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빛나거나 미치거나 (3) (99/341)

빛나거나 미치거나 (3)

‘군주는 신이 부여한 신성과 권한으로 통치한다. 만민은 군주를 우러러보고 따라야한다.’

왕권신수설.

태양왕으로 군림하던 루이 14세 이후, 수많은 유럽 군주들과 왕이 줄기차게 읊어댄 말이자 이상.

21세기에 누군가가 저런 말을 한다면 미국에서는 ‘니가 뭔데?’ 소리를 들으며 12게이지 샷건 납탄을 맞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국왕 폐하! 거기로 한 놈 더 올려 보냅니다!’ 소리를 들으며 루브르 박물관에 한편에 장식되어있는 단두대를 가져와 목이 잘렸을 테고,

여타 다른 나라들에서도 죽창으로 배가 뚫렸으면 뚫렸지, 결코 좋은 소리는 못 들을 일이지만.

18세기는 몇몇 ‘이상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당연히 맞는 말 아니야?- 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갑작스럽게 이웃 나라에서 군주가 반강제로 퇴위된다?

그것도 왕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낱 평민들 따위에 의해서?

감히 신이 내린 신성을 짓밟는다는 건가?

유럽 각국의 위정자나리들은 이에 상당한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나라 안의 계몽주의자니 자유주의자니 하는 먹물 좀 먹은 놈들은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는 신대륙 야만인들, 그러니까 미국을 본받자며 헛소리까지 지껄이니 군주들 입장에서는 마치 새벽에 모기 한 마리가 들어와 온 방을 헤집는 듯 한 기분이었다.

가장 광기어린 행동을 보인 건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였다.

- 세상에, 혁명이라니! 농민들이 지식을 쌓고 자유를 얻는다면 우리가 이룩한 모든 문명은 무너지고 말 겁니다! 아아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우리 러시아제국은 전 유럽의 문명국이 군대를 모아, 프랑스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를 잠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예순 살짜리 슬라브 할머니는, 예수가 재림한 것도 아닌데 혼자 세상이 떠내려갈 듯 호들갑을 떨며 하루가 멀다 하고 빈의 쇤브룬 궁전과 베를린-포츠담의 상수시 궁전, 런던 버킹엄 궁전에 악성 스팸메일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유럽 연☆합☆군♚♚지금 다 함께 프랑스 치러 가기☜☜]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우리 신성로마제국으로서는 현재 내홍을 다스리는 게 우선입니다.”

역시 외모와 혈통, 그리고 세치 혀로 중유럽을 먹은 합스부르크답게. 신성로마제국은 멋진 외교적 수사를 곁들여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했다.

“허 참, 프리드리히 대왕님께서 세상을 떠나니 그 동년배인 예카테리나 저 뱀 같은 여자도 슬슬 갈 때가 됐나보군. 튀르크 야만인들과 이미 전쟁을 치루는 러시아 주제에 프랑스와 또 전쟁을 일으키겠다니 말이네.”

“어찌 할까요? 빌헬름 국왕 폐하.”

“대꾸할 값어치도 없네.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적당히 기분만 맞춰주게나. 앞으로 똑같은 내용으로 서신이 더 온다면 그냥 무시해버리게.”

“예, 폐하.”

프로이센은 쇄도하는 러시아의 스팸 메일에, 집 앞에 있는 우체통을 뽑아서 아예 집 안으로 들고 가 버렸다.

“우리 영국 외교부와 수상 윌리엄 피트 각하는 유럽의 평화를 해하는 어떠한 시도에도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돌려보내긴 했지만, 또다시 저 러시아인들이 오면 어떻게 대처하지요? 그래도 우리 영국의 우호국 아닙니까.”

“프랑스를 쳐서 먹으면, 그 우호국 러시아가 그대로 우호국으로 남을까요? 명심하십시오. 유럽 본토에 패자가 나오면 곧 우리 영국이 위험해집니다. 자, 그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 아일랜드 얘기나 하지요. 또 독립인지 뭔지를 걸고 나오다니, 아예 해병대로 밀어버려야 하나 싶습니다. 이미 신대륙을 독립시킨 이상, 우리 행정부가 더 밀리는 형세가 되면 휘그당에게 정권을 뺏기는 건 당연지사이니...”

