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빛나거나 미치거나 (4) (100/341)

빛나거나 미치거나 (4)

씨이이이바아아알...

세상에 팔다리를 잘라놓으니까 그 팔다리가 저절로 움직여서 반란을 꾀하고 있었다니 지금 장난해? 니가 무슨 크라켄이야? 아니면 에일리언이야?

단두대, 단두대 어디 있지?

단두대가 필요해!

아 기요탱 박사님한테 물어보면 하나 쯤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자르는 건... 그래 로베스피에르 의원님한테 맡기면 알아서 깍뚝썰기부터 돌려깍아썰기, 반달썰기까지 해주시지 않을까.

오를레앙 이 새끼 이번엔 정말 머리를 잘라주마.

심장이 벌렁벌렁 요동친다. 자칫 잘못했으면 자다가 뒤통수 제대로 맞았을 거 아니야. 구밀복검(口蜜腹劍)이 따로 없네 진짜.

“손님, 베르사유에 도착했습니다요.”

“남는 건 가지던지 하세요.”

“아이고 이게 웬...! 감사합니다요! 부디 살펴가십쇼!”

마부는 내가 손을 건넨 금화 한 닢을 받아들고 희희낙락하며 말했다.

삯의 두 배는 가뿐히 넘길 돈이지만, 살인예고장이나 다름없는 편지를 받은 내게는 지금 여유롭게 거스름돈이나 받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다. 머뭇거릴 틈이 없다!

“충성, 재무총감 각하 아니십니까. 그런데 베르사유까지는 무슨 일로···?”

“라파예트 사령관님은 어디계십니까.”

“라파예트 사령관님이라면 지금쯤 3층 참모부에 켈레르만 장군님과 함께 계실 겁니다. 안내해드릴까요, 각하?”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전에 한번 와 본적 있어서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초병의 말에 손사래를 치곤, 계단을 뛰어올라 참모부를 향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그런데 왜 디저트가게도 아닌 참모부 복도에서 달짝지근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 거지?

아니, 지금 그런게 중요한 게 아니지.

수상하리만치 달달한 냄새와 커피냄새가 뿜어져 나오는 참모부보다는 오를레앙 이 씹어 먹을 새끼가 내 뒤통수에 칼을 꽂기 직전인 게 백배 천배 중요하다.

똑똑

“라파예트 사령관님, 저 재무총감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눈앞에 펼쳐진 충격적인 광경에 방금 전까지 핑핑 돌아가던 내 뇌가 멈추고,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퀴퀴해진 눈으로 무얼 열심히 손으로 써내려가는 가엾은 장교들 사이로 커피 잔, 파이 그릇과 서류더미가 참모부 곳곳에 산처럼 올라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게 무슨... 여긴 인외마경인가?”

마치 내 재무총감 초기 시절을 보는 듯 한 광경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아니. 인외마경은 아니고, 끝없는 서류를 처리하는 무간지옥이라고 해야 하나?

“하하, 인외마경이라니요. 안 본 사이에 비약이 늘어나셨습니다, 총감.”

어느새 내 뒤에서 스리슬쩍 나타난 라파예트 사령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몇 달 전 방문했던 참모부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만.”

“뭐, 아무래도 이번 야전 훈ㄹ···. 실례, 말이 헛나왔군요. 아무튼 편제를 한 번 싹 뜯어고칠 필요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아, 그리고 지금 작업을 도와주는 저 친구들 모두 총감이 추천해준 평등클럽원들입니다. 오랜만에 한 번 인사 나눠보시겠습니까?”

“추천해달라는 게 쓸 만한 노예를 거둬 가시려고 추천해 달라는 거였습니까?”

“노예라니요! 다들 자랑스러운 프랑스 군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 뿐 인데요. 하하. 그래서 어떻게, 잠시 인사 나누게 비켜드릴까요?”

흠. 자기를 악덕주인에게 팔아넘긴 노예상에게 노예는 어떤 감정을 품을까? 결코 좋은 감정은 아닐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그보다 드릴 말이 있···.”

그러나 내 마음과는 달리 현역 국방사령관과 기획재정부 장관이 모여 얘기를 나누는 광경은 어마어마한 어그로를 끌고 있었다.

