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새로운 시대로의 출발 (1) (126/341)

새로운 시대로의 출발 (1)

“아버지, 더 안 드세요?”

“······오늘 따라 벌써 배가 부르구나. 예아네테. 나는 먼저 일어나 서재에 가 있을 테니 상관하지 말고 마저 식사하도록 하려무나.”

“예에.”

마이어는 아이들을 식당에 남겨두고, 계단을 올라 2층에 자리한 서재를 향했다.

한 발 한 발 계단의 단을 오를 때마다 벽에 올려 둔 선대 로스차일드들의 초상화가 마이어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프랑크푸르트의 빈민가 게토. 유대인 거리의 낡은 집에서, 이 프랑크푸르트 시청 거리의 저택까지 로스차일드를 끌어올린 가문의 영웅들.

고조부, 증조부, 조부.

그리고.

마이어는 계단을 오르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 모세 로스차일드.

신성로마제국의 선선대 카이저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찍은 ‘비열하고 교활한 유대인’이라는 주홍 글씨 때문에, 죽을 때까지 숨을 죽이고 살았던 아버지 모세 로스차일드.

초상화에 그려진 아버지의 주름 하나하나마다, 아들은 가슴 어딘가가 뜨거워졌다.

아들은 다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달카닥.

항상 그랬듯 서재로 들어가는 문을 열자, 의자에 앉으면 우측으로 난 창문으로 아름다운 도시 프랑크푸르트가 보이는 로스차일드 저택의 서재가 나타났다.

항상 그랬듯 의자에 앉아 파이프를 물었다. 이제는 거의 루틴이 되어버린 일상.

항상 그랬듯 파이프에 담긴 담뱃잎이 모두 타올라 재가 될 때까지 깊게 들이마신 마이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에 난 창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

마인 강을 끼고 만들어진, 신성로마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가 마이어의 검은 눈동자 속으로 들어갔다.

공무원들이 관공서에서 나와 기름등에 불을 붙이고는, 시청 입구에 기름등을 걸어놓기 시작하는 모습.

이제 시월에 접어든 탓인지, 사람들의 옷가지가 두터워진 모습이 군데군데 보이고 어떤 집은 벌써 땔감을 때는 듯 저녁시간이 지났음에도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

오늘 장사를 끝낸 마부가 말과 마차를 보관소에 메어놓는 모습.

사십칠 년이라는 세월을 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또 살아간 마이어는 그 모든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다가, 고개를 들어 어둑어둑해지는 밤하늘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높다.

참으로 높다.

가을 하늘은 참으로 높구나.

그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풍경을 이 서재 창문에서 보았건만, 오늘따라 창밖으로 보이는 프랑크푸르트의 가을 밤하늘은 말 그대로 공활하기 그지없었다.

마이어는, 아이들이 어릴 적에 너도 나도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고 눈을 빛내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래. 저렇게 높고 청명한 하늘을 날아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마이어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 앞 탁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탁자 위에 어지럽게 자리한 각종 은행장부와 회계장부, 그리고 어둠을 밝히며 빛을 발하는 일곱 개의 촛대를 잠시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헤센 방백작이 맡긴 금전을 수배로 부풀리는데 성공했다는 증거이자, 마이어의 노력이 담겨 있는 증거 그 자체.

그리고 마이어가 신께서 점지해준 신성한 노동 대신 돈이나 만지는 천한 유대인이라는 증거 그 자체이기도 했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사십칠 년 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런데 달려도, 또 달려도, 더 이상 뛸 수 없을 때까지 달려도, 결국은 유대인이라는 족쇄가 항상 발목을 잡고 넘어졌다.

- 짐은 유대인보다 더 큰 재앙을 보지 못했다. 속임수와 고리대금과 탐욕으로 내 백성들을 거지로 몰아넣는 역겨운 작자들. 가능한 유대인을 멀리하고 내쫓아야 할 것이다.

크게는 카이저.

- 로스차일드 경이 이번에도 실로 큰일을 해내주었소. 로스차일드 가문이 우리 백국의 가신이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돈이 허투루 나가지 않았으니 이를 치하해야 마땅···.

- 각하, 하오나 로스차일드 경은 유대인입니다. 예수를 해한 제 족속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당연히 노력해야지요! 부디 청을 거둬주십시오, 각하!

- 으음... 그런가...?

작게는 방백국의 가신들 까지.

