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로의 출발 (5)
1792년 2월 10일.
프랑스 혁명왕국, 툴롱 항.
툴롱에 입항한 HMS 아가멤논과 열두 척의 영국 군함에서 내린 수병들은 배를 수리하고 물자를 나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관리를 했건만 기어코 배 밑바닥에 집을 지어놓은 따개비를 쇠고랑으로 긁어내고, 바람 때문에 찢어진 돛을 짱짱한 새 걸로 갈아 끼우며.
바다에서 먹을 식수, 염장고기, 쉽 비스킷으로 가득 찬 나무상자를 배 안에 실었다.
아, 그 무엇보다 뱃사람들에게 중요한 알코올이 든 오크통도 빠뜨릴 수 없다.
비록 영국산 위스키나 럼주는 아니어도 저번 정박으로 실었던 프랑스 코냑이 먹을 만하더라는 평이 많은 지중해 함대였다.
뭐. 사실 나무로 만든 배 안에서 어떻게든 곡식에서 술을 증류해 만들어보겠다고 불까지 피우는 선원들 주제에, 무슨 술을 마다하겠느냐마는.
마지막 정박이었던 지난해 10월로부터 두 달 간 지중해와 몰타를 떠돌아다닌 바람에 바닥을 보이던 지중해 분견함대의 물자창고 안이, 하나 둘 보급품으로 넉넉하게 가득 차기 시작했다.
“로널드! 뭐해? 후딱 끝내고 포도주나 마시러 가자고!!”
“야 멀대, 나는 저번에 만났던 아리따운 숙녀 분을 뵈러가야 해서 오늘은 안가.”
“숙녀는 지랄. 우리처럼 바다 비린내 나는 놈들한테 그런 사람이 꼬이겠냐? 꿈 깨 병신아. Leave her johnny, leave her. 그 엿 같은 노래 매일 일할 때 부르면서 그것도 몰라?”
“쯧쯧. 하여간 더비 출신 촌놈들이란 낭만이 없어요, 낭만이. 그리고 니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 건 네놈이 안 씻어서 그런 거거든? 난 안 난다고. 그러니까 나까지 더러운 네 축에 끼우지 마라.”
수병들이 어서 작업을 끝내고 항만 주점과 여자를 만나러 몸이 달아 있을 때, 장교들은 우아한 손짓과 함께 마부에게 웃돈을 주고서 툴롱 시내 안에 자리한 고급스러운 클럽이나 카페로 뜨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조그마한 분견함대지만, 나름 함대장이라는 직함에 알맞게. 호레이쇼 넬슨 대령은 항만장인 샤를 드 툴롱이 직접 나와 대접을 해주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함대장님. 이걸로 두 번째 정박이시군요.”
“하하, 식사 때문에 한 번 더 들렸습니다. 확실히 프랑스 식사가 영국 식사보다 훨씬 나아서 말입니다.”
“허허, 함대장께서 그렇게 좋아해주시니 이 사람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려. 자, 미리 마차를 준비해두었으니 어서 가시지요. 보나파르트 장군도 저택에서 함대장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나파르트 그 친구가 말입니까? 이것 참, 기대가 되는군요! 오늘도 밤새서 보나파르트와 함께 달려야겠습니다. 하하!”
호레이쇼 넬슨은 중년의 항만장이 내민 손을 흔쾌히 맞잡으며 얘기했다.
그리고 항만장 샤를 드 툴롱은, 그렇게 호방하게 웃으며 마차에 오르는 영국인 사내가 참으로 반갑기 그지없었다.
‘기욤아, 고맙구나. 네가 이 툴롱과 아비를 먹여 살리는구나!’
군항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툴롱의 가장 큰 수입원은 해군 장병들이 소비하는 돈과 물자였다.
그러나 지난 4년 간 일어난 일이 보통 일이었나, 저 멀리 수도 파리와 베르사유에서 왕이 두 번이나 바뀌고 국민을 쥐어짜 부귀영화를 누리던 고약한 귀족들과 법관들이 무더기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쫓겨나는 대사건 아니었나.
파리사관학교 출신 육군 장교들은 기욤 그 아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원래 개방적이었는지 많이들 혁명에 협조한 반면.
폐쇄적인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해군 장교들은 혁명에 기겁을 하고 해외로 튀어버린 지 오래였다.
배가 있더라도 사공이 없으면 어떻게 띄울 수 있겠나.
결국 한 줌 남은 프랑스 해군은 가장 중요한 카리브 해와 동인도 제도를 잇는 무역선들을 지키기 위해 칼레, 브레스트, 툴롱 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프랑스 해군의 군항인 툴롱은 혁명 이후 침체기에 빠져 있었다.