전통적으로도 판도학적으로도 여러 개로 나뉜 유럽을 원하는 극단적인 밸런스 성애자이자 악의 화신, 영국은 러시아의 억지주장에 대해 들은 척 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유럽에 본 사태가 일어났다.

폭동을 진압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중앙군과 시위대가 부딪힌 사건.

총을 쏜 것도 아니고 겨우 총검을 이용해 평화적으로 시위를 진압하던 정의로운 제국군의 앞을, 화염병으로 가로막던 그 폭도들이 일으킨 희대의 사건.

이전이 그저 밤에 모기가 한 마리 날아다니는 정도의 불쾌였다면, 본 사태는 거기에 더해 장마철이 후의 높은 습도를 더하는 일이었다.

여름철 장마 후의 진~득한 습도와 앵앵거리는 모기가 합쳐지자, 그 위정자나리들의 불만과 불쾌감 지수는 임계점을 터트리고도 하늘을 뚫을 듯 우상향을 찍고 말았다.

“카를 대공! 라데츠키 장군! 두 사람에게 제국 내에 존재하는 모든 불순분자를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네.”

“우리 라이히스탁 제국의회도 카이저 폐하의 명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헌병과 기마경찰을 풀어 국내를 제대로 단속하시오, 블뤼허 중령.”

“이 블뤼허가 살아있는 한! 불순분자는커녕, 분란을 일으키려하는 그 어떤 엿 같은 개새끼 하나도 프로이센의 안전을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폐하!”

“···그, 그래. 귀관은 항상 혈기가 넘치는구려. 수고하시오.”

“수상 각하.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지식인들, 특히 작가와 대학 교수들을 잘 감시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 [포브스]니 뭐니 하는 잡지. 불온서적으로 등록하고 집중 단속하도록 하세요. 단속은 해군경께서 맡아,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을 수색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각하!”

모든 나라에서 검열이 판치고 지식인들에게 미행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가지, 전쟁은 모두들 생각지도 않았다.

“““전쟁? 전쟁은 무슨. 문단속만 잘하면 될 것 아닌가.”””

다만 프랑스가 자기들 혼자 지지고 볶던 말던, 자신들의 나라에는 신경을 꺼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딱 한 사람.

프랑스에서 도망쳐 나온 왕족 아르투아 백작을 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1790년 7월 하순.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국민의회.

“이건 우리 의회와 국민들을 향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습니다!”

“옳소! 옳소!”

“레오폴트 2세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상호 불가침 조약은 이제 무효하다’-랍니다! 이게 선전포고지 뭡니까! 지금 당장 국민방위대를 소집해서 국경에 배치해야 합니다!”

“하아, 이래서 평민들이 정치를 하면 안 되는 거요!”

“그 말은 우리와 전쟁을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약속하나 하자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요! 쯧쯧쯧.”

“국민방위대를 배치하자고? 혁명파 당신네들이 세운 기욤 재무총감의 허락부터 받고 오시오! 아마 또 돈이 없다니 뭐니 하면서 우리 주머니만 뜯어가겠지!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소?”

의회는 만사를 제쳐두고 틸지트 선언에 대한 해석으로 밤낮을 보내고 있었다.

“뭐? 평민이 뭐라고? 이 꼴통 새끼, 이번에는 정말 검으로 베어주마! 후원으로 따라와!”

“하, 누가 겁먹을 줄 아나. 네놈 손가락이나 안 베이게 조심하지 그러나?”

···물론 사소한 오해나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결투도 겸사겸사 같이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만!!!”

시끄러운 의회가 소란으로 이어지는 걸 막은 건, 미라보 의원이었다.

“모두 잠시 정숙해주시길. 이번 일에 대해 르브렁 외무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오?”

