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로의 출발 (2)
역시 사람이 일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 중 가장 강한 건 분노가 맞는 건가?
“선생님, 프로이센 놈들이 강제로 빼앗아간 물건이 얼마나 되십니까? 흠, 밀 다섯 바구니에 감자 두 바구니라! 알겠습니다. 저희 재무부가 세 배로 뜯어다 보상해드리죠.”
“그런데 말입니다. 원래도 집에 이런 흠집이 있었습니까, 선생님? 아, 아닌 것 같다구요? 알겠습니다. 집 한 채 가격을 배상금에 더 추가하면 되겠군요. 이참에 새로 한 채 멋지게 지으시는 건 어떠십니까?”
“세상에, 사람들이 밀 빻을 때 쓰는 방앗간을 이렇게 태워버리다니! 이런 천인공노할 놈들! 예? 방앗간이 이렇게 된 건 수 년 전 화재 때문이었다구요? 선생님이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아무리 봐도 이번에 간악한 프로이센 놈들이 불을 지른 게 확실하잖습니까!”
적에게 징발당한 곡식의 양이 장부에서 세 배로 늘어나고, ‘재건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는 주택이 부지기수, 사회 기반 시설들이 ‘없었는데요 있었습니다’를 시전하며 프로이센 앞으로 배달될 청구서 숫자를 두둑하게 만들었다.
크. 이 모든 게 다 우리 충성스러운 재무부 친구들 덕분이란 말이지.
삐까번쩍한 수도 파리에서 띵가띵가 여유로운 재무부 공무원 라이프를 즐기다가, 강제로 외국 촌구석 트리어로 끌려와서 졸지에 농업부(진)이 되어버린 재무부 공무원들은 억눌렸던 스트레스를 발산할 기회를 얻자 무자비한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보스, 아니 총감님. 뫼즈와 아르곤 지역의 민정감사는 모두 끝냈습니다. 대략 2천만 리브르를 뜯, 아니 보상받으면 되리라 예상됩니다. 이제... 이제 집에 갈 수 있는 거죠?”
“아니요? 아직 메츠와 낭시가 남지 않았습니까. 거기까지 끝내고 오셔야죠.”
“그냥 지방 공무원들 시키면 되는 거 아닙니까...? 꼭 저희가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지방 공무원들? 그 사람들 죄다 앙시앙 레짐 때 그대로잖습니까. 그 사람들 완전히 물갈이되기 전까지는 어디서 얼마나 해쳐먹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믿고 맡깁니까.”
공무원 자리와 장교 계급장을 돈을 주고 사는 걸 별 문제시 하지 않는 시대가 바로 이 18세기 봉건 사회다.
조선은 공명첩으로 관직을 팔아먹긴 했어도 명예직이었지, 유럽은 무려 ‘실권’도 가지고 있다는 거 되게 충격적이더라.
혁명이 성공하고 국민의원들이 선출되며 세상이 바뀌긴 했어도 겨우 2년밖에 안 지난 지금.
수도인 파리는 몰라도 아직까지 지방은 봉건의식이 남아있는 곳이 가득한데, 여기서 지방에 호구조사를 짬 때린다?
보나마나 부패가 판칠 거고, 우리 로베스피에르 의원과 그를 따르는 산악파인가 뭔가 하는 과격파 의원들은 눈이 돌아가서 군대로 밀어버리자니 뭐니 할 게 당연하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수고해주셔야죠.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우리 프랑스 국민들과 전 여러분의 노고를 잊지 않을 겁니다.”
나는 이삭의 민족산 군납궐련을 입에 물고, 날 퀭하게 바라보는 재무부 공무원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어허, 그렇게 소리치고 바닥을 굴러도 파리로 안 보내 줄 거야. 얌전히 말 타고 토지조사 아니면 측량이나 하러 가라고.
***
1791년 12월 3일.
프랑스 혁명왕국, 수도 파리.
“드디어, 드디어 파리에 돌아왔어!!”
“여보!! 얘들아!! 아빠 왔다! 아빠!”
“아, 집에 가서 와인 한 잔 딱 들이키고 푹 자야겠다.”