해군 수병들에게 술을 팔던 주점과 음식점들은 문을 죄 걸어 닫고, 기껏 재배한 포도주도 부어라 죽어라 마실 사람이 없으니 포도주 창고에 반강제로 묵히는 꼴이 되어버렸다.
물론 아들이 프랑스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인사고, 본인도 어디 가서 빌어먹고 살만큼 쪼들리지는 않던 샤를에게, 잠시 동안의 불황은 그리 큰 타격이 아니었지만.
십 수 년 만에 항만장으로 재취임해 툴롱 항 전체를 책임지게 된 샤를에게는 그보다 더 큰 재앙이 없었다.
자칫하면 툴롱 시민 수만 명에게 욕지거리를 먹고 쫓겨날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영국 군함 열 두 척, 그것도 프리깃이나 조그마한 함 따위가 아닌 움직이는 요새라 부를 수 있는 전열함 열 두 척이 툴롱을 기지 삼게 되었다.
한 척만 해도 대략 오백에서 육백 명이 기본으로 탑승하는 전열함 말이다!
그런 전열함이 열 두 척이나, 사람으로 치면 육천에서 칠천 명이 가게로 밀려들어오니 툴롱은 순식간에 왁자지껄한 항구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활기를 띠었다고 해야 하나.
마차에 오르기 전, 샤를은 잠시 북쪽 하늘을 쳐다보고 흐뭇한 표정을 지은 후 마차에 올랐다.
아들, 기욤이 있는 파리를 향해 말이다.
***
“넬슨 대령님, 그거 아십니꺼? 저는 사실 영국 해군에 입대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더.”
“하하하! 아니, 그렇습니까? 그랬다면 보나파르트 준장님이 제 밑에서 복무했을 수도 있겠군요. 이야 이거 아쉬운데요. 보나파르트 준장님 같은 사람이 참모라면 죽을 때까지 안 놔줄 자신 있는데.”
넬슨 대령은 안타깝다는 얼굴을 짓고는, 맞은편에서 고기를 썰던 나폴레옹에게 말했다.
“이야, 이거 안 가길 잘했네예. 잘못했으면 함대장님 밑에서 과로사 했겠습니더.”
“과로사라니요, 보나파르트 준장께서도 상당한 일중독 아닙니까. 제가 겨우 일 몇 개 더 시켰다고 쓰러지지는 않으실 거 같은데요.”
“일, 일중독이라니. 함대장님, 저는 딱 해야 할 것만 하면 손 안대는 스타일입니더.”
“이보게 나폴레옹, 우리는 그걸 일중독이라고 부르기로 했네.”
“쿨럭 쿨럭! 큼큼!!”
샤를의 말에 나폴레옹은 헛기침을 하곤, 포도주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목 뒤로 넘겼다.
“어이쿠, 우리 일중독 보나파르트 준장님께서 사레가 들렸나보구만!”
“아이, 가주님!! 지한테 왜 그러십니꺼!”
“아, 미안하네. 혹시 내가 지역사령관 각하라고 불러주길 원하는 겐가?”
“에이... 마, 됐심더.”
“하하, 기욤 그 아이 친구 아니랄까봐, 삐지기도 똑같이 삐지는구만.”
하여간에 아직 스물 셋 밖에 안 된 총각 아니랄까봐.
반응이 이리저리 톡톡 튀는 게, 속이 시꺼먼 상인들과 항만에서 부대끼며 일하는 샤를은 이 출세한 젊은 장군이자 아들 친구를 골려주는 게 퍽 재미있었다.
“그보다 나이를 먹으면 먹는 양이 준다더니, 전 더 배에 안 들어가는군요. 함대장께서는 식사 맛있게 잘 하셨습니까?”
“아, 저도 다 먹었습니다. 항만장님 덕택에 오랜만에 즐거운 식사였군요. 보나파르트 준장님은 어떠십니까?”
“지도 다 먹었습니더.”
“그러면 이제 치우도록 하지요. 전 이만 올라가서 사무를 볼 테니, 함대장께서는 방에 들어가서 푹 쉬십시오. 항해가 참 고되지 않습니까.”
“배려 감사드립니다.”
넬슨은 식사 때문에 벗어놓은 군모를 쓰고 일어나며 말했다.
“넬슨 대령님. 잠시 얘기 좀 나눠도 되겠습니꺼?”
“아, 예. 가능합니다. 보나파르트 준장님.”
“감사합니더.”
두 군인은 복도를 지나 나폴레옹이 쓰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신데 저와 얘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러시아 문제로 잠시 나누고 싶은 말이 있어가, 이렇게 따로 불렀습니더.”
