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자 (4)
“루트비히? 루트비히! 아니 루트비히 이 녀석이 대체 어디로 간 게야?”
“궁정악단장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파티 홀 근처를 빠른 걸음으로 뛰어다니는 마흔 줄의 신사에게 근무를 서던 군인들이 다가가 물었다.
신사는 이마에서 삐질삐질 흘러내리는 땀을 대충 닦으며 병사들에게 물었다.
“아, 군인 양반들. 혹시 여기 인상 좀 더러운 청년이 지나다닌 적 있소?”
“청년이요? 전 방금 교대해서 잘 모르겠는데... 이봐! 크레이프, 넌 뭐 아는 거 있어?”
부사관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답하더니 옆에 있는 병사에게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글쎄요, 하사님. 저도 잘은...아! 그러고 보니 한 십 분 전쯤에 누가 정문 쪽으로 달려 나가긴 했었습니다.”
“호, 혹시 그 사람 인상착의가 어땠는지 알고 계시오?”
“어...아마 검은 정장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아이고 이런! 일단 알려줘서 고맙소.”
“아...예.”
중년 신사는 병사의 말에, 병사의 손을 마주잡고 한 번 흔들어준 뒤 부리나케 정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정문 밖은 가지각색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이라도 되는 건가? 하필 뭐 이리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지 원!”
중년 신사가 늙은 몸을 힘들게 움직여 사람들 사이를 겨우겨우 뚫고 나오자,
저 멀리 검은 정장을 입은 악사 한 명이 사람들 앞에 서서 도로를 기웃거리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루트비히? 아이고 이놈이 정말!”
중년 신사는 한 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사람들의 바다를 온갖 고생 끝에 헤집고 나와 악사의 어깨를 잡고 자신을 향해 돌렸다.
“루트비히! 이놈! 여기서 대체 뭐하는 게냐!”
“어, 어?! 단, 단장님?”
악사의 눈이 중년 신사의 불호령에 놀라 동그랗게 변했다.
중년 신사는 악사 루트비히의 얼굴에 대고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 다른 단원들은 모두 저녁 공연을 위해 연습 중인데 혼자 몰래 빠져나가? 이런 식으로 네 마음 가는대로 행동 하고 싶다면 차라리 궁중악단을 때려치우거라!”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악사는 단장의 말에 두 손을 싹싹 빌면서 고개를 연신 세차게 저었다.
“···후...그래 앞으로 그러지 말거라. 그런데 연습은 왜 몰래 도망쳐 나온 게냐?”
아들뻘 되는 청년의 모습에, 결국 중년 신사는 짧게 한숨을 쉬고 악사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물었다.
“그것이...”
뿌우우우
루트비히가 무언가 말하려 할 때, 저 멀리 도로 끝에서 말을 탄 장교가 흰 장갑을 쓴 손으로 황동색 나팔을 있는 힘껏 불며 다가왔다.
“물러나라! 물러나! 거기! 도로 안으로 들어오지 마시오!”
그와 동시에 총을 멘 병사들이 마차도로와 사람이 다니는 인도 사이를 막아서기 시작했다.
그 뒤로, 프랑스의 삼색기를 들고 있는 기병과 합스부르크의 쌍두 독수리가 그려진 깃발을 든 기병이 나란히 지나갔다.
저 멀리 코너에서 프랑스군 기병대와 오스트리아군 기병대 수십이, 가운데에 자리한 젊은 사내 몇을 둘러싸고 천천히 길을 걸어갔다.
“···허, 고작 프랑스 인들의 행진 한 번을 보고 싶은 것 때문에 몰래 도망친 게냐?”
중년 신사는 악사를 보고는 또 다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겨, 겨우 행진이라니요?! 단장님은 저기 저 가운데 흰 말을 타고 있는 분이 누군지 모르십니까?”
그런 중년 신사의 물음에, 악사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되물었다.
