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자 (7)
프랑스 파리.
가로 5미터, 세로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기계가 이삭의 민족 14호점 별실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그런 기계 옆에서, 얼굴에 석탄 검댕이가 묻은 세 사람이 기계의 이곳저곳을 도구로 조이고 두드리고 있었다.
“이보게 에티엔, 거기 투입부는 잘 작동되는가?”
“무언가가 투입구와 인쇄판 사이에 걸리기는 합니다만, 그건 나중에 따로 깎아내면 될 것 같습니다.”
“음, 좋구만.”
기요탱 박사는 에티엔 몽골피에의 답에 흡족하게 웃었다. 그의 팔자 주름이, 얼굴에 묻은 검댕이의 사이로 하얀 아치 선을 그리며 턱으로 떨어지는 듯 했다.
“미셸, 자네 쪽은?”
기요탱 박사는 고개를 돌려, 에티엔의 형 쪽을 바라보고 말했다.
“글쎄요. 솔직히 말해서 돌아는 가는데 말입니다, 뭔가 구동이 될 때 삐걱거린다고 해야 하나? 구동부 쪽에 뭔가 문제가 될 만한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뭐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고?”
“예, 제가 보기엔 딱히 문제 될 만 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꾸 기계가 삐그덕 거리니 이거 원. 미쳐버리겠군요.”
“씁. 이거 참 힘들구만.”
“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데 그리 쉽지만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습니다. 하하.”
고되긴 했지만, 미셸 몽골피에는 고개를 까닥거리면서 기요탱 박사에게 웃어보였다.
그때, 별실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쟁반을 양 손에 들고 들어왔다.
“선생님들, 식사시간인데 끼니라도 때우고 하시지요.”
“아, 페시옹 씨가 오셨군! 항상 고맙소. 우리 공돌이란 작자들은, 뭔가에 한 번 꽂히면 끼니를 거르는 건 일쑤거든.”
“페시옹 씨 아니면 여기 있는 우리 모두 한 끼도 안 먹고 기계만 이리저리 돌려볼 걸요. 하하.”
기요탱 박사와 미셸은 페시옹이 가져다 준 손수건으로 손을 대강 닦은 뒤, 간편식사를 집어들고 말했다.
“저야 사장님 말씀대로 할 뿐인 걸요. 아, 혹시 포도주 좋아하십니까? 사장님의 아버님께서 이번에 포도주를 보내주셨지 뭡니까.”
“허, 프랑스인 중 포도주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지! 어서, 어서 포도주를 주시오!”
“이야 이거 향이 되게 좋은데요? 어디서 만든 겁니까?”
“사장님의 고향에서 만든 포도주랍니다, 에티엔 씨. 마르세유와 툴롱 사이에 있다고 하더군요.”
“이야 마르세유면 거의 보르도 급 최고급품 아닙니까? 기계도 맘껏 만들고 포도주도 얻어 마시고. 이거 완전 꿈의 직장 아닌가? 미셸 형, 우리 그냥 가게 접고 총감님 밑에서 일이나 할래?”
“시끄러 임마. 난 엔진 문제 때문에 무슨 맛인지도 잘 모르겠다.”
싱글벙글 웃으며 물어보는 동생에게, 미셸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허허, 미셸. 쉴 때는 쉬어야 다시 힘내서 일 할 수 있지 않겠나.”
“뭐 기요탱 박사님 말씀이 맞긴 합니다만...”
“아! 신사 분들! 역시나 다들 여기 계셨군!”
페시옹이 열고 들어온 문으로, 누군가 모자를 벗으며 들어왔다.
“라부아지에 선생? 아니 오늘은 왜 이리 늦었소? 그러다가 우리끼리 다 완성해버립니다?”
“하하 영국에서 귀한 분들이 오셔서 마중 나가느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라부아지에는 기요탱 박사의 말에 활짝 웃으며 답했다.
“영국에서 온 귀한 분들?”
“자, 여기 두 분입니다.”
라부아지에가 별실로 들어오자, 그 뒤를 이어 젊은 남자 둘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선생님들. 제임스 와트 사, 수석 엔지니어 윌리엄 머독입니다. 와트 선생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안, 안녕하세요. 나의 이름, 리처드 트레비식이다.”
“아, 다른 한 분은 아직 프랑스어를 배우지 않으신 분이라 제가 대신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분은 이스트 스트레이 파크 광산의 기술자 리처드 트레비식 씨입니다. 젊은 분이지만 광산 기술자라는 자리에 오르신 유능한 분이랍니다.”
