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로의 출발 (4)
“가스등이라니, 난생 처음 들어보는 물건이라 전 당최 무엇인지 모르겠군요.”
“하하, 아직까지는 시험단계라 그리 자랑할 물건은 아닙니다.”
라부아지에의 말에 머독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라부아지에 선생, 저 분과 아는 사이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로베스피에르 의원님. 저와 함께 이삭의 민족에서 근무하는 영국인 기술자, 윌리엄 머독 씨랍니다.”
“허, 저 분도 재무총감 각하 밑에서 일한단 말입니까?”
로베스피에르는 퍽 놀랍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기욤 재무총감은 공과대학이라도 하나 새로 만들고 싶은 건가? 그도 그럴게, 화학자에 기계공학가에 증기기관 기술자까지 면면이 참 화려하기도 하지 않나.
어떻게 보면 이삭의 민족 사 개발부가 프랑스 제일가는 기술학교인 왕립공병사관학교보다 수준이 배 이상 높은 거 아닌가 싶은 로베스피에르였다.
“아무튼 간에 알겠습니다. 머독 씨가 준비하신 물건도 총감 각하 앞으로 올려드리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의원님!”
영국인 기술자는 환하게 웃으며 심사위원들의 손을 맞잡고 얘기했다.
***
“와 씨 더러운 거 봐. 이게 우리나라 수도라니 참나.”
스물 네 살의 젊은 청년이자 발명가, 르 봉(Philippe le Bon)은 오수가 줄줄 흐르는 하수구에 빠질 뻔 한 외투 끝자락을 서둘러 끌어올리며 말했다.
조그마한 촌 동네인 고향 브라샤이에서 처음 거대한 도시 파리로 올라올 때, 기대감으로 두근두근 들떴던 가슴은 이제 짜게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분명 파리가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도시라고 했는데, 황금빛은 개뿔이.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는 빈민가에, 웬만한 성인 남자 손 크기의 시궁쥐를 보는 건 예삿일이요, 출처가 불분명한 털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파는 잡상인들까지.
이게 소돔과 고모라지, 무슨 도시야?
“뭐, 하기야 이러니까 재개발을 한다고 그 난리겠지.”
르 봉은 코를 팽-하고 풀며 말했다.
그래. 재개발.
르 봉이 고향 땅에서 이 파리로 올라온 이유가 바로 그 재개발 때문 아니었나.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인 파리를 제 발명품으로 채울 수 있다니! 영예는 기본이요, 그 특허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만 얼마일까?
“아니지, 특허가 아니라 아예 왕실 같은 곳에서 초빙 받는 거 아니야? 씁. 프로이센은 전쟁을 치룬 터라 좀 껄끄럽고, 그렇다고 합스부르크는 더 아니고. 러시아는 너무 추운데... 아 고민되네. 으흐흐.”
12월의 추위로 인해 빨개진 볼에도 불구하고, 르 봉은 어떤 왕국의 왕실기술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사는 제 달디 단 꿈 때문에 추운지 더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어디보자... 그런데 경연장이 어디더라?”
르 봉은 주머니 안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포브스> 12월 둘째 주 호의 뒷장을 꺼냈다.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과 프랑스의 상징인 마리안이 독자에게 손으로 권총을 쏘듯 검지와 엄지를 치켜들고 있는 도발적인 모습의 뒷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당신도 할 수 있다! 파리 재개발! 자신의 꿈을 파리에서 실현하라! 파리와 프랑스를 다시 위대하게!]
[파리 재개발 사업 발명품 경연에 참가하고자 하는 사람은, 파리 샹 드 마르스 광장의 행정부 상담소를 찾아주세요.]
“샹 드 마르스 광장 행정부 상담소라. 뭐 걸어가면 되겠네.”
르 봉은 꼬깃꼬깃한 종이쪼가리를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대충 크기 좀 있는 도시나 마을에는 하나씩 있는 행정부 산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상담소.
분명히 처음에 만든 이유는 허무맹랑하고 악의적인 소문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겠다니 뭐니 그랬던 거 같은데.
이제는 뭐 물어보러 가는 것보다 사실상 하릴없을 때 상담원이랑 노가리 까러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곳이 되어버렸다.
“상담하러 오셨습니까?”
“예. 필리프 르 봉이라고 합니다.”
“지금 상담소가 가득 차서 잠시 기다려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옙.”
