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로의 출발 (3)
1791년 12월 20일, 한 겨울인데도 이상하리만치 화창한 햇빛이 살갗을 간질이던 날.
프랑스 혁명왕국, 수도 파리 외곽에 자리한 제 4 지원병연대의 주둔지는 아침 일찍부터 부산스러웠다.
“자, 자네들 다 잘 알지? 본관은 딱 자기들 할 것만 알아서 잘하면 쭉 늘어져서 쉬어도 뭐라고 안하는 사람이야.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쉽게, 쉽게 가자고. 응?”
“““예. 중사님.”””
“좋아, 좋아. 제군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니 기쁘기 그지 없구만! 그러면 이제 작업 시작하도록!”
“““안전제일! 좋아! 좋아! 좋아!”””
짝! 짝! 짝!
누가 만든 건지, 왜 하는 건지도 모르는 이상한 구호와 함께.
병사들은 연신 세 번 손바닥을 맞부딪힌 후 곡괭이니 삽이니 하는 연장을 불출하여 하나 둘 파리 시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씨이이바아알...”
제 4 지원병연대 소속 장병들의 기다란 행렬 속에서, 필리프 상등병은 소집해제까지 일주일이나 남은 제 신세가 참으로 한탄스러운 나머지 자그마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독일 놈들 대가리를 깨버렸으니, 내년에 러시아 훈족 놈들이 쳐들어올 때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바로 일감을 거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프랑스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인 방데(Vendée)에서 온 필리프의 생각과 달리 현실은 물 흐르듯 유려하지 않았다.
“필리프, 그래도 돈은 잘 주잖냐.”
“젠장, 이 부르주아 자식. 너 농사 안 지어봤지? 이런 돈 몇 푼보다야 고향에 돌아가서 내년에 농사지을 준비해야 된다니까? 땅 부쳐 먹을 준비 미리미리 안하면 굶어 죽는다고.”
혁명정부에서 받은 땅뙈기에 수로도 뚫어 놔야하고, 저수지도 관리해야하고, 게다가 씨앗도 관리해야하고. 할 게 얼마나 많은데!
평생 남 땅만 부쳐 먹다가 기껏 생긴 제 땅을 황무지로 만들고픈 마음이 있을 리 없는 필리프는, 뭐가 그리 대수냐는 식으로 말하는 동기가 매우매우 띠꺼웠다.
“그러면 육군에서 뺑이치지 말고 돈 많이 준다는 해군 가서 뺑이 치지 그랬어.”
“입 닥쳐 이 부르주아 반동아.”
하여간 일평생 시장에서 사과 팔던 상인 놈 아니랄까봐, 농부의 고초를 이해하지 못하는 동기를 향해 필리프는 입을 댓 발 내밀고 말했다.
“부대 정지, 정지!”
어느새 필리프의 대열이 파리 깊숙이 들어와, 목적지인 13구에 거의 다다르자, 선두에 선 부사관이 외쳤다.
“충성! 제 4지원병연대, 집결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충성, 반갑습니다. 이번 파리 재개발 사업에서 13구 재개발을 맡은 공병 중령,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Louis-Alexandre Berthier)라고 합니다.”
마흔 쯤 되어 보이는 사팔뜨기 장교는 필리프와 동료 사병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번 재개발 사업의 성패는 시간입니다. 공사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천문학적인 돈이 투입될 테니, 최대한 서둘러서 작업해주십시오. 다만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하라는 건 아닙니다. 첫째는 안전, 둘째는 시간. 명심하고 작업하십시오.”
“““예!”””
필리프는 곡괭이와 밧줄 등을 짊어지고 공병대 친구들의 인도에 따라, 보도블록 위에 자리를 잡고 섰다.
곳곳에서 퉤-하는 소리와 함께 곡괭이를 쥘 손에 침을 뱉고서, 힘차게 곡괭이를 휘두르는 소리가 거리를 한 가득 메웠다.
***
파리를 누가 빛의 도시라고 하던데. 그거 대체 누가 만든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네 진짜로.
이게 빛의 도시면 서울은 대체 수식어로 뭐가 붙을지 궁금하다.
“음. 사실 루소 선생께서도 기욤 자네와 비슷하게 말하긴 했지.”
나는 당신이 보았던 멋진 거리와 대리석과 금으로 된 궁전 이야기를 듣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기대했습니다만, 그 대신 내가 들어선 생마르코 지구는 좁고 더럽고 악취가 나는 거리와 비루한 검은 집들만 보였습니다-라고 말이야.