전쟁이 끝난 지 약 두 달 만에 재무부는 길고도 길었던 트리어 분점 생활을 정리하고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들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 나만 빼고 말이지.
“에효.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국민의원인지 제 3신분의원인지 뭔지 거절을 했었어야 해.”
나는 이삭의 민족 사무실 계단을 오르며 쓸쓸하게 말했다.
그런 나를 향해 누군가 2층에서 빼꼼 얼굴을 내민 채로 외쳤다.
“뭘 그리 혼자 구시렁대나, 기욤 총감? 어서 올라나 오게!”
악독한 미라보 같으니. 휴일 통제에 이어서 혼잣말까지 통제하다니. 정말 너무해. 흑흑.
내가 프랑스 정부의 공공재야? 기욤 드 툴롱이 공공재냐고!
“거 빨리 좀 올라와보게! 이 사람아!”
“예에, 예에.”
나는 미라보 국회의장의 닦달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서둘렀다.
“오랜만에 보는구만. 참 비싼 몸이야, 아닌가 총감?”
“비싼 몸을 호출하시다니, 돈이 굉장히 많으신가 보군요. 미라보 국회의장님.”
“하하, 이 사람 농담도 참! 어서 일 얘기나 하세!”
“······젠장할.”
나는 외투를 옷걸이에 걸고 응접실 의자에 턱-하고 앉았다.
“저 부르신 이유, 그것 때문이죠?”
“물론이네. 배상금, 어디에 써야 제일 좋을까.”
재무부와 외교부의 합작품.
프로이센이 눈물을 머금고 토해낸 막대한 배상금 1억 2천만 리브르.
그러게 왜 선빵도 치고 지기까지 하셨어. 꼬우면 이겼어야지.
군침이 싹 도는 배상금을 뜯어냈으니 이제 적당히 쪼개서 이 누더기로 기운 프랑스를 기워나가야 할 터.
일단 상이군인과 민간에서 징발한 물품에 대한 보상금, 그리고 약탈당한 일부 국민들에게 약 2천만 리브르는 무조건 써야한다.
그러면 남은 돈 1억 리브르를 어떻게 굴리느냐 이건데. 딱 프랑스 1년 예산 정도라 상당히 애매한 액수란 말이지.
“총감, 그러면 빚을 갚는 건 어떤가?”
나는 미라보 국회의장님의 말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이걸로 빚을 갚아봤자 세발의 피일 겁니다.”
“그러면 총감은 어떻게 쓸 건지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나?”
“아무래도 투자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제일 좋은 방법은 미래에 캐시카우가 될 만한 산업에 힘을 실어주는 건데...
그 왜 있잖나, 대한민국으로 치면 반도체라거나 막 스마트폰이라던가.
“아니면 차라리 이번에 확 재개발을 해봐야하나 싶기도 하네요.”
“어디? 아, 파리 말하는 겐가?”
“중세시대에 만든 도시다 보니 사람 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으음. 그렇기야 하지. 수도관은커녕 하수도도 안 뚫린 곳이 허다하니 원.”
“아예 파리 지도를 가져와서 볼까요?”
나는 구석에서 파리 지도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좌르륵-하고 굴렸다.
“일단 재개발을 한다 치면 제일 급선무는 엉망이 된 바스티유 요새 근교입니다.”
“아무래도 바스티유 요새를 함락시키고 그 주변이 황폐화된 지 오래니 말이야. 이해가 되는구만.”
“그 다음은 송수로 문제입니다. 아시다시피 개판 아닙니까. 물이 제대로 빠져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 깔려있는 것도 아니고.”
미라보 국회의장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수도에서 자꾸 이상한 냄새가 올라오면 이미 게임은 끝난 거지. 그게 수도냐? 똥통이지?
내가 재무총감 자리에 앉고 나서 되게 열심히 송수로를 뒤집어 깠는데도 여태껏 해결된 송수로 구역은 티스푼만큼도 안 된다.
“만약 수로를 다시 깐다 치면, 이참에 파리 전체를 뜯어 고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애초에 바닥을 싹 들어냈다가 다시 올려야하는 거니까요.”
