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자 (8)
프랑스령 코르시카. 아작시오 항.
새벽 3시 경.
“으흐흐흐...여기, 여기가 우리 집 맞데이...”
“하, 인마 무슨 술을 이래 감당도 안 될 정도로 많이 마셨노?”
“아! 내가 좀 마셔도! 지금처럼 우리 나폴레오네 행님이 데려다 줄 거 아이가?”
“···이런 ㅆ...젠장, 미치겠고마.”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취객 하나를 엎고서 비탈길을 올라온 나폴레옹은, 기욤에게 배운 걸쭉한 욕이 입 밖으로 나올락 말락 하는 걸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흐으읍!
취객이 가리킨 집 문을 그대로 열고 들어간 나폴레옹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침대 위로 취객을 밀어 넣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한밤중에는 겨울의 기운이 남아있는 3월임에도 제 몸집만한 사내를 혼자 힘으로 수백 미터, 그것도 비탈길을 넘어서 끌고 올라온 나폴레옹의 몸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후우, 후우...마, 너네 집에 물 없나? 물?”
나폴레옹은 겉옷을 벗어 대충 침대 옆 탁자에 던져놓고는 목에 감아놓은 넥타이를 손으로 잡아당겼다.
훗훗한 김을 내뿜는 목에 바람이 잘 통하도록 손부채를 부치면서, 나폴레옹은 취객을 바라보고 물었다.
“무우우울? 아, 고거는 주우우방에 가믄 있을끼다...으흐흐흐...”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술에 취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뭐가 그리 좋은 건지 낄낄대는 취객의 말을 따라, 나폴레옹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행님.”
“왜.”
주전자를 기울여 컵에 물을 따르던 나폴레옹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답했다.
“우리 코르시카 말이지예, 꼭 독립할 수 있겠지예?”
“···파올리 선생님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고?”
“흐흐흐흐...행님은 아아아무것도 모르시는고마...?”
“내가 모르긴 뭘 모른다는 건데?”
나폴레옹은 컵에 담긴 물을 단숨에 비우고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취객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손만을 힘없이 허공에 흐느적거리면서 천천히 말했다.
“우리 파올리 선생님을예, 누가 데려왔습니꺼?”
“···누구긴 누구야, 그거 영국 애들이 태워다 준 거 아이가?”
“그렇지예? 그란데, 며칠 전에 영국 애들이 파올리 선생님한테 찾아왔다 이 말입니더.”
“···영국? 영국 애들이 왜?”
“그거는!”
“그거는?”
“지도 모릅니더! 하하하!”
“···.”
‘뭐지 미친놈인가?’
나폴레옹은 목 끝까지 올라온 욕지거리를 간신히 목 뒤로 삼켰다.
취객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란데 그 영국 놈이 다녀간 뒤에, 파올리 선생님 얼굴이예. 요 며칠 동안 파아악 썩어가, 거의 죽을상이 다 되셨다 이말 아인교.”
“···파올리 선생님이, 죽을상이 되셨다고?”
나폴레옹의 미간이 움찔하면서 미세하게 떨렸다.
“하모, 내가 행님한테 와 그짓말을 하능교?”
“마 이제 좀 닥치고 자라. 내는 가볼란다.”
“아 행님! 한 잔만 더 하고 가예...”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벗어놨던 겉옷을 서둘러 들쳐 매고선 집을 박차듯 나왔다.
쌀쌀한 밤공기가 나폴레옹의 뺨을 가볍게 만지고 지나갈 때마다, 술로 흐려졌던 나폴레옹의 정신이 점차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뒷짐을 지고 비탈길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파올리 선생은 영국의 도움을 받아 코르시카로 밀항했다.
아마 코르시카의 독립을 통해 프랑스를 견제하려 하는 게 영국의 계획일 것이다.
그런데 영국이 갑자기 코르시카에 방문했고, 그 뒤로 파올리 선생의 심기가 안 좋아졌다.
생각이 생각을 물고,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물면서 나폴레옹의 머리가 삽시간에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코올로 범벅이 된 머릿속 때문에, 한참 동안 나폴레옹은 그 뒤로 나아가질 못했다.
“젠장할...”
결국 나폴레옹은 옆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올려 두레박 안에 머리를 처박았다.
땅 속 깊은 곳에서 퍼 올린, 아직까지 겨울을 머금고 있는 차디찬 물에 술이 확 깨서 달아났다.
