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빛의 도시, 파리 (1) (131/341)

빛의 도시, 파리 (1)

1792년 4월 18일.

프랑스 혁명왕국, 파리.

“황혼이 참 예쁩니다, 각하.”

“지금 제게 늦었다고 돌려 말하시는 건가요?”

“에이 설마요.”

뭐... 해가 지는 모습이 예쁘긴 하네.

그리고 내가 노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좀 늦을 수도 있는 거지. 그르노블에서 여기 13구까지 오려면 되게 오래 걸리거든요?

썩어가던 나무판자로 만든 판자촌, 성인 둘이 지나가면 어깨가 부딪히기 일쑤였던 좁디좁은 골목길, 시궁쥐가 들끓던 하수구가 자리했던 13구.

그러나 13구는 이제 말끔하게 제 옷을 갈아입었다.

적어도 마차 세대는 지나갈 법한 넓은 대로를 중심으로 돌과 기초적인 시멘트를 활용해 만든 주택들, 구리로 만든 수도관과 하수도까지.

“처음 보도블록을 곡괭이로 부술 때만해도 이 거리가 과연 바뀔까 의심했었는데, 정말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몰라보게 변했군요.”

“하하. 있는 건물 중 칠 할은 부숴버리고 다시 지었는데, 안 변하면 우리 공병대가 섭섭하지 말입니다. 어떻게, 만족스러우십니까 각하?”

“아, 만족스럽다마다요.”

내가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아서 못하는 게 한이지, 마음 같아서는 댁하고 어깨동무하고 캉캉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거든요.

“기욤 총감, 얘기는 다 끝났나? 다들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예, 지금 갑니다. 베르나도트 공병 중령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빈민가였던 13구를 새로 태어나게 해준 실무자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나는 시에예스 의원님을 따라 붉은 천이 가로로 길게 걸려 있는 중심가로 향했다.

실크햇을 쓰고 뽐내기 용으로 양산을 손에 쥔 재산가들, 아이들을 데리고 호기심에 나온 일가족들, 펜과 종이를 꺼내 내가 말할 내용을 오늘 치 특종으로 써내려갈 생각뿐인 기자들까지, 군중들 면면이 참 화려하기도 하다.

아, 곳곳에서 사복을 입은 채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헌병대는 덤이고.

전생에서 TV에 나오던 정치인이니 건설사 사장이니 하는 높으신 분들이 보던 풍경이 이런 거였나.

나는 가위를 들고 붉은 천 앞에 섰다.

“오늘, 마침내 우리 혁명정부가 반 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든 13구의 깨끗한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어 저는 진심으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이 자리를 시작으로, 곧 프랑스 땅에 사는 모두가 이러한 번영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하며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찰카닥-!

팽팽했던 붉은 천이 힘을 잃고 바닥을 향해 스르륵 떨어졌다.

그와 함께 내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분주하게 종위 위에서 펜을 굴리며 내 말을 받아쓰기 시작했다.

음. 마치 북쪽에 있는 공산돼지의 로동당 전당대회 같은데? 묘하게 중독성 있단 말이야.

파리에 있는 잡지사와 신문사가 다 합쳐서 몇 개더라? 한 400개쯤 되던가? 이야 내일 조간신문이랑 잡지 기사 1면들이 볼만 하겠는걸.

“1789년으로부터 3년간, 우리는 참으로 고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부에서는 민중을 탄압하는 압제자로부터, 외부로부터는 우리를 고깝게 여기는 압제자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만 하는 고된 시간이었습니다.

고(故) 오를레앙이 이끄는 왕당파, 전쟁광 프로이센의 흉포한 척탄병들까지. 우리는 압제자들의 정부들과 전쟁, 또 전쟁을 치러나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숱한 어려움을 극복한 승리자는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였습니다.

빨간 모자를 쓰고 거친 모직 옷을 입고서 나무신을 신은, 보잘 것 없는 빵과 질 나쁜 맥주를 먹으며, 동네 대장간에서 급조된 머스킷을 든,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깨어서 논의할 수 없을 때는 그들 집회실의 마룻바닥에 깔려 있는 담요 위로 잠을 자러 갔던 열정적이고 성실한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 프랑스를 구했던 것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저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실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물론 아직 저 먼 동방의 얼어붙은 땅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러시아인들이 남아있지만, 저는 믿습니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다시 이 땅과 곁에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지키고자 기꺼이 나설 것임을 말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승리할 것임을 말입니다.

그러나 개중 누군가는 제게 물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그 모든 걸 깨끗이 물리치고 나면 무언가 더 달라지냐고. 억압자들을 모두 물리친 후에는 현실이 달라지느냐고.

이해합니다. 높으신 위정자들이 아무리 현실이 변했다, 혁명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당장 내가 사는 비참한 삶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현실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여러분을 이곳에 불러 모았습니다. 그 달라지는 현실을 한시바삐 보여드리고 싶었기에.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적인 현실이, 비참했던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변화할지를 보여드리고 싶었기에.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비천하게 살아가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버리는 건, 어떤 이유로든 결코 현명한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기에.”

머독 씨, 준비하시지요.

나는 잠시 말을 끊고, 군중들 앞에 있는 머독 씨에게 눈길을 주었다.

머독 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군중 속으로 슥-하고 사라졌다.

“17세기는 군왕들과 군주들의 시대라고 누군가 제게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저는 18세기가 시민과 민중이 역사에 나타난 시대라고 그 누군가에게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 다가올 19세기는, 바야흐로 시민과 민중이 주도하는 진보와 이성의 시대가 되리라 감히 그 누군가를 향해 예언하겠습니다.

그 진보와 이성의 시대를, 지금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나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쟀다.

오후 5시 59분 40초.

“20, 19, 18.”