시에예스 사제님은 덧붙였다.
“그것 참 신랄하군요.”
“아직 덜 말했네, 건강을 해치는 공기와 함께 빈민과 노점상들이 판친다는 내용도 뒤에 더 있네.”
이야 ‘이게 사람이 살 곳이냐?’를 그렇게 신랄하게 표현하다니. 루소 그 사람 주택관리부 같은 곳에 임명하면 집값은 확실히 잡겠는데?
아니, 집값이 뚝뚝 떨어지다 못해 바닥을 치겠어.
“볼테르 선생도 한 마디 하셨네. 파리의 중심은 어둡고, 비좁고, 끔찍하며, 가장 수치스러운 야만적 시대의 그 무엇이라고.”
“그래서 지금 여기저기서 갈아엎고 있잖습니까.”
가장 낙후된 13구는 이미 공사가 시작돼서 군인들이 동원되는 중이었고, 나머지 구역은 공병대 장교들과 건축가들이 달라붙어서 이리저리 뜯어보는 중.
공사자금이 여유롭지 않은 만큼, 하루라도 빨리 도시 재정비를 끝마쳐야 하기에 불가피하게 군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아, 병사 때 대민지원 나갈 때는 이거만큼 엿 같은 게 없었는데, 막상 위에서 해보니까 군인들 부리는 게 제일 속이 편하다니. 뭔가... 뭔가 내 인성이 타락하는 기분이야.
그런데 막걸리에 파전 챙겨주면 나름 괜찮게 부려먹는 거 아닐까? 그래... 와인이랑 고기 좀 챙겨주면 오히려 병사들은 좋을 수도...?
“정 그렇게 돈이 부족하면, 기욤 군 생각을 좀 바꿔보는 건 어떤가?”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아, 설마...”
시에예스 사제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수도관 말이야. 왜 굳이 구리나 석관을 쓰겠다는 겐가? 납으로 만들면 훨씬 공사비가 절감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네.”
“납 수도관이라니 이런 젠장할!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니, 왜 그러나? 신성로마제국도 수도관은 납으로 쓰고 있지 않나. 국민의회에서도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이 많네, 기욤”
시에예스 사제님은 당최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생각해보게, 구리는 제련하는데 힘이 얼마나 드나? 그런데 납은 나 시에예스가 대충 망치가지고 두드려도 금방 모양이 잡히지 않나. 이 얼마나 경제적인···.”
“납 중독이 얼마나 위험한데 그걸 수도관으로 쓰시겠다는 겁니까?”
“뭐, 직접 먹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이야... 먹지만 않으면 된다니... 그것 참 상상도 하지 못한 발상인걸.
“절대 안 됩니다. 사람들의 건강을 담보로 돈을 대출할 수는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납 수도관을 통해 국민들에게 물을 먹이고 싶은 21세기 사람이 있으면 그게 미친놈이지 정상은 아니잖아.
그리고 납을 쓰면 제가 이번에 기껏 인수한 구리 광산이 무쓸모가 되거든요? 이미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계획을 짜 놨다 아닙니까.
시에예스 사제님은 입을 삐쭉 내밀고 얘기했다.
“하여간, 어쩔 때는 나보다 더 꽉 막힌 친구라니까.”
“그보다 사제님, 저랑 수도관 얘기하려고 오신 거 아니지 않습니까.”
“아, 본론을 잊고 있었지. 미안하네. 그보다 커피 한 잔 더 줄 수 있나? 나이가 드니 입이 건조하면 말이 잘 안나오는구만.”
나는 사무실 한 편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페시옹 씨를 불렀다.
“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커피 한 잔 부탁드립니다. 페시옹 씨.”
“이 사람에게도 한 잔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페시옹 씨가 사무실을 나서고, 문이 끼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닫히자 시에예스 사제님은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뮤스카댕(Muscadins)이라는 놈들이 요새 심상치가 않네.”
뮤... 뭐? 음악 하는 사람들인가?
“······처음 듣는데, 뭐하는 놈들이랍니까?”
“새파랗게 어린 청년 건달패들이네. 기욤. 아주 과격한 놈들이야.”
“건달들이야 죄지으면 경찰들 투입해서 다 감방으로 보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걸 왜 제게 와서 말씀하시나요?”
