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들리에 클럽 (1)
“찬바람이 불 때 가셨는데, 봄바람이 걷힐 때 돌아오셨군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총감 각하!”
“하하. 그건 오히려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기요탱 박사님.”
함박웃음을 지으며 날 맞아주는 기요탱 박사님에게 나 또한 웃으며 말했다.
빈에서 출발한 지 거의 한 달이 넘도록 달려서 파리에 도착한 나는, 제일 먼저 윤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치 윈도우 업데이트 예약 걸어놓은 게 다 됐는지 확인하고 싶은 그런 마음.
“보내주신 편지는 오는 길에 받아봤습니다. 정말 대단하더라구요.”
사실 무슨 공학자들이나 알아먹을 법한 설명이라, 중간부터는 읽지도 못했지만.
야드니 파운드니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그런 이상한 걸 써놨더라고.
“과찬이십니다. 라부아지에 선생이나 몽골피에 형제, 영국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 혼자서는 결코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기요탱 박사님은 손을 휘휘 내젓고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일단 들어오셔서 한 번 직접 눈으로 보시지요. 각하.”
나는 기요탱 박사님의 안내를 따라 별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로 세로로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기계가, 가운데에 실린더로 가득 찬. 뭔가 복잡해 보이는 엔진을 단 채, 별실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이야. 이게 그 윤전기인가요? 제 생각보다 엄청 크네요.”
“나름 크기를 줄여보긴 했지만, 이 이상 줄이기는 힘듭니다.”
기계의 겉 부분을 손으로 톡톡 건드리는 나에게 기요탱 박사님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뭐 딱히 큰 문제도 아닌데요, 뭘. 작동하는 걸 한 번 보고 싶은데, 지금 돌려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이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보시지요!”
기요탱 박사님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기계 옆에 임시로 놓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 요리조리 기계를 손대기 시작했다.
“자, 여기 이쪽에 인쇄판을 놓은 다음에 투입구로 종이를 넣으면.”
무언가 레버를 잡아당기자, 기계가 요란스럽게 움직이면서 투입구에 놓은 종이를 한 장씩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는 기계의 아래에 인쇄판과 똑같은 내용이 찍혀 나온 종이 수십 장 중 하나를 주워들며 기요탱 박사님을 쳐다보았다.
“···이야, 이거 앞뒤로 다 찍혀 나오네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분당 20장 씩 찍어내지요! 이거만 대여섯 대 들여놓으면, 파리 시민들이 모두 보고도 남을 만큼의 잡지를 매일 찍어낼 수 있을 겁니다!”
“대당 단가는 어느 정도 되나요?”
“어디보자...약 7천 리브르 쯤 되는 것 같습니다.”
“대당 7천 리브르라, 나쁘지 않네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하, 다 총감 각하의 지원 덕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몽골피에 형제가 이걸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기요탱 박사님은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쪽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어디보자...앞으로 잡지에 쓸 종이를 사신다면 저희 몽골피에 제지가죽회사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
역시 사업가는 사업가라 이건가. 뭐 우리도 안정적으로 종이 수급을 맡길 협력 업체가 있으면 좋지.
“알겠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기요탱 박사님을 바라보고 말했다.
“예, 각하. 아 그리고 영국인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 맡기실 일이 없다면 이제 영국으로 다시 돌려보낼까요?”
아. 영국인.
어쩐지 야드니 파운드니 그딴 게 편지에 적혀져 있더라.
대체 영국 놈들은 왜 미터법을 안 쓰는 거지.
“···박사님. 그 사람들, 증기기관 전문 기술자들이라고 했죠?”
“그렇습니다.”
기요탱 박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질문에 답했다.
흠. 증기기관이라.
그러고 보니 아직 증기기관차니 증기선이니, 뭔가 서양의 근대 했을 때 떠오르는 물건들이 안 나오지 않았나?
“그러면 일을 만들어서라도 시켜야겠네.”
“···예?”
“예? 제가 무슨 말을 했나요? 전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날 바라보는 박사님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내보인 후, 내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박사님께 건넸다.
“이건 제가 살고 있는 집 주소가 적힌 명함인데, 그 영국인들을 이쪽으로 보내주십시오.”
증기기관차하고 뭐 다 만들어보라고 시켜야지.
***
“···난 자네를 믿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만큼 후작님을 예? 제가 믿는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후작님 아니시면 제가 누구한테 재무총감 대리를 시킵니까?”
“흥, 퍽도 그렇겠군.”
파리에서 윤전기도 봤겠다, 베르사유로 간 내게. 콩도르세 후작님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눈을 가늘게 뜨시고서 푸념을 두두두 쏟아내셨다.
“아니 그보다, 자네 그동안 이걸 어떻게 혼자 다 처리한 겐가? 사람인지도 의심스럽네 그려.”
“그거 엑셀처럼 ㅎ···, 아니. 제가 처리해 놓은 양식처럼 하시면 그나마 좀 편하게 하셨을 텐데. 그렇게 안하셨습니까?”
“이 사람아, 자네가 옆에서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고. 달랑 종이 한 장만 남겨놓고 가면 그걸 어떻게 알아보나?”
콩도르세 후작님은 내가 남긴 메모가 적힌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면서 말했다.
“그...런가요?”
“그렇고말고!”
“···큼큼.”
“자네는 다 좋은데 말이네. 왜 남들이 자기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그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콩도르세 후작님을 보면서, 나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21세기에는 다들 엑셀로 정리했으니까요-라고 말하면 날 미친놈 쳐다보듯 보실 게 뻔하지 않나.