중년 신사는 악사의 말에 다시 행진하는 프랑스인들을 보고 가운데에서 호위를 받는 사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백마 탄 프랑스인 말이냐? 겨우 루트비히 네 또래쯤으로 보이는데?”
“아니, 단장님! 어떻게 기욤 드 툴롱을 모르세요?! 단장님 설마 오스트리아인이 아니라 영국 간첩이십니까?”
“뭐? 아니 루트비히 이놈이 할 말 안할 말이 있지. 어떻게 사람보고 영국 놈이라고 한단 말이냐? 그리고 내가 프랑스인 이름 하나 모른다고 왜 오스트리아인이 아니게 되는 거냐? 고얀 놈 같으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기욤 드 툴롱을 모르는 건 좀 아니죠! 제가 평소에 잡지나 신문 좀 읽으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잖습니까, 매일 악보만 들여다보지 마시고 밖에도 좀 나가보세요. 악!”
악사는 중년 신사의 손에 맞은 정수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냈다.
“흥, 보나마나 또 계몽주의자니 뭐니 하는 너희들만의 우상이겠지. 이래서 요즘 젊은 놈들은 안 된다는 게야. 이 악단장 젊을 때는 말이다? 삶이 아주 전쟁터였어요! 전쟁터! 걸핏하면 전쟁터에서 사람이 죽어 나자빠지는데 계몽주의니 뭐니 그런 게 어디 있어?! 에이잉.”
“그, 저...”
“등 따숩고, 배부르니까 아주 요사스런 말장난하는 놈들이 나와서 사람들을 홀라당 홀려버리니 원. 특히 너 같은 젊은이들 말이다, 무슨 볼테르니 디드로니...차라리 그 시간에 악보 한 줄을 더 쓰거라, 이놈아.”
얼굴을 찌푸린 채 말을 쏟아내는 단장의 말에도, 악사는 눈을 크게 뜬 채 계속 말했다.
“아니 단장님 말씀을 다 감안하고 봐도 기욤 드 툴롱은 대단한 사람이라니까요?”
“시끄럽다 이 녀석! 넌 오늘 공연 때 실수라도 하나 하기만 해봐라, 바로 혼구멍을 내줄 터이니. 어서 따라오거라.”
단장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단호하게 루트비히를 쏘아붙인 후, 몸을 뒤로 돌렸다.
“그, 단장님?”
“왜 그러느냐, 루트비히.”
“기왕 이렇게 나온 거 조금만 더 보고 가면 안될···, 악!”
***
“아, 이분이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이시군. 만나서 반갑소.”
“아 예,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하.”
“그대의 앞날을 성자와 성령과 성부께서 지켜주시길. 반갑습니다.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
“아 예,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하.”
“반갑소이다!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 본관이 듣기로는 귀하도 명예로운 군인 출신이라던데 사실이오?”
“아 예,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하.”
악수.
또 악수.
또또 악수.
아 손이 달달 떨린다. 악수도 엄연한 노동이었어.
선제후니 어디어디 성주니, 공작이니 백작이니, 장군이니 대령이니, 대주교니 주교니 뭐 이리 악수를 하자는 사람이 많냐?
내가 이렇게 고된 노동을 하는 동안, 내 옆에 있는 그루시 형은 입을 계속 우물우물 거리고 있었다.
“···아까 그렇게 진지하고 믿음가던 사람은 어디가고 입에 먹을 것만 우겨넣는 사람이 남았담.”
어디 말 좀 해보시지.
그루시 형은 입 안에서 우물거리던 걸 목 뒤로 넘긴 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말했다.
“어허, 기욤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겐가.”
“···왜, 아니야?”
“적의 식량을 축내 보급품을 지출하게 만드는 전술을 시도하고 있는 거라고 말해주게.”
뭐지 역청야전술인가?
“아...그러시군요?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그루시 대원수님.”
