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빛나거나 미치거나 (5) (101/341)

빛나거나 미치거나 (5)

- 프랑스의 정권을 잡고 있는 역적도당들이여! 정의로운 신민들과 신하들을 이끄는 적법한 왕위계승자인 나, 아르투아 백작이 그대들에게 선언한다! 지금 즉시 억류한 루이 17세 국왕 폐하를 풀어드리고, 신성을 해치는 참람한 기구인 의회를 자발적으로 해산한다면 더 이상의 죄는 묻지 않겠다! 이미 프로이센과 신성로마제국이 고난에 처한 우리 프랑스를 바로잡기 위해 5만 명의 의용군을 국경으로 보냈으며···.

거 문장 한 번 더럽게 기네.

요약하면 ‘프로이센과 신성로마제국이 너희 엉덩이를 걷어차 줄 거임! 너네 다 죽었다고 복창해라!’-라는 거 아니야.

싸웠다고 자기네 형 부르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인지. 아니다. 생각해보니 독일인이 왜 프랑스인의 형이람? 우리 프랑스인이 독일 놈들의 형이라면 몰라도.

“라파예트 사령관님, 사령관은 이 격문에 써져있는 걸 믿으십니까?”

“아니요. 딱 봐도 헛소리지요.”

내 질문에, 라파예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5만 대군을 동원하려면 얼마나 많은 보급품이 필요한데, 겨우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될 만한 숫자는 아닙니다.”

“하기야.”

21세기 대한민국 육군 출신이라면 화스트페이스, 즉 전투준비태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래. 창고에 꼬불쳐놓은 수많은 물자를 꺼내서 일일이 육공트럭에 싣고, 또 총기함까지 따서 4킬로그램짜리 묵직한 소총까지 등에 메고서, 무겁게 공구리 친 박스와 탄약박스를 있는 힘껏 나르던 그 엿 같은 일을 어떻게 잊겠나.

그리고 그 훈련을 할 때마다, 아 정말 보급품의 종류에는 끝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오른손과 왼손의 아픔과 비례해서 느껴졌단 말이지.

재미있는건, 18세기 군대도 보급품의 양과 종류라는 점에서는 딱히 21세기와 다르지 않다.

병사가 어느 시대의 사람이든지, 사람이라면 응당 먹고 자고 입어야 한다.

딱 당장 필요한 것만 해도 우선 병사들이 입을 피복 및 자는데 필요한 보온용품, 적을 쏘고 벨 총과 검, 허기를 달랠 식량.

그리고 멋에 살고 멋에 죽는. 겉으로는 낭만, 속으로는 나사 하나씩 빠진 이 시대의 남자들을 위해 필요한 필수 아이템.

군복에 발라 각과 색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백반까지.

아직 화약이나 탄약 같은 필수 보급품을 빼었는데도 이 무시무시한 수준의 소비견적이 나오는 게 바로 군대다.

행복회로를 오버클럭으로 돌리다 못해 파열할 정도의 정신병자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고 체스판의 말 움직이듯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란 거지.

“그냥 아르투아 그자는 뭐랄까요. 자신만의 머릿속 꽃밭에서 노니는 사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차라리 대놓고 정신병자라고 부르시는 게 낫지 않나요?”

라파예트 사령관은 별 다른 추임새 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낭시에서 적이 출현하면 바로 진압작전을 벌일 수 있게 준비는 모두 끝내놨고, 남은 건 17일, 오를레앙 그 자가 정변을 일으킬 때 한꺼번에 밀어버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자신 있으십니까?”

“애초에 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손바닥 보듯 보이는데, 지면 계급장 떼야지요.”

“남은 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시민들의 불안을 컨트롤하는 것 뿐이네요.”

“제일 어려운 일이군요, 총감.”

“후우. 어려워도 해야죠 뭐.”

사업가에게 가장 무서운 게 뭘까.

자본금 조달? 아니면 머리에 붉은 띠를 맨 강성노조?

아니. 바로 불안정한 정치상황이다.

왜냐고?

대한민국만 해도, 북쪽 돼지농장에 계신 세습저팔계 분들께서 지들 꼴릴 때 로켓을 동해바다로 펑펑 쏘아 올리면 주식시장이 얼어붙고 외신들이 난리를 치지 않나.

우리들이 아무리 ‘헤이 이츠 저스트 연례행사. 돈 워리, 돈 워리.’라고 말해도, 그 사람들로서는 굳이 북돼지가 미쳐서 서울 남산타워에 대포동미사일을 꼬라박는 만에 하나의 상황을 고려하고 싶지 않은 거다.