덜컹
“재무총감! 돌아온 게 사실···! 아, 콩도르세 후작님도 같이 계셨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한참 들들 볶였더니 누군가 방문을 덜컥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이렇게 감미롭게 들릴 줄이야.
“아닙니다, 라파예트 사령관님! 하나도 실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 아, 예. 총감...”
환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마주잡고 흔드는 내 모습에, 사령관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사령관님 저는 왜 찾으십니까?”
“그게, 총감과 단둘이 한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저 이 사람 푸념만 몇 마디 하던 거였으니, 일이 있다면 응당 일부터 해결해야지요.”
라파예트 사령관의 말에, 콩도르세 후작님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콩도르세 후작님. 기욤 총감? 잠시 저 좀 따라와 주십시오.”
“아, 예.”
총감실을 나와 라파예트 사령관의 뒤를 따라 걸으며, 나는 라파예트 사령관에게 물었다.
“라파예트 사령관님,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가서 보시면 알겁니다.”
사령관실 문을 열고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라파예트 사령관을 따라 들어간 방 안은, 십 수 명의 장교들이 분주하게 무언가를 적고, 또 파쇄하고, 또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사령관님 오셨습니까.”
개중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리를 향해 다가와 말했다.
“기욤 총감, 이쪽은 켈레르만 소장님입니다. 제 멘토이시자 우리 혁명군의 구심점 되시는 분이지요.”
“안녕하십니까 장군님. 기욤 드 툴롱이라고 합니다.”
“허허, 소관은 켈레르만이라 합니다. 총감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켈레르만 소장님, 설명해 주시지요.”
라파예트 사령관의 말에, 켈레르만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전, 모데나 공국 소속으로 추정되는 무장부대가 국경을 넘어 아측의 동리 하나를 무단으로 점거했습니다.”
“···예?”
갑자기 걔네가 왜?
“물론 시민들이 총을 손에 꼬나 쥐고 덤벼들어 격퇴하긴 했습니다만, 이건 중대한 무력 도발이나 다름없습니다, 총감.”
라파예트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시민이 정규군을 몰아낸 건 그렇다고 치고, 이탈리아 인들이 왜 우리 쪽을 넘어 온답니까?”
켈레르만 장군이 대신 내 질문에 답했다.
“현 왕비가 이탈리아 모데나 공국 출신이오.”
“아.”
“일단 방위대로 지역 일대를 완전히 봉쇄하여 우리 방위대 사령부 말고는 이탈리아 인들이 우리 프랑스로 들어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언젠가는 파리 시민들에게 그 내용이 전해지겠지요."
“파리 시민들에게 그 내용이 전달된다면, 외세에 나라를 팔았다며 바로 왕을 끌어내리자고 할 것이외다. 물론 오를레앙을 끌어내리는 건 상관없지만, 그 다음 왕으로 세울 사람이 마땅치가 않소. 폐주를 다시 왕으로 올리는 건 말도 안 되는 처사고.”
라파예트의 말을 켈레르만 장군이 이어 말했다.
“남은 왕족이 프로방스 백작과 아르투아 백작인데, 그들은 모두 반혁명파입니다. 그 자들을 왕으로 세울 수는 없을뿐더러, 우리 방위대가 수집한 정보들에 의하면 탈영병들을 움직이는 자가 아르투아 백작이라고 하더군요.”
“···산 넘어 산이군요.”
내말에 라파예트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총감이 자리를 비운 사이, 파리에 [헌법의 벗]이라는 이상한 단체가 하나 생겨났는데. 굉장히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조직으로 추정됩니다. 일부 방위대원들이 말하길, 지난 바스티유 요새 공격을 주도한 자들이 핵심 인사가 되어 운영을 맡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라파예트는 구석에서 서류 한 더미를 가져와 내게 건넸다.
사령관이 건넨 서류에는 여러 사람 프로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자기들은 코르들리에 클럽인지 뭔지로 부르고 있다는데, 그 자들이 이번에 프랑스가 공격받은 사건을 알게 된다면 정말 왕의 목을 치려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지금 저보고 그 자들을 진정시켜보라고 하시는 겁니까? 아니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나 나는 프로필을 넘기던 손을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아.”
당신들 진짜 나한테 이러기야?
“코르들리에 클럽의 장을 맡고 있는 자 중 하나가, 기욤 총감과 친했던 로베스피에르 의원입니다.”
라파예트는 입을 턱 벌리고 있는 날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보고 있는 서류 중 한 장에, 막시밀리안 로베스피에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사위된 자가 위험에 빠졌는데, 겨우 오백 명을 보낸 건 차치하고서. 어떻게 정규군이 시민들에게 패해 퇴각한단 말인가?”
“···그것이...”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한숨을 쉬는 오를레앙의 모습에, 뒤무리에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을 수밖에 없었다.
“뒤무리에 장군의 탓이 아닐세. 도저히 이해가 안 되서 그러는 것이지. 이탈리아 인들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 아니라, 파스타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건가...?”
“송구합니다, 폐하.”
“···낭시와 자레스에 있는 우리 병사들은 동태가 어떤가?”
“총병력 2만을 모으긴 했으나, 혁명군의 감시 아래서 오래 감추지는 못할 것 같사옵니다.”
오를레앙은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초점 없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의자를 있는 힘껏 후려치면서 외쳤다.
“젠장! 갑자기 요제프 그 자가 급사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기욤 그 과격한 미치광이만 치웠다면 프랑스가 우리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그놈이 돌아와 버렸으니 거사를 치루기도 힘들어졌네.”
한참을 분개하던 오를레앙은, 성을 다 냈는지 뒤무리에에게 천천히 말했다.
“···아르투아에게 전하게나. 거사 일은 추후로 미룬다고.”
“명 받들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