 A-로 올렸다. 그러고 나니 문제가 생겼다. 주간 미션이 바뀌었다.
<주간 미션>
─ 노래 1곡 S등급 받기 (0/1)
─ 댄스 1곡 B등급 받기 (0/1)
O 노래와 춤을 같이 해서 S등급 받는 경우 포인트 2배 획득
O 성공 시 포인트 10 획득
O 실패 시 다음 주 미션 진행 불가
춤……. 춤을 올려야 한다. C+로는 S등급은 절대 불가능했다. 남은 포인트가 240이라 춤도 못 올린다. B-로 올리려면 400이나 필요하다고!
주간 미션 바뀐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아! 취소! 승급 취소! 포인트 회수! 재배치!
이리저리 불러봤는데 시스템이 잠잠한 걸 보니 안 되나 보다. 아, 실수한 느낌인데. 아으, 어쩔 수 없지. 이미 투자했으니……. 그렇다고 이번 주 미션을 포기할 순 없다.
일단 도전해 보고 안 되면 따로따로 해서 10포인트라도 챙기자. 다음 주까지 말아먹을 순 없어. 노래 A- 수준이 어떤지나 확인해 보자. 예상 이하면 손해가 큰데……. 괜찮겠지? 빨리 보컬 쌤 보러 가야지.
***
“쌤!”
“하온이 또 왔어?”
“네! 근데 쌤.”
“응?”
“제가 계속 시간 뺏어도 되는 거예요?”
아까 멤버들이 다 같이 연습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궁금해서 물어봤다. 쌤은 자리에 앉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데뷔 조 애들 봐주고 있었는데, 당분간은 널 우선시하기로 했어.”
“아하.”
이러니 더 낙하산으로 보이지. 생각해보니 나 합격하고 쭉 보컬 트레이닝만 받았다. 오해가 겹겹이 쌓이고도 남을 조건이었다. 게다가 선생님까지 데뷔 조 쌤이었을 줄이야.
나는 오디션 때 심사 하셨던 분이라 내 담당이 된 줄 알았는데. 하긴. 나도 데뷔 조니까 그랬겠구나 싶지만…….
멤버들에게 나는 박힌 돌 강제로 뽑아낸 자리에 굴러 들어온 돌이었다. 그거로도 모자라 남은 돌 돌봐 주던 사람까지 뺏겼으니 얼마나 싫겠어. 이해한다. 이유가 있으면 나도 납득한다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껏 독점해야지.
“그럼 저 더 봐주세요!”
“그래그래. 어디 한 번 신나게 불러봐.”
“예에!”
잽싸게 부스 안으로 들어가 헤드셋을 끼고 마이크 앞에 섰다. 쌤이 신호를 줬다. 내내 연습했던 노래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A-의 효과는 굉장했다. 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커다랗게 뜨인 눈 만큼이나 입도 떡 벌어졌다. 일시 정지된 것처럼 서 있는 쌤을 보니 뿌듯하다. 이쯤 되니까 확실히 내가 듣기에도 들어줄 만했다. 그래도 전생의 내가 더 잘 불렀다.
수치로 확인할 수 없어서 몰랐지만, 지금의 나랑 비교해 보자면, 전생에는 A나 A+쯤 되지 않았을까.
“……아, 아니……, 아니, 잠깐. 아니, 하온아? 무슨 일이 있었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고음 낼 때 조금 불안하던 것도 완전히 사라졌고, 훨씬 매끄러워졌어! 싸비에서 한 번씩 음이탈 나던 것도 다 사라졌고! 원래 하온이가 감정 전달 하나는 기가 막히는데 그새 더 깊어졌네? 막 내 마음에 들어와서 콱콱 때려 박는데 무슨 최면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끌려 들어간단 말이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렉 걸렸던 캐릭터가 다시 움직이는 것처럼 더듬거리던 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나는 턱을 치켜들고 웃으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저 잘했죠? 제가 들어도 이번에 되게 잘 부른 것 같은데!”
“잘했어! 엄청 잘했어!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게? 말도 안 돼. 내 귀로 안 들었다면 절대 못 믿을 것 같아.”
똥그랗게 커진 눈이 쌤의 감정을 여과 없이 내비쳤다. 스탯 아니었다면 당연히 이럴 순 없지. 이건 나만의 특권이었다. 나는 어깨를 당당하게 편 채로 뿌듯하게 웃었다. 올리길 잘했다!
“우리 하온이 완전 재능 덩어리였네. 대표님이 진짜 보는 눈 있으시다. 어떻게 알고 널 캐스팅하셨다니.”
“에헤헤. 칭찬 들으니까 좋네요.”
우리 애도 좋지만, 우리 하온이도 좋다. 내 앞에 ‘우리’라는 단어를 붙여주는 게 좋았다. 같은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라서.
“근데 진짜 못 믿겠다. 어떻게 하루 만에 이렇게 달라졌지.”
“앞으로 더 잘할 거예요! 쌤 수제자 자리 노리고 있거든요!”
“이미 하온이가 된 것 같은데?”
“히히.”
기분 좋게 웃으면서 쌤이 떠먹여 주는 칭찬의 샘에서 허우적거렸다.
“진짜 가르치는 보람 있다. 조금만 더 하면 완벽하겠어. 지금 감 잡은 것 같은데 좀 더 해볼까?”
“네!”
열정적인 쌤의 코칭이 시작됐다. 칭찬은 지금을 위한 추진력이었을 뿐이다. 쌤의 ‘조금만 더’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S+가 아닐까?