전쟁나면 아예 제 발로 걸어서 포로로 잡혀 들어가시겠네.
“···분위기가 그리 나쁜 것 같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총감 각하.”
주위를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던 다부 소령님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도 긴장을 너무 늦추지는 마세요, 소령님.”
“걱정 마십시오. 오늘 음식 단 하나도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
“어, 음...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구요. 적당하게만 긴장하세요...”
이쪽은 너무 철벽같으신데.
“야 기욤아.”
“왜 마티유 형.”
“다부 소령님 말대로 분위기가 딱히 우리한테 적대적이진 않은데 어떻게 할래.”
“···그래도 중간에 나갈 수 있으면 빠져나가는 게 낫지. 굳이 계속 남아 있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진 않잖아.”
“흠. 쉽지 않네.”
그때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와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아 기욤 재무총감 각하, 오셨군요. 제 초대를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셨을 때 찾아뵀어야 하는 건데 워낙 사람이 많다보니 미쳐 오신 줄 몰랐습니다.”
“아닙니다, 공작님. 언제 보던 상관이 있나요. 본 게 중요한 것이지.”
나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말에 손을 마주잡고 말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편해지는 군요. 아 혹시 음악 좋아하십니까?”
음악? 갑자기 무슨 음악?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공작에게 되물었다.
“음악이라면?”
공작은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곤 내 질문에 답했다.
“오늘 합스부르크 궁중악단이 연회 음악을 맡기로 해서 말입니다. 혹시 재무총감께서 음악에 조예가 깊으시거나 관심이 가신다면 한 번 들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아 저야 좋지요.”
근데 왜 궁중악단이 황실도 아니고 귀족 나리들 잔치에서 연주를 하지.
이 나라 제국이 맞긴 한가? 돌아가는 꼴이 별로 제국 같지 않은데. 제국보다는 오히려 반상회장국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감사합니다, 총감 각하. 그러면 나중에 뵙지요.”
내 수락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저 멀리를 향해 사라졌다.
잠시 뒤로 물러나 있던 마티유 형은 공작이 사라지자 다시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저 양반이 뭐래, 기욤아?”
“···같이 노래 좀 듣지 않겠냐는데?”
마티유 형은 내 말에 팔짱을 끼고는 발을 까닥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흠. 어떻게 할 거야?”
“들어나 보지 뭐. 어차피 따로 할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도망갈 껀덕지도 없는데.”
“씁. 그렇긴 하네.”
***
짝짝짝
궁중악단이 한 곡의 연주를 마치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흐뭇한 미소로 박수를 치며 말했다.
“우리 신성로마제국의 자랑, 궁중악단의 실력이 어떻습니까?”
“웅장하군요.”
“하하, 프랑스인들에게 미식이 있다면, 우리 독일인들에게는 음악이 있지요. 좋아해주시니 다행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얘기했을 뿐인걸요, 지금 들은 곡이...”
“카프리치오입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우리 제국의 자랑스러운 위인이 만든 곡이지요.”
모차르트?
“아, 설마 그...모차르트요?”
“오, 알고 계십니까? 프랑스 쪽에서도 우리 모차르트 씨를 알 줄은 몰랐군요.”
“하..하하.”
음 염연히 말하면...프랑스가 아니라 대한민국 교과과정이 알고 있는 건데. 하긴 뭔 상관이야.
“혹여 총감께서 곡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내용이 있다면, 제가 악사를 불러보겠습니다.”
“실례가 아닐런지요?”
“하하, 손님이시지 않습니까. 손님께 정성을 다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뿐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작은 시종을 부르더니 독일어로 뭐라 뭐라 쑥덕였다.
시종은 공작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곤, 저 멀리 멀어져갔다.
“어디, 악사가 올 때까지 심심풀이 겸 간단한 얘기라도 하시겠습니까, 총감 각하?”
“저야 좋지요, 공작님.”
“그러면 저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눈동자가, 여지껏 본 적없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