“아니 이런 귀한 분들을 어떻게 모셔왔습니까, 라부아지에 선생!?”
“하하 예전에 제가 와트 선생에게 도움을 준 일이 있어 혹시 이번 일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지요. 우리가 증기기관을 이용한 인쇄기계를 만들고 있다고 얘기하니, 바로 이렇게 기술자들을 보내주셨지 뭡니까.”
라부아지에의 소개가 끝나기가 무섭게, 윌리엄 머독이라는 기술자가 기계 쪽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그럼 바로 한 번 봐도 될까요?”
“아니요.”
페시옹이 그런 머독의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이게 무슨...?”
황당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머독에게, 페시옹은 쟁반에 남은 간편식사를 내밀며 말했다.
“라부아지에 선생님, 그리고 기술자 두 분 모두 시장하실 텐데. 밥부터 드시고 이어서 하시지요.”
“그래, 그래! 일단 배부터 채우고 하십시다 그려! 여기 포도주도 있소. 하하!”
난생 처음 받는 대접에, 영국에서 온 기술자 두 명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
1790년 3월 초순.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 빈.
“허, 기욤 재무총감이 그랬단 말이지요?”
“예, 선제후 전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권리를 가진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시스 퀼른 선제후는 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허허. 연극이라, 외교부 친구들이 그 사람보고 리슐리외, 리슐리외 하는 게 괜스레 그러는 게 아니었군. 하기야 현실적인 감각 없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어찌 하시겠습니까.”
“뭐 기욤 그 자가 제안한 연극을 해도, 원래 우리가 제안한 안대로 가도, 둘 다 결과는 똑같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대신 10억 리브르 전액 탕감에서 무이자 무기한 10억 리브르 상환으로 조건을 바꿉시다. 우리도 나라를 팔아넘긴다는 악명은 가지고 갈 이유가 없어졌으니.”
“그렇다면 연극 날은, 기욤 총감이 얘기한 대로 하시겠습니까?”
선제후는 그런 괴테의 물음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제후 전하의 명, 잘 알겠습니다.”
괴테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이야기는 어떻게 잘 되었소?”
귀족과 성직자 수십이 모인 호프부르크의 궁전의 방 안에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자신을 부르는 옆 좌석의 귀족을 바라보고 말했다.
“애초에 기욤 그 자는 우리 독일인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도 제국에 별 관심은 없어 보이더군요.”
“하기야 제국으로 온 것도 오를레앙 그 자의 검은 속셈 때문 아닙니까. 선대 카이저가 살아있었다면, 기욤 그를 이용해 우릴 얼마나 볶아 먹었을지. 이것 참 소름이 돋는군요.”
“그래도 이번 카이저가 될 레오폴트 대공은 말이 좀 통하는 사람 같으니 다행이지요. 기욤 그 자도 오늘을 마지막으로 제국에서 떠나니 한시름 놨습니다.”
“음, 맞는 말이오. 하하하!”
한참을 서로 속닥거리며 웃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귀족들은, 한 사환이 들어와 외치는 말에 자세를 다시 바르게 했다.
“토스카나 대공 전하 납시오!”
곧, 흰 옷에 주홍빛 망토를 두른 마흔 중반의 남성이 들어와, 방 한 가운데 꼿꼿이 허리를 피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반갑소, 오랜만이구료 다들.”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 전하를 뵈옵나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소. 내 그대들에게 내 뜻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오만?”
“여부가 있겠나이까.”
“그래, 카이저의 제관은 언제 줄 생각이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일어나 대공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선대께서 승하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예법 상 9월까지는 기다리시지요.”
대공은 공작의 말에 만족스럽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좋소. 앞으로 그대들과 좋은 관계가 되리라 믿겠소.”
“““예, 대공 전하.”””
***
프랑스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 탄 우리는, 이제 막 숙소에서 벗어나 빈의 시가지로 향하고 있었다.
“오를레앙 이 씹새끼. 돌아가면 가만 안 둬.”
“···?”
“뭐야 기욤 넌 왜 안해?”
“아니, 마티유 형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욕하는 건 처음 봐서.”
하긴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누구라도 장기 출장을 강제로 세 달 넘게 가면 사람이 회까닥 돌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누군가.
냉철한 21세기를 살다온 현대인이자, 그 냉철함에 사기를 당한 임기찬 아닌가.