잠시의 기다림이 끝나고 르 봉의 차례가 되자, 르 봉은 자리에서 일어나 배정받은 상담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 이삭의 민족과 행정부 소속 대민 상담사,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라고 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퀭한 눈과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상담사의 모습과 함께, 말이 통하도록 구멍을 뚫어놓은 유리벽 옆으로 팻말이 달려있었다.
[상담사도 누군가의 아들입니다]
[잡상인 사절]
[꼭 필요한 말만! 상담사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기타 등등.
르 봉은 속으로 이 딱한 상담사의 처지를 동정하며, 얘기했다.
“상담사님, 이번 재개발 사업 경연에 참가하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게 얼마 만에 받는 제대로 된 질문인지!”
상담사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종이에 약도를 그려 자신을 향해 건넸다.
“자, 약도대로 가시면 나올 겁니다.”
“감사합니다, 상담사님.”
“그런데 조금만 더 있다가 가시면 안 될까요? 제가 곧 퇴근시간이라...”
“······제가 좀 바빠서 말입니다. 아무튼지 간에 감사했습니다.”
르 봉은 약도를 받아 챙긴 후, 감사인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뒤로 유리를 두드리는 텅-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르 봉은 약해진 마음을 다잡고 약도대로 길을 나서기로 했다.
여기서 미적거릴수록, 증기를 이용해 난방을 하는 자신의 획기적인 발명품이 빛을 볼 시간은 길어져만 가니까.
***
아, 오랜만에 안 먹어도 배부른 이 느낌.
“캬. 가로등에 난방기구에 아주 그냥 노다지가 따로 없네. 오홍홍 좋아용!”
내 손에 들려있는 이 빛나는 황금 전설카드들을 봐라. 너무나 영롱하지 않나?
가로등도 그렇고 난방기구도 그렇고 일단 전생에서 봤던 건 죄다 히트를 쳤다는 건데 그게 이렇게 넝쿨 째 내 손으로 굴러올 줄이야.
이런 거 만든 애들만 뽑아다가 이삭의 민족에 박아 넣으면 바로 히트작 생성기 아닐까?
그러면 저 인재들 싹싹 긁어먹을 때까지는 고용노동법 통과를 조금 늦춰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일단은 이리저리 한 번 굴려봐야 뽀록으로 하나 터트린 건지 아니면 진짜로 실력이 있어서 터트린 건지 확인이 될 테니까.
도비는 이제 부하 요정이 많아서 즐거워요! 도비는 이제 손가락만 까닥이면 돼요!
“무슨 소리십니까? 국민연금인지 뭔지 하는 공기업을 만들겠다고 일감을 늘려놓고서.”
“도비는... 자유가 되고 싶어요...”
“도비가 대체 뭔지 저 마이어는 모르겠고, 어서 일이나 하시지요. 벌써 13분을 낭비했습니다, 사장님.”
젠장. 바른생활 선생님이 따로 없군. 마이어 당신을 독일에서 주워오는 게 아니었는데.
기욤 드 툴롱 일생일대의 실수 목록 중에 한 줄을 추가해야겠다. 아, 거기에 다음 전생을 위한 인생의 교훈 목록에도 한 줄을 추가해야겠어.
다음 생애에는... 유대인을 멀리해라... 특히 돈 만지는 유대인은 더더욱. 일에 미친놈들이야.
“큼큼. 사장님? 저도 마이어 씨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저 할 일 많습니다. 어서 빨리 시작하시지요.”
“역시 플로리앙 부사장께서 제 마음을 잘 알아주시는군요. 하하하!”
“당연합니다, 사장님을 골려먹을···, 아니 우리 회사와 프랑스의 앞날에 필요한 일이니까요! 하하하!”
마이어와 플로리앙,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서로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이 반동들!! 직원이 아니라 모두가 죄다 날 과로사 시키려는 한패들이야!!
전위대! 전위대를 불러!
“전 사무직으로 뽑힌 거지, 금융은 일자무식이라서 말입니다. 하하하. 전 사장님과 다른 분들이 마실 커피나 타오겠습니다.”
내 전위대, 아니 페시옹 씨마저 날 버리다니.
내가 사람을 잘못보고 있었어. 야! 알렉상드르 페시옹 너! 사관학교 88년도 군번이지? 내 후배잖아! 빨리 위험에 처한 선배님을 구하란 말이다아악!!
