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빛나거나 미치거나 (9) (105/341)

빛나거나 미치거나 (9)

옛날 옛적, 프랑스 파리에는 기욤이라 불리는 아이가 살았습니다. 기욤은 조그맣고 번쩍이는 동그란 금속덩어리를 정말 좋아하는 착한 아이었답니다.

- 로베스피에르 의원, 오랜만이오. 파리에서 보니 반갑구료. 의회에서 보았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거의 1년은 된 것 같으이.

- 소신,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선왕 폐하를 뵈옵니다.

시끄럽고 무서운 바깥세상을 싫어한 기욤은, 자신과 친구들만이 지낼 수 있는 작고 포근한 땅굴을 파기로 결심했어요. 그래요. 아주 포근한 땅굴 말이에요.

- 허허, 선왕은 무슨. 그냥 시민 루이 오귀스트라고 불러주시게나. 나도 이제는 ‘짐’이나 ‘과인’보다는 그 쪽이 더 편하고 마음에 든다네.

-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루이 오귀스트.

- 자, 모두들 인사치레 끝났으면 슬슬 시작하도록 하지요. 기욤 군?

그러나 베르사유에서 온 나쁜 어른들은 기어코 기욤이 꼭꼭 숨겨놓은 땅굴을 찾아 억지로 들어오고 말았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흑흑.

“···기욤 군?”

“예? 아, 예.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베르사유에 즐비한 정치괴물들을 피해 겨우 도망쳐 나왔더니. 나의 조그마한 안식처, 이삭의 민족 사무실에까지 그 괴물들이 찾아 왔잖아? 뭐, 손수 찾아가는 고객 만족 서비스 그런 거냐.

“그래요. 시작해봅시다, 여러분. 일단 우리를 모은 시에예스 사제님부터 한 번 말을 꺼내보시는 거 어떻습니까?”

“알겠네.”

시에예스 사제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입을 열었다.

“우선,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오를레앙을 단두대로 보내는 것은 중대한 실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프랑스 주변에 있는 국가들의 면면을 한 번 살펴보시지요.”

시에예스 사제님은 탁자에 놓인 지도를 한 군데 한 군데 짚으며 다시 말했다.

“일단 신성로마제국부터 얘기하겠습니다. 본 사태 이후 잠시 위태로웠으나, 황자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군으로 공화주의자를 싸그리 깔아뭉갠 뒤, 새로운 카이저인 레오폴트 2세의 지도 아래 다시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스페인.

“스페인도 문제입니다. 일단 루이 오귀스트... 죄송합니다. 차마 -씨라고는 못 부르겠군요.”

“허허, 나는 시민이 더 듣기 좋다만, 의원이 그렇다면 뭐. 대공이라고 해주시구려.”

“후, 배려 감사합니다. 루이 오귀스트 대공과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다시피, 스페인도 우리 프랑스와 같이 부르봉 왕가입니다. 같은 왕가사람 목이 달아나는 걸 그 자들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겁니다.”

다음은 프로이센.

“프로이센도 지금은 선대 왕 프리드리히 시절 흡수한 슐레지엔과 다른 지역들을 소화하는데 급급하지만, 오를레앙의 목을 자르고 우리가 전 유럽의 관심을 받게 되면 스리슬쩍 그 사이에 껴서 어떻게 해서든 떡고물 하나는 먹으려 들 겁니다.”

시에예스 사제님은 지도 끝에 있는 광활한 크기의 국가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러시아는... 글쎄요. 지금 당장 튀르크와 전쟁 중이라 우리에게 군대를 보내지는 못하겠지만, 전쟁이 끝난다면 무조건 우리에게 선전포고와 함께 군대를 보낼 겁니다. 푸가초프의 내란이후, 예카테리나 2세는 굳건한 전제정치의 신봉자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은 영국이겠구려. 그렇지 않소, 시에예스 의원?”

“맞습니다, 대공. 영국은, 솔직히 말해서 저로서도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시에예스 사제님은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갸웃거리며 좌우로 저었다.

“왜죠, 사제님? 영국이라면 당연히 우릴 치지 않을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얼마 전 현 집권 여당인 토리당의 윌리엄 피트 수상이 프랑스 혁명에 대해 지지연설을 했다네.”

“예?”

불세출의 프랑스 담당 일진, 5백년의 괴뢰 원쑤, 영국이 왜 우릴 지지해? 오히려 총폭탄 정신으로 우릴 조져야 하는 거 아닌가?