씨발. 열 받네 또.
큼큼. 아무튼 본디 21세기 현대인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법.
유연한 사고, 남 탓하지 않기.
내가 멀티플레이 게임에서 배운 승리의 주문이자,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주문.
이것만 있다면 어느 난관이든 해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오를레앙이 씹새끼긴 해.”
“음음, 역시나.”
마티유 형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우리가 탄 마차가 멈추더니 다부 소령님이 마차 창문을 통해 슬며시 얼굴을 내밀었다.
“총감 각하. 죄송합니다. 시민들이 길을 비키질 않는 바람에...”
“아아... 때가 된 건가.”
“···예?”
“다부 소령님, 그 사람들 내쫓지 말고 그대로 두십쇼.”
“예? 아, 예.”
다부 소령님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뭐야 너 또 뭔 일을 꾸미는 거야?”
“형은 여기 있어. 잠깐 갔다올게.”
주연 기욤 드 툴롱. 각본 기욤 드 툴롱. 감독 기욤 드 툴롱. 번역 요한 볼프강 괴테.
연극을 지금 시작합니다.
나는 마차 밖으로 나온 뒤, 마부석에 올라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오오, 빈의 시민 여러분! 나에게 무슨 질문이 있길래, 이 사람의 발을 잡는 겁니까!”
“총, 총감 각하께서 나오셨다! 오오 총감 각하! 부디 저희의 질문에 답해주십시오!”
“이런, 이런! 파리까지 갈 길이 멀어, 차마 그대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가 없겠구려! 무엇이 궁금하길래 이 사람에게 묻는고?”
“현자이신 기욤 총감 각하! 전 하루 온 종일 일해도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대체 연유가 무엇일까요?”
“허, 그게 사실입니까? 분명 며칠 전 제가 참여한 연회에서는 속을 대구살로 채운 구운 돼지가 나왔었는데! 오오 통제라!”
“기욤 총감 각하! 제가 살고 있는 집은 100 굴덴 짜리 허름한 오두막입니다만, 돈이 없어 벌써 마지막으로 보수한 지도 이십 여 년이 넘게 지났나이다. 부디 은혜를 내려주옵소서!”
“허, 가엾고 딱한 자로다! 내 수중에 있는 10 리브르 짜리 지폐를 주겠소! 10 굴덴이나 마찬가지인 돈이니. 이 돈이면 그래도 천장은 고쳐 볼 수 있을 것이오. 그나저나 이상하구려! 분명 내가 여러분들이 섬기는 귀족들에게 선물로 받은 담뱃대는 아프리카에서 온 귀한 상아로 만든 것인데, 여러분들은 그런 허름한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니!”
나는 주머니에서 지폐와 파이프 담뱃대를 꺼내 모두가 볼 수 있게 흔들며 말했다.
“기욤 총감 각하! 저는···!”
“오오! 이 얼마나 안타까운지고!”
나는 이어지는 질문세례에 이마에 손바닥을 올리고 통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21세기에서 배운 승리의 주문 외에 하나가 또 있다면, 잘 풀려가는 일도 한 번에 꼬여버리고, 분란과 혼란을 야기하는 패배의 주문이 있다.
유연한 남탓, 사고하지 않기.
아니 여러분들이 그렇게 힘드시다구요? 이상하다 너네 나라 귀족들은 안 그러던데? 구체적인 건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 잘 모르겠고, 아무튼 난 갈 사람임. 너네끼리 알아서 해.
마치 전체 채팅으로 신경을 살살 긁어대는 잘 큰 상대 원딜처럼.
명절날 친척에게 지 잘났다고 자랑 하는 짜증나는 사촌처럼.
나는 한참을 오페라 배우처럼 온갖 제스처를 다해 청중들의 가슴이 웅장해지게 만든 뒤 다시 마차에 올랐다.
내가 마차에 타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던 사람들이 홍해마냥 순식간에 길을 텄다.
물론 약속을 한 거긴 하지만.
“···총감 각하. 독일어는 언제 배우신 겁니까?”
군중이 물러나자, 다부 소령님은 다시 내 마차 쪽으로 다가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조그마한 종이를 꺼내 다부 소령님에게 흔들었다.
“배운 게 아니라 외워서 말한 겁니다.”
“예?”
“그건 됐고. 다부 소령님, 전속력으로 파리까지 달립시다.”
“예? 아, 예! 각하.”
이제 우리 모두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지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