“윽!”
물론 두통도 함께 찾아오긴 했지만.
나폴레옹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몇 번 손으로 털고는 집, 메종 보나파르트를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
“그러니까, 행님 말은 영국하고 파올리 선생하고 생각하는 게 다르다. 이거제?”
동생 뤼시앵의 말에 나폴레옹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거 다 심증이지 않나. 만약 그 사람이 술에 취해가지고 헛소리 한 거모, 어쩔라꼬?”
“술에 취하면 진실을 말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그런 말. 내는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기욤이 해준 말이다. 아무튼 지금 그거 말고 우리가 기대 볼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나, 뤼시앵?”
“···솔직한 얘기로, 없제.”
“그라모, 도박이라도 해봐야 카지 않겠나.”
고개를 좌우로 내젓는 동생의 모습에 나폴레옹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면서 말했다.
“···하아. 도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건지는 알려도.”
“내 생각인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영국 놈들이 요 코르시카에서 발을 슬며시 빼려하는 것 같데이. 물론 잠깐 빼는 건지 아예 빼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폴레옹은 머리를 턴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으며 입을 열었다.
“···.”
“영국이 프랑스를 엿 먹일 수 있는 면에서 갑자기 노선을 튼다는 건. 아마 대륙에서 꽤나 소란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코르시카가 섬이라 아직까지 소식이 안 온 것 같다 아이가.”
“음.”
“당연히 파올리 선생 입장에서는 발을 빼려는 영국이 상당히 거슬리겠제. 까놓고 말해가, 영국의 지원 없이 프랑스에 대항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 행님 추측이 다 맞다 치고, 행님은 그래서 어떻게 할낀데?”
“하긴 뭘 하긴. 당연히 깽판을 쳐 놔야제?”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듯 한 뤼시앵의 얼굴을 본 나폴레옹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파리에서 많이 보고 배웠다 아이가. 니는 프랑스 본토행 배를 찾아서 미리 선장이랑 말 좀 해 놔라. 무조건 코르시카인 말고 프랑스인이 선장이어야 한다.”
***
며칠 후,
파올리가 주최한 식사자리.
“파올리 선생님은, 군재는 없으신 것 같습니더.”
나폴레옹은 과거 프랑스군과의 무용담을 늘어놓던 파올리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뭐, 뭐?”
“점, 점마 갑자기 와 저러노?”
“마! 나폴레오네, 니 미칬나?”
하하호호하던 식사자리가 순식간에 경악에 찬 표정들로 가득 찼다.
“···다들 조용히. 나폴레오네, 왜 그렇게 생각하제?”
파올리는 손을 올려 사람들의 입을 멈춘 후, 나폴레옹에게 물었다.
“고따구로 배치를 짜모, 당연히 쳐발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꺼?”
“야! 나폴레오네!”
“세상에 어떤 장군이 하나 뿐인 작은 퇴로 앞으로 2천명을 쑤셔 넣습니꺼?”
누군가 탁자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나폴레옹은 태연하게 계속 입을 놀렸다.
“···자네 내한테 뭐 불만이라도 있나?”
“불만이 아니라, 합당한 비판입니더.”
“···비판?”
“저는예, 막연하게 파올리 선생님을 존경했습니다만, 오늘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달라졌습니더.”
파올리의 미간이 움찔하고 움직였지만, 나폴레옹은 계속 이어말했다.
“파올리 선생님, 선생님은 무지로 코르시카인 2천명을 죽인 거나 다름없습니더.”
파올리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져나가, 눈 흰자위가 붉게 물들었다.
“내는! 이 땅의 독립을 위해 내 예순 평생을 바쳤데이! 이 쪼막만한 쉐뱅이가 어디서 불질이야!”
“하! 그렇게 프랑스의 통치가 아니 꼬와서, 선생님은 이제 영국한테 빌어 먹습니꺼? 영국인들은 뭐, 천사입니꺼? 점마들이 인도를 우예 통치하는지는 아셔예?”
나폴레옹 또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치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 인도 금마들과는 달리 우린 문명인이야!”
“그래예, 영국의 도움으로 독립했다꼬 치고 봅시더. 선생님은, 우리 코르시카가 영국의 추가적인 도움 없이 프랑스한테서 안전하다고 보십니꺼? 아니! 무조건 해군기지니 뭐니 하면서 코르시카에 슬그머니 들어오려고 하겠지예! 딱 까놓고 말해가, 프랑스가 여기에 뭔 해코지를 했능교! 세금을 특별히 걷어갑니꺼? 아니면 강제로 징집을 합니꺼?”