“흐음.”
나는 펜에 잉크를 묻혀 파리의 곳곳을 직선으로 이어나갔다.
“빈민가 지역부터 재개발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그곳을 필두로 개발에 들어가면 파리를 확장하고 넓히는 게 훨씬 수월할 겁니다.”
내 파리에 집 없는 빈민은 없다.
***
1791년 12월 15일.
프랑스 혁명왕국, 툴롱 항.
64문 3급 전열함 HMS 아가멤논.
아가멤논이 떠있는 바다의 수위가 낮아질 때마다, 차갑고 거센 겨울철 바다가 보낸 파도가 아가멤논의 선채를 때리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입항 준비! 입항 준비!”
“총원 입항 준비, 총원 입항 준비.”
영국의 군항, 지브롤터를 떠나 약 두 달 간 지중해 이곳저곳을 쏘다닌 영국 해군은, 필요한 보급품과 물자를 보급받기 위해 프랑스의 툴롱 항에 입항하고 있었다.
“이야! 내가 프랑스 땅에 다시 발을 디딜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입헌왕국 프랑스라니, 감회가 참으로 새로워.”
HMS 아가멤논의 함장이자 지중해 분견함대의 함대장인 영국 해군 소속의 대령은 웃음과 함께 읊조렸다.
그러나 대령의 얼굴에 깃들었던 미소는 아가멤논 호가 툴롱 항에 가까이 갈수록 점차 옅어져만 갔다.
아니, 이제 미소는커녕 마음 한 편이 이상하게 불편해졌다.
군함으로 쓰이던 프랑스 해군의 함정들은 출항은커녕 유지와 보수에도 상당히 힘이 드는 듯, 흘수선 밑이 온통 따개비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더라면 함선을 저렇게 방치해놓을 수 없을 텐데... 프랑스 해군이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라더니, 정말이었군 그래.”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아메리카 대륙과 카리브해 곳곳에서 일전을 벌인 자신과 프랑스 해군 아닌가.
그 만만찮던 적수가 장렬하고 명예롭게 전투에서 유명을 달리한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쓸쓸하게 사라져간다는 사실이, 기사도를 신봉하는 서른 세 살의 젊은 해군 대령에게는 너무나도 불편했다.
덜커덩, 덜컹.
견인색이 배에 걸리고, 아가멤논이 완전히 제 거대한 몸을 항구에 편히 기대자. 대령은 수병들을 모았다.
“자, 앞으로 일주일 간 정박할 예정이니 그 동안 목욕도 하고 다들 노고를 풀도록. 그리고 여자는 너무 많이 만나지 말게. 뼈 삭아.”
“““예! 함장님!”””
수병들은 대령의 얘기에 킬킬대며 배를 빠져나가자, 대령 또한 기사의 상징인 검을 차고 배에서 내렸다.
그러자 부두에서 대령을 기다리던 몇몇 인사들이 다가왔다. 쉰 쯤 되어 보이는 중년 남자가 제일 먼저 대령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보아하니 선생께서 이번 영국 함대사령관이시구료! 선생 때문에 이 늙은 사람이 추운 날 참 오래 서있었습니다 그려.”
“죄송합니다만 누구신지...?”
대령은 손을 맞잡긴 했으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아, 내가 자기소개를 깜빡했구료. 이곳 툴롱의 항만장, 샤를 드 툴롱이라 합니다.”
중년 남성은 아차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대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 항만장님이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영국 해군과 국왕 폐하를 대신해 우리 함대의 정박을 허용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겠습니다.”
“허허. 부디 좋은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예. 항만장님. 그런데 이쪽은...?”
대령은 고개를 돌려 항만장이라는 사람의 곁에 서있는 젊은 프랑스군 장교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 이쪽은 이번에 툴롱지역 사령관으로 영전한 장군님입니다.”
항만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하자, 젊은 장교가 대령을 향해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툴롱 지역사령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준장입니더. 만나서 반갑심더. 함대장님.”
대령 또한 프랑스군 장교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영국 지중해 분견함대 함대장, 호레이쇼 넬슨 대령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장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