“···기욤? 저 새끼 기욤 맞지?”

“뭐? 기욤 드 툴롱?”

“우릴 라파예트 사령관께 팔아넘긴 개자식?”

싱싱한 고기 기욤 드 툴롱을 보자, 방금 전까지 혼이 나가있던 좀비들의 눈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하고 책상과 한 몸이 됐던 저주받은 몸뚱이들이 삐그덕 대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야 이거 잡히면 뼈도 못 추리겠는데.

“라파예트 사령관님, 둘이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어떠십니까?”

“급한 일이신가요?”

“굉장히 급한 일입니다.”

“···총감이 그렇게 얘기한다면 보통 일은 아닌 것 같군요.”

라파예트 사령관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

나와 라파예트 사령관은 합법적 노예들로 가득 찬 참모부를 나와 사령관실로 이동해 자리에 앉았다.

“마시면서 하시죠. 커피?”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자, 여기 국민방위대 사령관이 탄 특제 커피입니다. 어디 가서 못 마시는 거니 충분히 음미하면서 드시지요, 하하.”

내가 커피를 받자, 라파예트 사령관은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신데 그렇게 호들갑이십니까. 총감.”

“···이걸 봐주십시오. 사령관님.”

나는 품에서 돌돌 말아놓은 ‘오를레앙의 사악한 계획이 담긴 두루마리’를 꺼내 라파예트 사령관에게 건넸다.

“흠 이게 뭔가요?”

사령관은 내가 건넨 두루마리를 받고는 그걸 촤르륵 펼치며 말했다.

1초.

2초.

3초.

“···이런 씨발.”

오를레앙의 사악한 계획이 담긴 두루마리의 효과는 굉장했다! 신사 라파예트 질베르 뒤 모튀에의 입에서 걸쭉한 욕이 튀어나오기까지 겨우 3초 밖에 걸리지 않았다니 말이야.

“후우... 이게 대체 무슨...”

라파예트 사령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이건 대체 어디서 입수하셨습니까, 기욤 총감.”

“뒤무리에 장군이 전해줬습니다.”

“뒤무리에? 설마 왕실근위대장 뒤무리에 말하시는 겁니까? 젠장 머리가 더 아파오는군요. 하아.”

이제는 양쪽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한 라파예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생각에는 투항의 의미로 총감에게 이걸 준 것 같은데, 총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왕당파 수구꼴통이 투항이요?”

“젠장, 투항도 아니라면 대체 무슨 뜻으로 제 계획을 알려줬을까요. 뒤무리에 그 자도 멍청한 자는 아닙니다. 나름 병참부 차장 출신에 별까지 단 유능한 인사란 말이지요.”

라파예트 사령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에 놓아둔 코냑을 꺼내 잔에 따르며 말했다.

“왕당파 사이에 내분이 난 건 아닐까요, 사령관님?”

“내분이라. 뒤무리에가 오를레앙과 싸우기라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총감?”

듣고 보니까 또 이상하네. 오를레앙의 총신이 내분을 일으키다니 말이야. 관우, 장비가 유비한테 쿠데타를 했다는 그런 느낌인걸.

“···결정했습니다, 총감.”

한참 침묵을 지키던 라파예트 사령관과 나 사이의 적막을 깨고, 라파예트가 말했다.

“뭘 말씀이십니까?”

“우릴 유인하기 위해 거짓정보를 흘렸던, 아니면 정말 투항의 의미건 한 가지 확실한건 왕당파들을 합법적으로 밀어버릴 수 있는 기회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말씀은... 설마 정변을 일으키는 걸 방조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라파예트는 대답 없이 코냑이 담긴 잔을 들어 목 뒤로 넘겼다.

"작전계획을 보니 이건 하루 아침에 날림으로 만든 게 아닙니다, 총감. 그 말인즉슨, 이번 한 번만 피를 보면 프랑스의 왕당파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지요."

“상당히 많은 희생이 흐르지 않겠습니까?”