“어허, 이제 곧 스물이 될 분이 아직까지 애처럼 일하기 싫어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스물이면 아직 한창 어릴 때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장님은 궤가 다르시지 않습니까. 알렉산더 대왕처럼 십대에 천하를 호령하시는 분이 이러시다니요.”
호령? 호령은 무슨. 날 벗겨먹는 인간들이 한 소쿠리 가득인데.
베르사유 의회에 있는 시에예스 의원님이라던가, 미라보 국회의장이라던가.
“하아. 알겠습니다. 국민연금 얘기나 하죠. 이번에 자본금으로 굴려 볼 만큼 꽤 큰돈이 들어왔으니 댐에 구멍 뚫려서 질질 새기 전에 어서 전략을 짜놔야겠죠.”
“동감입니다, 사장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프랑스가 영국한테 딸리는 게 뭘까?
인구? 프랑스가 무려 천오백만 명이나 많다.
땅 덩이? 프랑스가 더 넓다!
밥이 안 나나? 프랑스 대가리가 부패해서 그렇지, 혼자 프랑스 본토에 이탈리아 북부까지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밥은 잘 난다.
봐라, 혁명해서 싸그리 싹 청소하니까 밥 먹는 거 하나 만큼은 잘 돌아가지 않나.
그러면 뭐가 딸릴까?
“영국과는 금융 면에서 현격하게 차이가 나지요.”
“바로 그겁니다.”
일전에 말했듯, 영국은 제 놈들이 생각하기에 영국의 이익에 필요한 나라가 있으면 국채를 사서 강제로 경기를 부흥시켜줄 정도로 돈이 더럽게 많으시다.
반대로 생각하면, 제 놈들이 생각하기에 좆같은 나라가 있으면 경제적으로 아사시킬 수 있을 만큼 돈이 더럽게 많다는 것.
“영국 동인도 회사 놈들, 적어도 그 놈들의 반만큼은 자본을 굴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프랑스도 영국 놈들 작전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어요.”
영국은 왕실이 운용하는 지갑과 동인도회사가 운용하는 지갑, 의회가 운용하는 지갑이 다 다르다.
전쟁이 난다면 그 거대한 세 지갑이 하나로 합쳐져 내 머리를 반으로 쪼개버리겠지만, 평온한 지금은 각자도생에 바쁘단 말이지.
반면에 내가 생각한 우리 프랑스의 국민연금은 말이 ‘연금’이지 사실상 거대한 사모펀드나 다름없다.
저 셋이 뭉치면 잽도 안 되지만, 각각 봤을 때는 프랑스를 짜낸 지갑으로 상대 못할 지갑도 아니거든.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곰곰이 턱을 어루만지다 입을 열었다.
“차라리 위조된 금괴를 풀어 화폐시장을 교란해보는 건 어떠십니까, 사장님.”
"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
“삐익-! 삐익-! 멈춰! 거기 멈추시오!”
파리 경찰청, 경감 파트리크는 연신 호루라기를 불며 곤봉을 허공에 붕붕 휘둘렀다.
“멈춰? 어이 경찰아저씨, 당신 우리가 누군지 알아!? 프로이센 놈들을 박살내고 온 참전 용사들이다 이 말이야!”
“우리가 목숨 값 좀 받겠다는데 왜 난리야 난리는!”
“이봐, 당신이 총검 들고 독일 놈들하고 싸워 봤어? 팍 씨.”
젠장할. 또 이 새끼들이라니.
군복을 입을 거면 제대로 입던가, 사복을 입을 거면 사복을 입던가.
상의는 군복, 하의는 퀼로트 바지라니. 이 무슨 패션 테러인지.
파트리크는 속으로 다시 한 번 마테오 복음서의 구절을 읊었다.
-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번 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주어라...
“어이 경관 나리. 가던 길 가쇼.”
“우린 마! 패트리오뜨! 패트리오뜨거든!”
“우우. 기욤은 땅 파헤칠 돈으로 우리에게 돈이나 줘라!”
집에 돈도 많은 부잣집 도련님들이 돈 운운하다니. 제 놈들이 신고 있는 퀼로트만 해도 값비싸 서민들은 신지도 못하는 바지 아닌가.
그렇다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참전했다는 군인들을 강제로 연행할 수도 없는 노릇.
파트리크는 안 그래도 나이를 먹어 늘어나는 주름이 몇 줄 더 늘어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