“글쎄요. 상호 불가침조약의 무효-라니 꽤나 과격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외교관으로서의 시선으로 본다면, 세 나라가 우리 프랑스와 적대할 이유가 하등 없다고 생각됩니다.”

“···좋소. 거기 신사 분, 가서 라파예트 사령관을 불러와 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얼마 후, 라파예트 사령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의회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미라보 의원님?”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사령관. 이 종이에 적힌 내용을 한 번 읽어봐 주시오.”

미라보 의원은 라파예트 사령관에게 르브렁이 가져온 종이를 내밀었다.

“어디... [틸지트 선언]이라. 허, 표현이 꽤 과격하군요.”

“어떻게 생각하시오, 사령관.”

“프로이센, 신성로마제국, 러시아, 스웨덴. 딱히 이 네 나라가 우릴 적대할 상황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다소 과격한... 외교적 압박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원님. 아마 우리가 외국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네 나라 모두 만족할 것 같군요.”

“···음. 알겠소이다. 사령관.”

미라보는 라파예트 사령관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후, 의원들을 향해 말했다.

“외교관도, 장교도 모두 이 틸지트 선언이 단순한 외교적 수사라고 말했소. 의원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전문가들이 그렇다면야...”

“이거 자칫 잘못했으면 일을 그르칠 뻔 했습니다.”

“좋소. 그리고 이번 일 말인데, 세간에는 비밀로 합시다. 우리 의회에서도 이렇게 혼란했는데 시민들이 얼마나 마음을 졸이겠소이까.”

***

같은 시각,

베르사유 궁전 전쟁의 방.

“···아르투아 백작, 이 자는 정말 병신인가?”

아니 머리에 든 게 있긴 한 건가?

사람이 낄 때 안 낄 때도 구분 못하는 게 말이 되나?

루이 17세는 네덜란드 국경에 주둔하고 있는 왕당파 군의 수장, 아르투아 백작이 보낸 밀서를 쥔 채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밀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신성로마제국, 프로이센, 영국의 지원을 받아내 보겠습니다! 루이 17세 폐하도 어서 의회에 있는 역적 놈들에게서 벗어나겠다고 프랑스 전역에 널리 알려, 충신들을 모으십시오. -친애하는 사촌이자 신하, 아르투아 백작이-]

아르투아 백작이 남긴 말은 오를레앙에게 간결하게 전해졌다.

[핫하! 죽어라, 오를레앙!]

“그 세 나라가 미쳤다고 지원을 주겠느냔 말이야! 이, 이! 이 멍청한 새끼가!”

오를레앙의 얼굴 곳곳에 핏줄이 툭툭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뭐? 프랑스 전역에 알리라고? 의회에게서 벗어나겠다고? 사방이 적으로 가득 차 있는 이곳에서?

지금 루이 17세, 자신의 머리를 접시에 담아 요리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루이 17세는 밀서의 마지막 줄에 가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

“···그러니까, 지금 아르투아 백작께서 하고 싶은 말이...”

“그렇소. 어서 우리 프랑스를 침공해 주시오! 평민 역적들이 폐하와 선왕을 억류하고 있단 말이오!”

세상에 제 나라를 옆 나라에게 침공해달라고 떼를 쓰는 자가 어디있단 말인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겨우 부여잡고는 눈앞의 왕족, 아니 멍청이에게 천천히 다시 되물었다.

"제 사견입니다만, 우리 프로이센과 신성로마제국, 스웨덴, 러시아가 선언한 내용은 그저 단순한 외교적 수사일 뿐입니다."

"지금 혁명을 진압하지 않는다면 장차 당신들 나라에도 그 역적도당들이 들끓을 거요!"

"하... 정 그렇다면, 우리를 지지한다는 오를레...아니 루이 17세 폐하의 서신이라도 가져와 주십시오. 그러지 않고서는 군대를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하하, 그건 걱정 마시오!"

아르투아 백작은 크게, 또 크게 웃었다.

자신 때문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줄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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