“하아. 그게 꽤나 복잡하다네.”
“복잡이라니요?”
시에예스 사제님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의회가 둘로 나누어지지 않았나, 내가 속한 부르주아파인 평원파와 로베스피에르 그 친구의 상퀼로트파인 산악파 말일세.”
“예, 뭐 그렇죠.”
재산 좀 있는 사람이나 땅 받은 농민들은 이제 평원파, 재산이 없거나 땅을 못 받은 도시 노동자들은 산악파.
“그런데, 뮤스카댕이라는 그 놈들. 죄다 부잣집 도련님들이야. 지금까지는 왕당파라는 낙인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으나, 이번에 프로이센과 맞서 싸우고 면죄부를 든 채 당당히 귀환한 부잣집 도련님들 말이네.”
답답한 건지, 시에예스 사제님은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한 숨 크게 들이마시었다.
“당연하게도 우리 평원파 쪽 사람들 중 그 뮤스카댕이라는 건달패가 있단 말이지. 그 놈들이 이번 전쟁에서 제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마땅한 보상을 줘야 된다고 깽판을 쳐놓고 있어.”
“그러게 단속을 좀 잘하시지 그랬어요.”
“이런 씨ㅂ···. 큼.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아무튼 간에 그 작자들은 이번 파리 재개발 사업 때문에 자기들 앞으로 올 참전보상금이 줄었다고 생각한다네.”
“으음. 전 분명 넉넉히 준 거 같은데.”
“내가 말했잖나, 부잣집 도련님들이라고. 하여간 이미 잘 살면서도 욕심이 많아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제 놈들 목숨 값이 더 중하다고 생각한 건지 자네한테 불만이 아주 많아.”
시에예스 사제님은 말을 멈추고 다시 파이프를 크게 들이마시었다.
“무엇보다, 그 놈들이 이러다간 산악파 쪽 과격한 분자들과 한판 붙을 지도 모르겠네. 특히 에베르, 당통 그 두 사람.”
“당통 의원은 상당히 온건한 사람 아닙니까?”
“당통 의원이 온건? 하, 자네 앞에서만 온건이지! 자네가 여기 파리에서 띵가띵가 놀 때, 베르사유에서는 무슨 설전이 펼쳐지고 있는지 아나?”
“아 몰라 몰라. 전 몰라요. 전 정치 안 하기로 했습니다.”
기욤이라는 도비는 돈만 만지는 요정이에요. 도비는 다른 사람 말 안 들어요. 돈의 말만 들을 거예요.
“산악파 친구들은 의회에서 하루 종일 공안위원회라는 걸 발족하자고 난리고, 우리 평원파는 그 뮤스카댕이라는 놈들 때문에 내홍을 겪고 있네.”
“그래서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답답한 친구야, 뭐긴! 당연히 자네가 지금 이 사태를 좀 원만하게 해결해 줄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거지!”
“엥, 제가요?”
“그러면 자네 말고 평원파와 산악파 사이를 조율할 사람이 누가 있나? 부르주아라는 점에서 평원파이기도 하고, 또 토지조사니 뭐니 시뻘건 정책을 펴는 점에서 산악파이기도 한 자네 말고는 조율해줄 사람이 없어.”
이런 젠장. 사제님. 제 손은 왜 또 잡으십니까, 놓으십쇼 제발.
***
프랑스 혁명왕국, 수도 파리.
파리 재개발 사업본부.
“다음, 들어오도록 하십시오.”
“그... 로베스피에르 의원님, 점심시간이 넘었는데 조금 쉬었다가 하시는 게 어떠신지...?”
로베스피에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려, 소리가 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큼큼...”
“라부아지에 선생, 조용히 하고 다음 사람이 무슨 물건을 가져왔는지나 제대로 살펴보시지요.”
“예, 예...!”
젠장할. 파리 재개발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모집하겠답시고 출품제를 연 기욤 때문에, 라부아지에는 졸지에 공정성을 검사한다는 빨갱이 로베스피에르의 옆에서 심사위원이라는 팻말을 달은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다음 들어오십시오. 잠깐만······ 윌리엄 머독 선생?”
“아, 라부아지에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머독 선생이 왜 여기...”
“제가 이번에 한 번 고안한 조명기구가 있는데, 한 번 출품해볼까 해서 말입니다.”
가스등이라고 합니다. 윌리엄 머독은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