조금이라도 달음박질을해서 하늘을 날아보고자 하면 꼭 족쇄에 걸려 바닥에 넘어졌다.

마이어는 천천히 탁자를 향해 다가간 뒤, 손이 뜨겁지 않게 촛대 아래쪽을 잡고 천천히 들어올렸다.

노랗게 일렁거리는 불꽃이 내뿜는 열기가 마이어의 얼굴에 와 닿았다.

어둠을 밝히는 일곱 개의 촛대, 메노라.

유대인의 상징 일곱 개의 촛대, 메노라.

마이어는 잠시 그 불꽃을 쳐다보다가, 촛대를 가지고 아직도 높게 솟아있는 하늘을 담아놓은 창문 앞으로 향했다.

생각해보면 이 촛대 때문에 삶이 더 어두워졌으면 어두워졌지, 결코 밝아진 적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예루살렘에서 한 번 유대인들을 밝혀주었으니 언젠가 한 번 쯤은 우리 앞을 밝혀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말이다.

수상할 정도로 마이어에게 집착하는 이상한 프랑스인이 하나 있더라.

- 선생님, 저와 일 하나 한 번 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혹시 마이어 씨께서는 저와 제 사업체인 이삭의 민족과 항구적인 협력을 해볼 용의가 있으신가요?

- 푸우웁!! 에? 뭐, 뭐라구요? 안하시겠다고요? 왜, 왜?

- 날 따라오면, 로스차일드 가문을 제 2의 베어링 가문으로 만들어주겠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탄압받지 않고,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말입니다.

베어링 가문이라니.

영국 국왕의 신임과 암스테르담의 금융, 양모 사업까지 하는 베어링 가문처럼 우리 로스차일드 가문을 그렇게 만들어주겠다니.

퍽도 큰 꿈 아닌가.

아니, 퍽도 큰 꿈도 아니지. 너무나도 큰 꿈이다.

마치 하늘을 날게 해주겠다는 말마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소리임에도 마이어의 가슴은 왜 뛰고 있는 걸까.

- 그 누구에게도 탄압받지 않고,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말입니다. 프랑스에서 꿈을 펼쳐보시지 않으시렵니까?

“프랑스라.”

마이어는 작게 읊조렸다.

프랑스라는 하늘에서는, 마이어도 날 수 있을까?

마이어는 탁자 위의 펜을 들고,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 글자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날아보자.

-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 각하께.

딱 한 번만 날아보자.

- 안녕하십니까, 각하.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입니다.

정말 딱 한 번만 날아보자.

- 각하께서 주신 제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1791년 10월 10일.

신성로마제국. 쾰른 선제후국, 본 남쪽 26km.

프로이센군이 클레베로 줄행랑을 치고, 종전협상이 진행된다는 소식이 파리에서 전해진지도 어언 일주일째.

“장군님.”

“커어...”

“장군님.”

“컥..커어어...”

“장군님!”

“어, 어어... 니콜라 다부 자네인가?”

“예, 그렇습니다. 뒤무리에 장군님.”

부관의 독촉에, 프랑스 제 1원정군 사령관 뒤무리에는 부스스한 몰골을 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에게 재산을 잃은 슬픔 때문인지, 아니면 프랑스인들과 국토가 적에게 유린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슬픈 건지.

모종의 이유와 더 이상 군을 움직일 이유의 부재로 인하여, 어젯밤 와인을 마치 물 먹듯 배 안으로 털어 넣은 뒤무리에는 심각한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적이라도 나타났나? 종전협상이 결렬되기라도 했나? 무슨 일로 깨웠나.”

뒤무리에는 물 컵에 담긴 물을 마시며 입을 열었다.

“재무총감께서 와 계십니다.”

“푸우웁!! 쿨럭! 쿨럭! 다부 참모장! 그런 건 미리미리 말해야 되는 거 아닌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해 죄송합니다, 장군님.”

1군 참모장, 니콜라 다부는 놀란 탓에 사례가 들려 콜록대는 뒤무리에의 모습에도 담담하게 얘기했다.

“······젠장할.”

뒤무리에는 사관학교에서 배운 대로만 행동하는 이 FM부관이 참으로 꼴보기가 싫었다.

물론 라파예트 사령관이 뒤무리에 자신을 의심 섞인 눈빛으로 감시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앞뒤가 꽉 막힌 장교를 강제로 참모장 겸 감시역으로 붙이다니.