“······러시아라!”
넬슨의 미간이 미약하게 떨렸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시지예.”
“감사합니다, 준장님.”
두 군인은 방 한 가운데 놓인 테이블 옆 의자를 하나 씩 잡아 엉덩이를 붙였다.
나폴레옹은 넬슨이 앉자, 테이블 위에 말아놓은 지도를 스르륵하고 폈다.
“이건... 프랑스 남부와 지중해 지도로군요.”
“넬슨 대령님, 대령님은 러시아가 어디로 올 거라 생각하십니꺼?”
“······아무래도 육상으로 오지 않겠습니까. 러시아는 육군 강국이니 말입니다.”
넬슨은 메츠와 남부 프로방스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여러 나라가 뭉쳐 싸운 연합군이긴 하지만 ‘전쟁의 신’이라 불리던 프리드리히의 프로이센을 물 먹였던 러시아 육군이다.
만일 병신이었던 표트르 3세가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었다면 프로이센은 지도에서 지워졌겠지.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더.”
“러시아군이 육지로 오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나폴레옹은 넬슨의 질문에 별 다른 응답 없이 프랑스 밑에 자리한 지중해의 섬에 손가락을 짚었다.
프랑스보다 이탈리아에 가까운 거대한 섬, 코르시카 말이다.
“······코르시카라니, 설마 러시아가 상륙전을 펼치겠습니까?”
“프로이센은 정전협상을 맺었고, 오스트리아는 제 땅이 전쟁터가 되는 걸 원하지 않겠지예. 그라모, 러시아가 올 곳은 딱 하나입니더.”
“바다군요.”
넬슨은 턱을 쓸어내렸다.
***
1792년 2월 15일.
프랑스 혁명왕국, 파리.
극좌 잡지 <늙은이 뒤셴>의 사무실.
쾅! 쾅! 쾅!
“로베스피에르, 당통!! 이런 겁쟁이 놈들!! 이딴 쓰레기들을 동지라고 지금까지 생각해왔다니!!”
에베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책상을 연신 내려치며 말했다.
뭐? 안정되고 있는 프랑스가 혼란해질 수 있다고? 이런 부르주아들의 앞잡이 같은 놈들!!
국민의회니 하는 시답잖은 부르주아들의 역할 놀이에 끼여 놀아나더니 자신들이 가진 위대한 사명마저 잊어버린 건가?
“에베르 동지! 우리 코르들리에 노동자들은 언제든지 에베르 동지의 말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노동자 동무들의 혁명정신은 내 익히 잘 알고 있지.”
에베르는 붉은 천을 팔에 두르고 있는 초췌한 차림의 노동자를 향해 얘기했다.
“동무들도 알다시피 지금의 프랑스는 우리가 원하던 노동자와 농민의 공화국은커녕, 기욤 드 툴롱을 위시한 부르주아들의 독재국가가 되어버린 지 오래야.”
이름에 ‘드(De)'가 붙은 봉건제의 부산물 놈들이 아직까지 살아 숨 쉬다니. 이게 혁명의 배신이지 대체 뭐가 배신이란 말인가!
“나, 자크 르네 에베르는 노동자와 농민의 공화국!! 모두가 평등한 그 이상을 실현하려면 지금이 우리 노동자들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민들은 기욤과 시에예스, 미라보와 라파예트에 의해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걸 모른다.
토지조사도, 이번 전쟁도, 모두 제 놈들이 가진 걸 지키기 위해 억지로 인민들에게 내어준 것. 인민들은 순진해서 모르겠지만 에베르는 알 수 있었다.
모두가 배신자다.
기욤 드 툴롱도, 시에예스도, 미라보도 라파예트도 모두 배신자란 말이다.
물론 로베스피에르 그도 혁명과 자코뱅의 배신자고.
하여간 신이 있다니 뭐니 개소리를 지껄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게다가 공부 좀 한 변호사랍시고 으스대는 것부터 쁘띠 부르주아로서의 면모가 보이지 않나.
“곧 여름이 오고, 가을이 되면 저 멀리 동토에서 코사크 인들과 루스 인들이 쳐들어올 터. 그 때 봉기를 일으킨다면 정권을 무너뜨리는 건 쉽겠지만, 야만인에게 공화국의 안전 또한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이 적기다.
지금 혁명의 적들을 처단하고 순수한 노동자들이 이 나라를 이끈다면 러시아의 침입 때는 충분히 맞서볼 수 있으리라.
“평원파 부르주아 놈들의 수괴! 에마뉘엘 조세프 시에예스를 척살한다! 노동자 만세!! 공화국 만세!!”
“““노동자 만세! 공화국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