“제들 딴에는 우리 혁명파 보고 영국의 명예혁명을 본 땄다니 뭐니 하면서 말하더군.”

“그러니까 그 윌리엄 피트라는 자가, 우리가 제 놈들 명예혁명을 따라했다고 생각해서 지지연설을 했다는 겁니까?”

“르브렁 외무장관은 그렇게 말하더군, 기욤.”

설마... 소위 말하는 국뽕이라는 건가.

‘오백년의 원수, 프랑스가 벌벌 떨고 탄식하며 영국의 명예혁명을 따라한 이유.’

오 다음 <포브스> 기사에 실어도 되겠다 이거. 안 그래도 이번에 영국에서 수입금지 먹었던데, 이참에 영국인 바지사장 하나 고용하고 자회사 만들어서 한 번 찍어 내봐? 이름은... <더 선>이나 <데일리 미러>로 하면 되겠네. 생각해보니까 그러면 외화도 벌어오고 아주 일석이조 아닌가?

“허, 도저히 못 참겠군! 영국 그 참칭자 해적 놈들이 어딜 감히 우리 프랑스 일에 포크를 들이민단 말인가!”

시민 루이 오귀스트는 그 커다란 몸을 벌떡 일으키곤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큼큼. 아무튼 간에, 영국은 현재로서는 딱히 우리 프랑스를 적대시하는 것 같지 않지만, 이쪽도 오를레앙의 목이 달아난다면 당장 전쟁은 아니더라도, 우리를 그리 좋게 보지는 않을 겁니다. 이상으로 이 엠마뉘엘 시에예스의 의견은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로베스피에르 의원, 시에예스 사제님, 루이 오귀스트, 그리고 나까지 네 사람 사이에 적막만이 흘렀다.

“···그렇다면 이제 저, 로베스피에르가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적막을 깬 사람은, 아직 단두대라는 각성 아이템을 얻지 못한 우리의 로베스피에르 의원이었다.

“오를레앙은 죽어야 합니다.”

젠장, 아직 미각성 상태일 텐데 첫 마디부터 대단하군. 제발 깜빡이 좀 키고 들어와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나 그런 내 마음과는 정 반대로, 로베스피에르 의원은 깜빡이 따위는 무시한 채 계속해서 풀악셀을 밟았다.

“전 개인적으로 사형에 반대합니다. 사형으로는 우리가 범죄자를 잡아넣는 근본적인 이유인 교화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이필리프... 그 자의 이름은 입에 담기도 싫군요. 아무튼 그 놈은 다릅니다. 그는 우리 프랑스 시민들이 만든 정의와 도덕을 배신했습니다. 애초에 법을 반대하고 밖에서 군림하던 그 자를 우리가 억지로 관대한 법의 정신 앞에 데려다 놓을 이유 따위는 하등 없다는 것입니다.”

로베스피에르 의원은 말을 멈추고, 미리 떠다놓은 우유 한 잔으로 목을 축인 후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또한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국가, 모든 인민이 존중받고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가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선. 그 인민의 권리를 짓밟고자 한 잔인한 사람에게, 관대한 법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선례를 만든다면 후대에 또 다시 위정자의 자리에 오른 누군가는 그러한 선례를 믿고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평범한 시민들의 신체와 재산, 그리고 권리를 탄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를레앙 그 자에게 관대함을 베푸는 것은, 신께서 알려주신 미덕이 아니라, 한낱 해적과 마적 떼가 금화를 나누는 추악한 관대함이며, 후대의 독재자들에게 줄 면죄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우리 프랑스 시민들이 살아갈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오를레앙은 죽어야 합니다. 그가 죽지 않는다면, 미래에 있을 시민들이 죽을 테고, 혁명이, 나라가 죽을 테니.”

이상입니다. 로베스피에르는 그렇게 뒷 붙인 후,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오늘 밤은 뜬눈으로 다들 보내실 텐데, 모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시죠. 다들 생각이 많으실 거 아닙니까.”

“그래, 그렇게 하겠네. 기욤 군.”

“저 또한, 그 뜻에 따르지요. 재무총감 각하.”

“그래, 나도 두 사람처럼 그게 낫다고 보네.”

***

쓰으읍.

후우.

“담배가 쓰다아아.”

원래도 이렇게 썼던가? 모르겠다, 진짜.

“···어떤가, 기욤 군. 쉽지 않지?”

“저 시에예스 사제님이 처음으로 싫어질 것 같은데요.”

“하하하, 그런가?”

시에예스 사제님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나처럼 파이프를 입에 꼬나물었다.

