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자 (5)
“우리 독일에서 내려오는 신화입니다만, 오딘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오딘? 토르의 아버지?”
영화에서 나왔던, 번개가 나가는 시밤-쾅 망치를 든 근육질 금발 미남의 아버지 되는 그 애꾸눈 할아버지 말하는 건가?
“오 아시는군요? 프랑스인이 알고 있다니 의외입니다 그려.”
“그냥...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단편적인 부분만 대강 아는 정도입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 오딘의 전설에서는, 헬라라는 신이 한 명 나온답니다. 본디 정상적인 신이었던 그녀는, 신들의 왕. 오딘에 의해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고 하지요.”
“···그렇습니까?”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말입니다. 뿐 만 아니라, 오딘에 의해 반신불수가 된 이후로도. 헬라는 오랜 시간 동안 죽은 자들의 땅에서 고통 받았다지요.”
“그렇군요.”
“그러나 오딘의 말은 지엄하고, 또 오딘이 가진 힘은 강대했기에. 헬라는 숨을 죽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
아무 말 없이 공작의 눈을 응시하는 내 모습을 보고도, 공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강대했던 오딘의 힘도, 라그나로크라는 운명이 다가오자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를 노려, 헬라는 마침내 죽은 자들의 땅에서 나와 오딘을 단죄하고 복수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흥미롭군요.”
“하하. 그렇습니까?”
“예.”
“재무총감 각하.”
“왜 그러십니까, 공작님.”
사각턱의 공작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순식간에 지우고 말했다.
“우리 신성로마제국은, 참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우리도 다시 편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만. 총감 각하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
“신성로마제국에서, 부디 좋은 여행되시길 빕니다, 총감 각하.”
공작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에게 싱긋 웃어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
“단장님. 잠시만 이리 와주십시오.”
한참 연주를 계속준비하고 있던 무대 뒤에서, 궁중악단장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정장을 입은 사환이 한 명이 자신을 바라보고 손짓하고 있었다.
“다음 곡 준비해야하는데 왜 그러시오?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님께서 악사 한 명이 필요하시답니다.”
“아니 공작님이 무슨 일로 악사가 필요하단 말이오?”
“이번에 사절로 온 프랑스인에게 우리 음악을 알려주고 싶으신가 봅니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단장은, 사환의 마지막 말에 아-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렇구려.”
“똘똘하고 말 잘하는 친구로 한 명 뽑아서 보내주시지요.”
“알겠소.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단장은 뒤로 돌아, 이제 막 공연을 끝내고 다음 조와 교대하는 악사들을 향해 손바닥을 두어 번 큰 소리 나게 치며 말했다.
“자, 모두 주목.”
삼십 여개에 달하는 악사들의 눈이 단장을 향해 움직이자, 단장은 그 눈들을 모두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님께서 이번에 온 프랑스인을 상대로 우리 독일인들의 음악을 설명할 사람이 필요하시다고 했다. 혹시 누구 가고 싶은 사람 있느냐?”
“단장님, 혹시 그 프랑스인이 누구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악사 한 명이 손을 들고 단장에게 물었다.
“그...프랑스 인 이름이 아마... 빌헬름이었을 게다.”
단장의 말에, 악사들이 숙덕이기 시작했다.
“빌헬름···? 기욤?”
“단장님, 혹시 기욤 드 툴롱 그 사람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맞네, 프랑스인이니 발음이 빌헬름이 아니라 기욤이지. 혹시 가고 싶은 사람 있는가?”
“제가!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단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올라를 들고 있던 악사 한 명이 손을 번쩍 들고 크게 외쳤다.
“···루트비히?”
“네! 단장님!”
악사, 루트비히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듯 한 모습에. 단장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며 못 이기겠다는 듯 말했다.
“···에휴. 그래, 네가 가거라.”
***
하 이건 뭐 대놓고 얘기만 안했을 뿐이지 공작이 날 아주 눈엣가시처럼 보고 있구만.
