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자 (3)
1790년 2월 27일.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 빈.
합스부르크 왕실 묘지의 육중한 문 안에서, 그 너머를 향해 늙은 사제가 근엄하게 말했다.
“누가 왔느냐.”
탕 탕 탕
문 밖에서,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지팡이로 육중한 문을 두들기고는 손에 쥔 책자를 읽어나갔다.
“폐하께서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대공이시며,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 일리리아, 보헤미아와 롬바르디아의 왕이시며 파르마와 바이에른의 대군이시고, 신성로마제국 신민의 카이저이신 요제프 베네딕트 안톤 미하엘 아담이시다!”
문 안의 늙은 사제는 남자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우린 그가 누군지 모른다.”
탕 탕 탕
다시 한 번 지팡이가 문을 때렸다.
“누가 왔느냐.”
사제의 물음에, 남자는 책자의 다음 페이지를 펴고 활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요제프 베네딕트 안톤 미하엘 아담! 부르크 극장의 건축가이자 신성로마제국 법률의 창시자이며, 수많은 대학교의 명예 학장이자 콘스탄티노플 수복을 위해 이교도들에게 맞선 고귀한 영웅이다!”
“우린 그가 누군지 모른다.”
탕 탕 탕
마지막으로 지팡이가 문을 세차게 때리자, 사제는 다시 한 번 문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누가 왔느냐.”
문 너머에서, 사제를 향해 단순한 한 문장이 들려왔다.
“요제프. 한낱 죄 많은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들어오라.”
황제.
카이저가 죽었다.
전생이고 현생이고 그냥 내 인생엔 마가 낀 게 분명해. 어쩜 이렇게 주옥같은 일만 계속 일어난담?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고등학교 야간자습 때 몰래 담 넘고 나가서 친구들이랑 몇 번 놀러나간 거 빼면 나 되게 모범적으로 살았는데.
“···담배 마렵네 진짜.”
담배란. 대체 뭘까? 담배 때문에 죽은 사람마저 피게 만드는 마성의 물건이라니.
“엥? 너 담배 안 피잖아.”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마티유 형은 의아하다는 듯 날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안 핀 게 아니라 끊은 거야.”
“···그래? 얼마나 끊은 건데?”
“···19년.”
“뭐야 19년이면 기욤 너 태어났을 때잖아. 그게 안 핀 거지 끊은 거냐?”
마티유 형은 웃기는 소리 말라는 듯 내게 말했다.
“···아무튼 그런 게 있어.”
그러던 중 장례식 이후 왕실 묘지 바깥에서 궁시렁 거리던 나에게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기욤 재무총감 각하, 안녕하십니까.”
사각턱의 중년 귀족은 검은 모자를 벗고 나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님이시군요.”
한 차례 악수가 끝나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내게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손님 되시는 분께 경사스러운 일은커녕, 이런 침울한 분위기를 보여드리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카이저께서 돌아가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인명은 제천이라지 않나.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고 대처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내 말에 어느 정도 얼굴이 풀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이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아, 재무총감 각하. 오늘 장례식 때문에 빈에 모인 귀족들과 명사들을 한군데 모아 담소를 나누려하는데 혹시 오후에 시간 되시는지요? 꼭 오시라는 건 아닙니다만, 좋은 인연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좋은 인연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해서? 이거 사이비 종교에서 팜플렛 나눠줄 때 주로 하던 말 아닌가.
갑작스러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제안에, 나는 눈을 잠시 이리저리 굴리다가 말했다.
“···시간이야 남지요.”
만나서 얘기를 나누기로 한 카이저가 죽은 바람에 내 일정은 완전히 텅텅 빈 상태다.
“그렇다면 부디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합니다.”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이며 말하는 공작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답했다.
“예, 뭐.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감 각하. 그러면 시간에 맞춰 시종을 보내겠습니다.”
***
“···기욤아, 가는 게 맞냐?”
숙소에 도착하고 나서, 우리 일행은 응접실에 모여 방금 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말을 곱씹기 시작했다.
“글쎄.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뭐. 잠깐 간만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바로 뜨면 되겠지.”
나는 마티유 형의 물음에 답했다.
그 때 내 맞은편에 앉은 그루시 형이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그루시 형은 왜?”
“모시던 주군이 세상을 떴는데, 그 누구도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사람이 없어. 아무리 냉철한 독일인들이라 해도 한 명쯤은 있어야하는 게 상식 아닌가?”
그루시의 말에 나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내 곁에 앉아 있는 다부 소령님을 보고 말했다.
“···다부 소령님?”
“예, 각하.”
“주재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대사를 데려와주세요. 되도록 빨리.”
“명 받잡겠습니다.”
***
가장 잘 쓴 글과 말은 단 한 문장으로 모든 상황을 설명한다고 하던데.
이게 딱 그 판박이네.
나는 주재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대사관에서 보낸 한 줄의 편지를 모두가 들리도록 읽어 내려갔다.
“작고한 카이저, 요제프 2세는 열렬한 계몽주의자이자 개혁파-다. 나는 이 상황이 싹 다 이해 가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제일 먼저 입을 연건 마티유 형이었다.
“딱 우리 프랑스에서 얼마 전까지 있었던 일이 여기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다음은 그루시 형.
“나 또한 마티유와 비슷하네. 꼴 보기 싫은 카이저가 죽었으니, 이제 귀족들이 마음에 안 들었던 체제를 개편하려고 모이는 걸로 보여.”