“그래도 좀 이해해주게. 내가 얼마나 힘들면 자네를 부르겠는가?”

“···쩝.”

“대신 내가 질 좋은 담뱃잎으로다가 한 상자 구해주겠네. 어떤가?”

“···허, 그래도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은 아니셨군요. 이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하, 하여간 장사치 아니랄까봐 오고 가는 건 확실하구만.”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파리의 여름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참을 숙덕였다.

“···로베스피에르 의원도, 대단한 사람이야. 그 친구가 하는 말 중 허투루 된 게 하나 없네.”

“그렇습니까?”

“그럼, 당연하지. 다만... 로베스피에르 그자는 너무 이상을 좇는 기분이야. 그래, 오를레앙이 죽지 않고, 우리가 그 자에게 면죄부를 준다면. 미래에 독재자 중 누군가는 별 걱정도 없이 사람들을 죽이고 제 이익만을 추구할 수도 있어. 안 그런가?”

“그렇죠.”

“그래. 그런데 미래가 그렇다고 해서 현재를 위험한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지 않나.”

“관점의 차이 아닐까요.”

“그래, 그런데 그 관점의 차이로 말미암아 이 프랑스에 사는 2700만 민중의 앞날이 걸려있지 않나. 난 이만 들어가보겠네. 자네처럼 파릇파릇한 나이가 아니라서, 여름이라고 해도 밤공기를 많이 맞으면 몸이 시들시들해지더군.”

“예, 들어가세요.”

시에예스 사제님은 내 등을 몇 번 토닥이고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 혹시 얘기 다 끝낸 겐가?”

“누구... 루이 오귀스트 대공?”

“하하, 나도 자네와 오랜만에 말 한 마디 해보고 싶어서 말이네.”

“아니. 새삼스럽게 왜 그러십니까?”

이제 마흔보다 쉰에 가까운 193센티 아저씨가 나한테 왜 이러시는 거지.

“거 참. 이참에 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재무총감과 인연을 만들면 어떨까 할 수도 있지. 안 그런가?”

“···이미 우리 둘 사이 인연은 꽤 많이 얽힌 것 같은데요?”

“허허. 젊은 친구가 이렇게 유머감각이 없어서야 원.”

곰돌이 푸처럼 배가 통통하게 나온 중년 아저씨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로베스피에르 저 친구, 원래 저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친구인가? 아주 간담이 서늘하구만.”

“···원래는 더 냉담한 사람일걸요?”

겨우 저것 가지고 그러시다니, 너무 약하시군, 루이 오귀스트.

원래 역사대로라면 단두대와 공안위원회를 양손에 쥐고 칼춤을 추던 인간백정, 이오시프 로탈린인데 말이야.

아, 스탈린보다 로베스피에르가 앞서니까 로탈린은 아닌가.

“저것보다 더 냉담하다고? 그것 참 소름이 돋는군.”

“왜요, 오를레앙 대신 루이 오귀스트 대공이 그 자리에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까, 오금이 저리십니까?”

“무, 무슨!! 이렇게 건장한 남자가 겨우 그런 거에 떨 것 같아 보이나?”

“그렇다기에는 온몸에 닭살이 올라 계신데...?”

“허, 허흠. 흠. 날이 참 쌀쌀해서 그런 게지.”

지금 여름인데.

“걱정하지마세요, 대공. 로베스피에르 의원님이 과격하시긴 해도 죄 없는 자에게 죄를 물을 사람은 아니니까. 적어도 ‘루이 오귀스트 대공, 어찌하여 목만 오셨소’같은 상황은 없을 겁니다. 어. 잠깐만...”

“그, 그렇지? 자네 말대로 난 괜찮겠지?”

“아니, 잠깐만 조용히 있어보세요. 대공.”

어찌하여 목만 오셨소...

어찌하여...

“대공. 들어가시죠. 답이 나왔네요.”

“···날 산제물로 삼을 생각은 아니리라 믿겠네.”

아잇. 그런 거 아니니까 빨리 들어가시라고.

***

“오를레앙, 죽입시다.”

“뭐, 뭐라고?! 아니 기욤 군, 자네 지금!!”

“후우. 그렇지요. 그게 맞습니다.”

“······.”

거 참 다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지.

“그리고 죽이지 맙시다.”

“···기욤 군, 그게 무슨...?”

“예?”

“······?”

나는 얼떨떨해 보이는 세 사람을 보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죽이되, 죽이지 말자구요.”

그렇게 미친놈 보듯 쳐다보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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