내가 서호한테 떠먹여 줬던 칭찬은 전부 보컬 쌤에게서 배운 거였다. 칭찬과 함께 날아드는 따끔한 지적은 좀 아팠지만, 이게 다 경험치가 되는 거니 새겨들어야지.
그렇게 밤 10시까지 보컬룸에 콕 박혀 있었다. 실장님이 미성년자는 집에 갈 시간이라면서 날 데리러 오셨다.
보컬쌤이 호들갑 떨면서 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 자랑했다. 나는 실장님 앞에서도 멋들어지게 한 곡조 뽑아냈다. 쌤과 비슷하지만, 훨씬 얌전한 버전의 칭찬과 감탄을 들었다.
아주 기분 좋군요. 오늘 하루 평점을 내리면 10점 만점에 10점입니다.
***
……오늘 하루 평점을 10점 만점에 5점으로 수정한다. 전부 숙소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 드글드글했다. 실장님 앞에서는 ‘네네.’ ‘잘해줄게요.’ ‘걱정 마세요.’ 따위를 연발하더니 나만 덩그러니 남는 순간 돌변해 두 얼굴의 사나이들이 됐다.
숙소는 악명 높은 출근길 지옥철과 다름없었다. 아주 그냥 남자들이 빽빽하다. 사람들 틈에 끼어서 좋았던 경험이 없기도 했고, 유일한 내 편인 실장님마저 사라진 탓에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이 호구 같은 성격은 언제 고쳐지려나. 고칠 수 있긴 한 건가. 너무 뼛속 깊이 박혀버린 방어기제라서. 쩝.
얘네들도 날 싫어하는 이유가 명확하겠지? 연습생 생활하는 거 전부 데뷔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내가 하늘에서 콕 떨어졌으니까. 어쩌면 준형인지 지훈인지 하는 남자의 영향이 얘들한테까지 미쳤을지도 미쳤을 수도 있고.
보통 그런 식으로 사람들 휘어잡고 있는 리더 타입은 싸잡아 내 편으로 만들더라고. 주도적으로 날 괴롭히던 놈들의 헤드 중에도 있었다. 가장 악질적인 놈이.
여기서도 괴롭힘당하려나. 내 체력이 좀 걱정되는데. 다 좋은데 체력 시스템 하나가 별로다. 기본 체력이 낮은 건 이해한다. 성장 속도가 두 배의 탈을 쓴 네 배니까. 하지만 상태 이상은 너무하잖아.
내가 고른 거니 누굴 탓할 수도 없다. 내 성격상 자세히 써줬다 하더라도 ‘그래도 성장 속도 버프는 못 참지!’라면서 골랐을 테니까.
그래. 뭐든 밸런스가 중요하지.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는 거다. 받아들이고 헤쳐나갈 방법을 연구하는 수밖에.
“야.”
“어.”
야라고 부르길래 어라고 대답했는데 왜 쌍심지를 켜지. 자고로 말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랬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도 못 들어봤나.
‘하온아.’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건 꿈도 안 꾼다. 같은 ‘야.’라도 시비 걸기 위한 어조와 그냥 부르는 어조는 다른 법이었다. 얘는 명백히 전자였다.
“건방진 새끼네, 이거.”
이번엔 혼잣말인 것 같아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실장님이 알려주신 내 방으로 향했다. 가방 내려놓고, 씻고, 옷 갈아입고 바로 잔다. 그게 내 체력 회복의 지름길이다. 쓸데없이 입씨름할 시간 없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어깨가 거칠게 붙잡혔다. 어깨를 붙잡아 온 녀석이 내 몸을 확 돌려세웠다. 아니, 손버릇 나쁜 애들이 왜 이렇게 많아? 이서호는 귀엽기라도 하지. 이건 뭐 곰치 같은 게.
이름도 모르는 너는 앞으로 곰치라고 불러주마. 알려줘도 소용없어. 기억 못 해. 내가 이서호 이름도 헷갈렸는데 네 이름을 알겠냐. 솔직히 이서호 빼고 데뷔 조 멤버들 이름도 지금 다 까먹었다.
“아파.”
꽉 잡힌 어깨에서 통증이 일어 인상이 찌푸려졌다. 손 좀 떼어 내려고 꽉 움켜잡았지만, 꿈적도 하지 않았다. 나 너무 비리비리한가. 하지만 운동도 다 체력인걸……. 운동에 쓰기엔 체력 떨어지는 게 너무 아까웠다.
“아파? 아파아? 씨발, 이 새끼 아프다는데?”
곰치가 다른 애들을 보고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 그러게. 웃기다.’ 하고 어설프게 동조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움찔거리면서 눈치 보는 걸 보니 곰치가 대장이군.
“아파? 아프냐고? 어?”
아프니까 아프다고 하지. 뭐 문제 있나? 하긴 내가 뭐 세상 창의적으로 시비 거는 애들 한두 명 만나봤나. 이런 애들 특징은 숨만 쉬어도 재수 없다고 쥐어패는 거였다.
이게 바로 창조적 시비다. 시빗거리가 없어도 억지로 만드는 애들. 내가 뭔 짓만 해도, 무슨 소리를 해도 싫은 거다. 그러므로 나는 하고 싶은 말 다 하며 살았었다. 어차피 맞을 거 할 말이라도 해야지.
그 생각은 인생 2회차인 지금도 변함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