루이 니콜라 다부 소령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소관의 생각 또한 같습니다.”
“음.”
역시나.
다들 신음을 흘리는 가운데, 마티유 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거기에 기욤을 쟤를 왜 초대하는 거지? 그냥 지들끼리 제국을 가지고 지지고 볶던 말던 우리 프랑스인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길래.”
그루시 형은 예의 그 장난스러운 모습은 내려놓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우리 모두를 눈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경고 아닌가 싶군.”
“경고?”
내가 그루시 형이 말한 단어를 그대로 되묻자, 그루시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나갔다.
“그렇네. 빈에서 괜시리 분란 일으키지 말고, 다음 카이저가 즉위할 때까지 잠자코 있다가 돌아가라는. 기욤 자네를 향한 경고.”
음.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야.”
내가 싫던 좋던, 물론 난 별로 좋진 않지만.
난 이미 시민의 아이콘이고 프랑스 혁명정부의 요인이란 말이지.
저 귀족 나리들 입장에서는 평화로운 앞마당에 불똥이 튀는 걸 원치 않을 거다.
나는 한 번 숨을 깊게 들이마시었다가 내뱉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단 가서 분위기를 직접 한 번 살펴보고 오는 게 제일 상책이겠어.”
“우리 추측대로라면 저 쪽은 기욤이 널 눈엣가시처럼 보고 있을 텐데,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마티유 형은 얼굴을 구기며 내게 말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잖아. 한 번 보고 오는 게 대책을 수립하는 거에 훨씬 더 도움될 거야.”
“···지, 지피 뭐?”
아 이거 모르네.
“···동양의 격언이야.”
그때 내 귀에 니콜라 다부 소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소관이 한 마디 올려도 되겠습니까.”
“예, 말씀하세요. 소령님.”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소령님은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유사시를 대비한 호위계획을 짜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최악은 항상 대비해야지.
***
복귀 예정일은 3월 중순.
오늘은 2월 말.
한 달 안에 무조건 코르시카에서 나가야 한다.
나폴레옹은 집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이거 상당히 아프게 맞았고마.”
그런 나폴레옹에게 며칠 전 뭍에서 형의 휴가 소식을 듣고 온 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가 걱정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물었다.
“행님. 어떻게 할 기가.”
나폴레옹은 동생의 물음에, 다시 한 번 숨을 깊게 들이마시었다가 내뱉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뭘 어떻게 하나, 파올리 선생 말대로 따르는 수밖에는 없제.”
덤덤하게 말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에 뤼시앵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양반 친위대를 맡는다고? 행님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할 긴데!?”
큰 소리로 외치는 뤼시앵의 모습에도, 나폴레옹은 그저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내빼모, 우리 보나파르트. 코르시카에 영영 못 들어온다. 우리가 자란 이 메종 보나파르트도 버리고, 정든 곳 다 버리고 프랑스 본토로 도망가야 살 수 있데이.”
“···.”
그런 형의 모습에 뤼시앵은 입술을 꾸욱 이로 씹을 뿐, 형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뤼시앵의 혀에 피 맛이 맴돌기 시작했다.
말을 끝낸 나폴레옹은 그런 동생 뤼시앵을 지긋이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마, 뤼시앵이.”
자신을 부르는 형의 말에, 뤼시앵은 땅을 향하던 고개를 들고 형을 다시 쳐다보았다.
“···와 부르는데.”
진지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하는 뤼시앵의 모습에, 나폴레옹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변호사라 카는 놈이, 재판장에서 수세에 좀 몰렸다꼬 그래 죽을 표정 짓나.”
뤼시앵은 입을 삐쭉 내밀고는 형의 말에 불평했다.
“···재판장에서는 적어도 공판에서 졌다고 죽지는 않제.”
“이야 뤼시앵 이 자식이 법 공부하더니 말만 늘어가꼬, 이제는 말로 형도 잡아 먹을라카네.”
나폴레옹은 그렇게 말하면서 동생의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기 시작했다. 마치 그 옛날
어린 시절의 형제처럼.
뤼시앵은 그런 둘째 형의 모습에 분통이 터져 짜증을 냈다.
“아, 하지마라! 농담할 기분 아이다.”
“농담 아니다, 인마. 하하하!”
흐뭇하게 웃으며 말하는 형의 모습에도, 뤼시앵은 계속해서 울분에 찬 얼굴로 쏘아 붙였다.
“그 말 잘하는 거 가지고,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수도 없는데. 그게 뭐가 중요하나? 말로 뭐 배를 띄워가, 프랑스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도 아이고.”
“됐다. 호랭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캤다.”
그러나 뤼시앵이 얼마나 울분에 차서 말하던, 짜증을 내던 형은 하하 웃으며 계속 못알아 먹을 말만 계속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건 또 어디서 들어먹은 이상한 소리고?”
뤼시앵은 결국 분노를 내면에 삭히고, 영문 모를 형의 말에 맞장구치듯 물어보았다.
“기욤이라꼬, 친한 친구가 해준 말이다. 동양의 신비인가 머시긴가.”
“···설마 기, 기욤 재무총감 말하는 기가?”
“어 맞다.”
뤼시앵은 나폴레옹의 말에 입이 떡 벌어져 그저 단말마만을 냈다.
“와...씨...”
“아무튼 금마가 해준 얘기다. 적진에 들어가도, 타개할 기회는 무조건 한 번은 온다꼬.”
그러니까. 정신만 잘 차리고 있자, 뤼시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