“이 배신자의 핏덩이새끼가!”
“미국사람들이 왜 영국 놈들이랑 피터지게 싸웠겠습니꺼! 애초에 같은 영국인인데도 차별을 해서 그런 거 아인교? 근데 우리가 문명인이니까 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시지예! 그게 아니라모! 얼마 전 파올리 선생을 찾아온 영국인이 뭐라고 씨부렸는지 여기서 말해 보시지예.”
“···너, 너!”
“영국과 선생님이 무슨 밀약을 맺었는지는 모르겠는데예, 그거. 코르시카 사람들 앞에서 모두한테 떳떳하게 밝힐 수 있습니꺼?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십셔.”
“어디서 내한테 명령질이야! 내가 이 코르시카의 대표고 위정자야! 니 같은 애새끼가 아니라!”
***
코르시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거 들었능교?”
“먼데예?”
“그...파올리 선생님이랑 나폴레오네 도련님이랑 한판 붙었다꼬...”
“아니 그 두 사람이 왜예?”
“나폴레오네 도련님이 파올리 선생님한테 영국이랑 무슨 밀약을 맺었냐꼬, 막 닦달을 해가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카던데.”
“밀약? 밀약은 무슨! 아재는 파올리 선생님이 외세랑 무슨 밀약을 맺을 사람으로 보이능교?”
“아니 생사람 잡지마라!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고, 말이 그렇게 나돈다 이 말이제.”
“안 봐도 딱 보이지 않습니꺼. 나폴레오네 인마, 파리인가 머시긴가 까지 가서 프랑스 물 먹고 오더니 아주 호로새끼가 된 거 아입니꺼!”
“파올리 선생님! 아니지예!? 어서 사람들에게 밀약 같은 건 없다꼬 알려주이소!”
“파올리 선생님!”
“선생님!”
날마다 야음을 틈타 은신처로 찾아오는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파올리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던 조그마한 의문점은 커져만 갔다.
‘왜 파올리는 나오지 않는가?’
‘떳떳하다면 나와서 아니라고 밝히면 되는 것 아닌가?“
‘감시 때문에 직접 나오기가 힘들다면 똘마니라도 보내서 밝혀야 되는 것 아닌가?’
파올리의 은신처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이상해져만 갔다.
“···내 꾀에 내가 당했고마. 금마를 그냥 멀리 둘 것을...”
“선생님...영국인이 말한 밀항선이 며칠 내로 도착 한다 캅니더.”
“···잠시 시간을 주게.”
파올리는 얼굴에 손을 얹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디서 새나간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영국과의 모종의 커넥션이 수면 위로 떠오른 이상, 파올리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영국의 말을 따른다면 의혹에 답하지 않고 도망가는 꼴이고,
의혹에 진실로 답한다면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에 코르시카를 팔아넘긴 매국노 소리를 듣겠고,
거짓으로 답한다면 영국의 지원은 꿈에도 못 꿀 것이다.
“이보게.”
“예, 선생님.”
“영국의 지원은 포기한데이. 내가 여기서 런던으로 물러서모, 코르시카는 영원히 프랑스의 땅이 되는 기다.”
“그러면...?”
“저택 메종 보나파르트를, 태워 버리라카이. 보나파르트는 모두 죽여.”
***
“짐은, 다 챙겼제?”
“행님 말대로 패물만 쌌다 아이가. 근데 진짜로 파올리 선생이 우릴 해코지 하겠나?”
뤼시앵은 나폴레옹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말했다.
어두컴컴한 배 안, 그것도 화물칸이라 서로의 모습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 탓이었다.
“나라면 안했겠지만, 위정자라면 또 모르제. 폐위된 왕도, 파리에 군대를 부르지 않았나. 물론 정말 총칼로 사람들을 진압하려고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는 정치 같은 건 안 할란다. 그냥 재판장 들락거리는 게 더 편한 것 같다 아이가.”
“그래, 하지마라. 내 친구는 지도 안 바랬는데 끌려가가, 아주 과로로 죽을라 카더라.”
“···행님. 우리 갈 곳은 있나?”
“기욤이네 본가에 의탁하면 될끼다.”
1790년 3월 초순.
보나파르트는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