아이들을 목마 태운 채 내 말을 경청하던 가족들도, 내 말을 계속 써내려가던 기자들도, 헌병들까지도 모두 의아한 얼굴로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계속 수를 세어나갔다.

“15, 14, 13.”

그 누가 고개를 갸웃거려도, 미간을 찌푸려도.

나는 계속 수를 세어나갔다.

“7, 6, 5.”

그리고 마침내.

나는 회중시계를 도로 품에 집어넣으며 마지막 숫자 세 개를 세었다.

“3, 2, 1.”

0.

저 멀리서 무언가 탁-탁-탁 하는 소리가 13구 중심가 한 가운데 서있는 나와 군중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리가 우리 앞까지 다가온 순간,

사람들은 왜 이런 흉한 걸 꽂아놨을까 싶었던 철제 봉 위에서 촛불보다 수백 배는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는 모습을 눈동자 가득 담을 수 있었다.

“어, 어...어?”

“마, 마법이다!! 마법!!”

“세상에, 세상에...”

모두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검지손가락을 가스등을 향해 치켜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우리 이삭의 민족에서 자신 있게 선보이는 빛의 도시, 파리입니다.”

“아, 혹시 저택이나 원하는 곳에 이 가로등 건설을 원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문의는 그르노블 가에 있는 이삭의 민족 건설사 사무실로 연락 주십시오. 이번에 새로 개업했습니다.”

고객님은 언제나 환영입니다요.

***

다음날, 4월 19일.

“저기요, 우리 집 앞에 하나 부설하는데 돈이 얼마나 듭니까?!”

“우리 저택 입구부터 정원을 그 가스등으로 빙 두르고 싶은데, 대당 얼마요!!”

“뭐? 세 달!! 지금 세 달을 기다리라고?! 아니, 무슨 예약이 그렇게 많이 잡혀있다는 겁니까!!”

“야! 사장 불러! 내가 누군 줄 알고...!!”

“아마 개인이 만드신다면 상당히 금액이 많이 드실 텐데요. 혹시 주변에 사시는 이웃 분들과 공동구매 하실 의향이 있으신지...? 아, 공동 구매면 확실히 가스관을 뚫고 하는 비용을 나눠 낼 수 있으니 아무래도 혼자 구매하시는 것보다는 싸죠.”

“추후에 생산수량이 늘어나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대 당 약 400리브르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튈르리 궁, 베르사유 궁, 파리 3구 구청, 10구 구청, 아니 그냥 이 근방 관공서는 다 예약이 해버려서 어쩔 수 없습니다, 고객님!”

“저희 사장님은 기욤 드 툴롱 총감님이신데, 정말 감당되십니까?”

그르노블 가 일부를 임대해 차린 이삭의 민족 건설사는 고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기 바빴다.

“자, 잠시 휴식!! 다들 점심 먹고 오도록!”

“젠장, 젠장, 젠장. 그냥 고향에 돌아갈걸 그랬어.”

이삭의 민족 건설사에 건설담당으로 채용된 필리프는 주섬주섬 도시락을 받아 챙기며 입을 열었다.

- 충성! 상등병, 필리프!! 총감 각하를 뵙습니다!

- 자네, 땅을 아주 예술적으로 까는군? 내가 철원 GOP에 있었을 때가 생각... 아니 흠흠. 아무튼 혹시 제대하고 할 일 생각해뒀나?

- 제대하고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을까 했습니다만...

- 지금은 겨울인데? 에이 그러지 말고 농한기 때는 우리 이삭의 민족에서 일해 보는 건 어떤가?

- 이, 이삭의 민족 말씀이십니까?

- 그래! 내가 책임지고 시급 잘 챙겨줄게!

필리프는 과거를 후회하며 이삭의 민족 간편식사를 베어 물을 수밖에 없었다.

***

[가장 어두웠던 빈민가, 13구에서 나온 빛!!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이 말한 진보의 시대가 다가온다!!]

[왕립아카데미 - 가스등의 믿을 수 없는 존재, 그리고 그 놀라운 원리에 관해.]

[빛나는 13구, 다음 재개발 대상은 어디?! 파리 3구와 10구 구청장들의 논쟁! 우리가 더 낙후됐다!]

[가스등을 만든 라부아지에, 지난 자신의 과오를 사죄하며 생 탕투안 구의 가스등 비용을 대기로 해. 주민들 환영!!]

여기도 좋고, 저기도 좋다!

조간신문과 잡지의 1면은 온통 13구의 가스등 얘기로 도배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음, 흡족해. 이게 노이즈 마케팅이지.

뭐, 꼭 긍정적인 기사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기욤 재무총감의 마법!! 과연 기욤 드 툴롱은 악마의 사주를 받았는가?!]

[건달패 뮤스카댕, 공을 세운 우리 대신 파리에서 노닥거리던 빈민들에게 과도한 혜택이 들어가. 기욤 총감에게 부정적인 반응 다수.]

[늙은이 뒤셴, 이삭의 민족은 노동자를 착취해서 제 배를 불리는 부르주아들!!]

그래 뭐, 마법 운운이야 그럴 수 있다 쳐.

내가 환생인지 뭔지를 한 것부터가 괴력난신이고 마녀일 수도 있고 악마일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말이지.

“플로리앙 씨. 대체 이 뮤스카댕인지 하는 이 새끼들이랑 뒤셴 잡지사 이 두 새끼들은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사장님.”

빨갱이면 빨갱이고 부르주아면 부르주아지 둘 다는 대체 어떻게 해야 달성할 수 있는 걸까. 진짜로 웬만한 도전과제가 아닌 거 같은데.

“뭐, 그냥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시지요. 딱히 신경 써서 좋을 것도 없어 보입니다.”

“씁. 그래도 신경 쓰인단 말이죠.”

찝찝하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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