“총감. 오히려 지금까지 피가 안 흘린 게 이상한 겁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얘기를 태연스럽게 하는 라파예트 사령관의 모습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총감. 총감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우리 프랑스가 여태까지 불안하긴 했어도 잔혹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건 모두 총감 덕이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총감이 아니었다면 이미 프랑스는 파산해, 혼란으로 점철됐을 겁니다.”

“너무 띄워주시는데요. 사령관님.”

“총감도 절 많이 띄워주셨으니, 저도 예의 상 응당 한 번 띄워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나는 라파예트 사령관에게서 시선을 옮겨 두 손으로 쥐고 있는 커피 잔을 바라보았다.

라파예트가 준 커피 잔 안은, 이따금 씩 자그마한 파동이 오고가는 것 말고는 너무도 잔잔했다.

우리가 주고받는 이야기와는 다른 세상같이.

“···피가 꼭 흘러야 하겠습니까, 사령관님?”

“총감. 미국이 영국의 압제에게서 독립할 때도 피는 흘렀습니다. 정의롭고 자유로운 새 시대를 열기 위함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국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선 어찌 되었든 피가 필요한 법입니다.”

지금까지 딱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

의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근위대원의 총칼 앞에 당당히 가슴팍을 내밀던 그 때의 당당한 얼굴로, 라파예트 사령관은 내게 말했다.

***

“자, 제군들?”

그 말 한 마디에 참모부의 장교들은 다 함께 몸을 움찔하며 부르르 떨었다.

곳곳에서 침이 목울대를 거쳐 목을 넘기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사령관 라파예트가 저렇게 나긋나긋 부를 때는 딱 한 가지 이유 뿐.

일을 더 시키겠다.

“지금 쓰고 있는 작전계획 말고 새로 하나를 더 만들어야겠습니다.”

라파예트는 그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젠장. 세달 간 저 간악한 노예주 라파예트의 밑에서 단련된 감은 불행하리만치 정확했다.

곳곳에서 끄응-하며 눈을 감는 동료들.

그래도 하늘보다 높고 푸른 막대기가 달린, 라파예트 사령관의 금색견장이 내린 명령에 대들고자 하는 만용의 불나방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아 서러워라.

그래도 괜찮다. 작전 계획이야, 몇 달 간 참모부에서 구르면서 질리도록 짜지 않았나.

그리고 원래 있던 작전을 조금 변형시키고 살을 덧대면 되는, 그나마 쉬운 일이니.

“사령관님, 어떤 작전 계획을 원하시는지...”

“하하, 별건 아닙니다. 낭시와 자레브에서 적이 준동한다면 어떻게 맞서 싸워야할지, 지금부터 딱 3시간 안에 가져와 주세요.”

낭시와 자레브? 아니 국경인 알자스-로렌도 아니고 프로방스도 아닌, 갑자기 프랑스 내부에서 적이 왜 나타난다는 말이지?

저주스럽다. 방금 전 쉬운 일이라고 운운한 자신이 한 없이 저주스럽다.

국가 외부의 적을 상대하는 거면 몰라도, 국가 내부에서 적이 솟아나는 걸 상대하는 작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참모부 모두의 눈이 다시 퀭해지기 시작했다.

젠장할, 우릴 팔아넘긴 기욤 그 자식이 아까 보였을 때 권총으로 쏴버릴 걸 그랬다.

“그래도 힘을 합치면 빨리 짤 수 있지 않을까...?”

“난 이제 호박파이 그만 먹고 싶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히...히히.”

갑작스러운 일거리에 하나 둘 씩 미쳐간다.

힙을 합쳐? 이게 힘을 합친다고 될 문제인가? 고기? 헛소리 아침은 호박파이에 커피, 점심은 커피파이에 호박, 저녁은 호박커피에 파이인 참모부에서 무슨 헛소리인지.

그리고 그 순간.

“사, 사령관님! 큰일 났습니다!”

“음? 무슨 일입니까?”

입구를 지키던 초병이 달려와 라파예트에게 경례를 올려 붙이곤 속사포처럼 말했다.

“아, 아르투아 백작이 프로이센과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를 공격해 줄 거라고 프랑스 전국에 격문을 돌렸답니다!”

참모장교 한 명은 그 말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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