그것과 똑같다.

정국이 불안하면 금리가 떨어지고, 물가가 박살나면 이제 이삭의 민족 간편식사 두 개 사먹을 사람들이 하나도 먹기 꺼려하는 것은 물론이요. 포브스와 막심 판매량도 급락할 게 분명하다.

세상에 그건 절대 안 돼지.

프랑스 국민 2천7백만이 이삭의 민족 간편식사를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포브스>를 들고 보는 게 프랑스의 보편적인 점심이 될 때까지 판매량의 저하는 있어선 안 될 말이다.

“꼭 승전보를 가져오겠습니다, 총감.”

“저도 불타지 않는 파리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사령관님.”

우리는 두 손을 마주잡고 서로를 향해 웃어보였다.

“혹시 오를레앙 그 놈 파리로 잡아올 때 목에 개목줄 같은 걸 채워서 질질 끌고 올 수는 없습니까?”

“······그 자 때문에 가슴에 맺힌 게 상당히 많으신가보군요, 총감.”

***

[보내주신 내용 잘 받았습니다, 뒤무리에 장군. 다만 왕당파의 진압이 끝날 때까지는 별 다른 모습 없이 계속 왕당파를 이끌어 주십시오. 귀하의 안전은 보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투항을 환영합니다. - 기욤 드 툴롱 -]

밀서를 쥔 뒤무리에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됐다. 됐어! 나 뒤무리에는 살 수 있다! 그래. 내가 살아야지. 왕당파 수구 꼴통 놈들이야 어떻게 되던지 무슨 상관인가.’

저무는 해라면 몰라, 침몰하는 돛단배를 버리지 않는 사공이라면 배와 함께 침몰해도 싸다.

닷새가 넘도록 웨엥웨엥 시끄럽게 울려대던 뒤무리에의 머릿속 생존직감이 비로소 작동을 멈추었다.

“하, 하하. 그래, 세상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하느님께서는 아직 날 버리지 않으셨나 보군.”

뒤무리에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아무도 없는 근위대장실에서 홀로 조용히 읊조렸다.

긴장으로 병자마냥 파리해졌던 뒤무리에의 손과 발, 그리고 얼굴이 조금씩 붉은 혈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후... 힘이 아주 쭉 빠지는구만.”

뒤무리에는 한숨과 함께 의자에 턱-걸터앉았다.

“젠장할. 소장까지만 진급하면, 그냥 얌전히 지역사령관으로 영전해서 소일거리나 하고 살아야지. 이러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지거나 이카루스처럼 떨어져 죽고 말겠어.”

뒤무리에는 탁자 위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따고, 병을 기울여 잔에 포도주를 천천히 따르며 말했다.

살아남는데 성공한 후 마시는 축배 한 잔은 그 무엇보다도 달콤했다.

한 잔의 달콤한 포도주를 목 뒤로 넘긴 뒤무리에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제 앞에 놓인 프랑스 지도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최우선 과제인 생존은 성공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것은 이제 딱 하나, 항장(降將)으로서 어떻게 자리를 보전해야 할까.”

다시 한 번, 뒤무리에를 준장의 자리로 인도해준 정치력 센서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장. 적에게 항복한 장군.

이대로 가면 뒤무리에는 항장이다. 그것도 꼴통 왕당파 출신의 항장.

차라리 국가의 적과 싸우다 항복하면 명예롭게 대우받기라도 하지, 내전에서 기밀을 팔아넘긴 장군을 그 누가 중히 쓰고 싶어 하겠나. 모두들 자신을 보면 뒤에서 수군대기 바쁘겠지.

거기에 혁명파 세력이 국민방위대 사령관에서 내려오지 않는 한, 한 번 왕당파에 몸을 담군 뒤무리에는 어디 이름도 못 들어본 산간벽지로 쫓겨나 조그마한 도시 경비대 사령관이나 하면 다행일 터.

자신이 원하는 삶은 그래도 나름 폼 나는 지역사령관 자리지, 별 볼일 없는 시골 노인요양원-납골당 코스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것은 딱 하나. 그 누구보다 열성적인 혁명파의 딸랑이가 되면 된다.

누군가는 어떻게 명예로운 군인 된 자로서 까마득한 후배, 라파예트와 스물도 채 안 먹은 애송이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냐고 묻겠지만. 글쎄. 그 잘나신 명예가 밥 먹여주나?