이건 조금 과한 거 아닌가.

차라리 오를레앙 그 놈한테 끝까지 붙을 걸 그랬나?

그러나 뒤무리에의 조그마한 역심(逆心)은 한 사내의 등장으로 햇빛에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이야 야전인데도 잘해놓고 사시는군요?”

“아이고, 총감 각하! 어찌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직접 행차하셨습니까!!”

“아니, 술 냄새가 무슨... 뒤무리에 장군님, 술을 대체 얼마나 마신 겁니까?”

이 대머리 군인 아저씨야. 왜 나한테 앵기려고 해. 저리가 훠이. 훠이.

“하..하하, 죄송합니다. 각하!”

“이 저택, 빌리는 값은 제대로 원 주인에게 지불했겠죠?”

“······예? 전쟁에서 민간인 징발은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각하.”

“하아. 당장 저택 주인 찾아서 데려오십시오.”

“예, 예! 각하!!”

자국민도 아니고 외국인 집을 강제로 징발해놓고 뭐 그리 당당한지.

아, 아니야. 지금은 21세기가 아니라 18세기다.

그래, 사람 머리 뼈가지고 뼈가 크면 우월이니 뼈가 작으면 열등이니 하는 골상학이 정식 학문으로 인정받는 인외마경이라고.

그보다 이러면 나중에 우리 이삭의 민족이 독일에 진출할 때 이미지가 안 좋아지잖아! 불매운동은 사절이야 사절.

나는 한 병사가 데리고 온 이 집의 집주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름이?”

“프란츠. 프란츠입니다.”

“며칠 정도 집을 빌려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프랑스어를 잘 모릅니다.”

“아, 그렇습니까? 마이어 씨! 여기 통역 좀 해주시지요.”

“예, 각하.”

아, 새로 얻은 포켓몬 성능이 참 만족스럽단 말이야.

“그러니까 십 일을 빌려주셨다 이거지요.”

“그렇습니다.”

“하루 임대료로 1 리브르, 그러니까 1 굴덴을 지급해드리겠습니다. 10 굴덴! JA?”

“아! JA! JA! Danke schön!!”

마이어 씨가 건넨 금화를 받은 집주인은 희희낙락하며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것 때문에 트리어에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각하?”

“아니요. 뒤무리에 장군님 때문에 왔지요.”

내 말에 뒤무리에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걱정하지마시죠, 당신 해코지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낭시를 요새화하는데 쓴 재산이 다 합쳐서 얼마정도 되십니까?”

“예?”

“뒤무리에 장군이 턴 사재가 얼마나 되냐, 이 말입니다.”

“재, 재무총감 각하, 그 말씀은?”

“예. 이번 프로이센이 지불할 배상금에 같이 넣어서 받을 테니, 어서 알려나 주십쇼.”

“크흐흡!! 각하!! 이 샤를프랑수아 뒤무리에!! 각하께 충성하고 또 충성할 뿐입니다!!”

아니 좀 앵기지 말라고요.

“그런데, 각하. 사람을 보낼게 아니라, 굳이 각하께서 이렇게 오실 이유가 있으신지요?”

“왜긴요. 장군님께서 제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재무부 직원보다는 제가 직접 와야 장군님께서 거짓말할 생각이 안 드시지 않을까요?”

“하...하하하... 역시 총감님의 혜안이란!!”

***

외무차관 탈레랑은 배상금 액수가 적힌 종이를 슥-하고 내밀었다.

“이, 이건 너무 과한 금액 아닌지...”

“과하다? 우리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시고 인민들의 재산과 목숨을 앗아가 놓고 과한 금액 운운하십니까?”

“그, 그것이 아니고... 금액을 조금 낮춰줄 수 있냐는 말이지요...”

“시끄럽고 서명이나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잠시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끝나자, 프로이센 대표는 자신이 이름이 서명된 종이를 탈레랑에게 건넸다.

“좋습니다. 향후 이런 비극이 또 다시 되풀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탈레랑 차관.”

“외무장관님, 너무 과한 액수에 싸인 하신 거 아닙니까?”

“뭐, 프랑스에 뜯긴 만큼, 폴란드를 뜯어서 채우면 되지 않겠나.”

그 날, 폴란드의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는 영토할양 고지서에 도시 세 개를 추가하라는 협박을 받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