빛나는 명예는 한 순간이고 따뜻하고 포근한 장군님 자리는 평생토록 가는 법.

***

1790년 8월 15일.

프랑스 왕국 동부 낭시 외곽.

새벽 2시.

수백 마리의 말과 수천 명의 인영(人影)이 야음을 틈타 도시 외곽에 다다랐다.

“적이 주둔하고 있는 곳은 낭시 바로 아래, 뤼드흐다. 선봉은 제 12 샤쇠르 엽기병연대가 맡고, 그 뒤는 루파흐 경기병연대가 보조한다. 포병대는 서쪽 고지를 감제하고 야지로 나오는 적병들에게 포탄세례를 퍼붓도록. 보병은 주둔지 동쪽 입구를 막고 나오는 적을 모두 사살한다. 모두 이해했나?”

“““예, 라파예트 사령관 각하.”””

“제군들. 우리 눈앞에 있는 자들은 모두 쿠데타를 일으키려한 반란군이네. 이곳에서 저 자들을 모두 쓸어내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프랑스 전역이 내전으로 불타게 될 걸세. 부디 모두 우리의 손에 프랑스의 평화가 달려있다는 점을 잊지 말도록.”

“““예, 켈레르만 장군님.”””

촛불 때문에 반쯤 음영이 진 채로, 모든 장교들이 굳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파리에서 이곳까지 싸온 군장보따리를 풀어 백반을 꺼내 제복에 얇게 펴 바르고, 총검의 날과 머스킷의 상태를 확인한다.

포를 정비하고 화약이 혹시나 새지는 않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기수들이 말에 오른다.

울음소리 때문에 물려놓은 입마개를 빼자, 기수들이 탄 말들이 푸르륵 소리를 내며 8월의 후덥지근한 새벽공기를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선봉, 출발한다.”

“예, 연대장님.”

선봉을 맡은 샤쇠르 엽기병연대의 젊은 중위는 허리춤에서 기병도를 빼어들었다.

“나, 조아킴 뮈라가 선두에 선다! 날 따르라!”

“와아아아!!”

기병도 수백 개가 붉은 천을 멘 팔을 타고 올라, 달빛을 받아 빛나기 시작했다.

땅이 울린다.

“적, 적습이다!! 상병! 경보를 울-.”

탕!

병사에게 무언가 말하려던 왕당파 소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말 대신 오직 바람소리만이 그가 내는 유일한 소리였다. 아마 그의 폐가 있던 가슴팍에 박힌 총탄 때문이리라.

“큽!”

상병은 기병도에 목을 베였다.

정문은 돌파했다.

“뮈라 중위님! 다음은 어디로 갑니까!”

“어디긴! 사자 아가리로 들어왔으니 내장을 갈기갈기 찢어놔야지! 나만 딱 믿고 따라온다. 실시!”

더 깊숙이. 더, 더 깊숙이 들어간다.

라파예트의 예리한 검이 적을 반으로 갈라놓기 시작했다.

“탄약을 다 쟀으면, 발사! 발사하라고! 이 병신새끼들아! 이 덜떨어진 새-”

탕!

“히, 히이익! 중사님이 총에 맞았다!”

엉성하지만 전열을 짠 왕당파 보병들의 뒤에서 검을 빼들고 독전하던 부사관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어차피 반란군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어중이떠중이들이다! 독전관 역할을 하는 놈들만 중점적으로 노려서 대가리를 날려버리도록!”

“예!”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무슨-. 억!”

타타탕!

방금 전까지 자다 깬 탓에 옷을 반 쯤 걸쳐 입은 왕당파 장교를 향해 기병권총 수 정이 불을 뿜었다.

“남쪽과 서쪽은 이미 막혔다! 동쪽으로 집결해서 부대 재편 후 저항한다!”

“포격이다! 엎드려!”

“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

어딘가에서 날아온 묵직한 쇠공이 운 나쁜 왕당파 장교의 다리를 아작 내버렸다.

“철탄이다! 고지대로! 고지대로 올라가! 동쪽 고지대로 올라가면-!”

“어서 와라, 이 반란군새끼들아.”

타타타타탕!

“억!”

“1열 장전! 2열은 발사대기! ···지금! 2열 쏴!”

낭시 평원의 밀들이 한 방울 한 방울 피를 머금었다.

“···올해 낭시 산 밀은 버려야겠군요.”

“저걸 다 계산해서 배상해주려면 재무총감이 꽤나 수고스럽겠습니다, 그려.”

오를레앙의 마지막 카드가 활활 타올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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