아. 다음 황제라는 작자가 빨리 돌아와서 나 좀 쫓아내줬으면 좋겠다. 눈칫밥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단 말이지.
“아, 안녕하십니까! 합스부르크 황실 궁중악사 루트비히···!”
“아 예, 안녕하세요. 프랑스 왕국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입니다.”
나는 내게 고개를 숙이는 악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여, 영광입니다! 각하!”
악수를 한 뒤, 악사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방실방실 웃으면서 내게 물었다.
“그, 저 어느 부분이 궁금하신지...?”
“예? 아, 제가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말입니다. 대략적으로 얘기해주시겠습니까.”
“넵! 알겠습니다. 이 곡은 모차르트 선생께서 몇 년 전에 작곡하신···.”
그러나 열띤 악사의 설명에도, 공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내 머리는 귀로 무언가를 듣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아.
딱 한 가지만 빼고.
“···혹여 더 궁금하신 게 있다면 저,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게 마음껏 물어봐 주십시오, 각하!”
“···루트비히 뭐, 라구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악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예? 아. 저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게 마음껏 물어보셔도 괜찮다는 말이었습니다!”
“···베토벤? 당신 이름이 베토벤입니까?”
“예? 예, 그렇습니...다만?”
이게 웬 횡재냐.
***
“공작이 뭐라고 하던?”
연회가 파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마티유 형이 내게 물었다.
“···그 양반이 말했던 것처럼 돌려 말한 걸로 들을래, 아니면 그냥 딱 까놓고 말한 걸로 들을래?”
“딱 까놓은 거.”
“여기에서 소란 일으키면 별로 재미없을 거라는데?”
“···씁.”
“···기욤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번에는 그루시 형이 내게 말했다.
“나? 난 원래도 개입할 생각 하나도 없었는데 뭐. 저쪽에서 강하게 나오던 말던 뭔 상관이야.”
“음, 그렇기야 하군.”
애초에 프랑스인이 왜 오스트리아 일에 신경을 써? 내가 빨갱이도 아니고 남의 나라 사정에 간섭할 이유는 없지 않나.
“그럼 뭐 오스트리아까지 헛걸음한거네? 에효 또 한달 동안 마차에 갇혀 지낼 생각하니까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야.”
마티유 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글쎄, 완전 헛걸음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카이저도 죽어버려서 우리 완전 붕 떴잖아.”
“대단한 인재를 하나 캐냈거든.”
“···?”
마티유 형은 내 말에, 의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쪽 눈을 흘겨 떴다.
“아 그런 사람이 있어. 자자, 숙소에 도착했으니 다들 내립시다.”
“···그루시 형”
“왜 그러나 마티유.”
기욤이 혼자 몸을 경쾌하게 흔들며 숙소로 들어가자, 아직 말에서 내리지 않은 마티유와 그루시는 서로를 마주보고 입을 열었다.
“난 가끔 쟤가 뭔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하하, 우리가 기욤의 생각을 못 따라가는 거겠지. 기욤이 어디 보통 사람인가?”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지. 미친 사람이면 몰라.”
“하하하!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군.”
***
“총감 각하.”
우리 숙소의 위병을 서던 부사관 한명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아 예, 왜 그러세요.”
“총감 각하를 찾아오신 분이 계십니다.”
아 또 누군데.
“···내일 만나다고 전해주시면 안될까요.”
그만해! 내 피로도는 이미 맥시멈이라고. 박카쓰라도 주면 몰라.
“그게...꼭 총감 각하를 오늘 만나 봬야 한다고 다짜고짜 한나절을 기다리신 신사 분이라...”
“한...나절이요? 미치겠네.”
나 본다고 한 나절을 기다려?
나 왜 이렇게 인기 좋냐? 그것도 남자한테만.
“···돌려보낼 까요?”
부사관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하는 내 모습을 보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제가 만나서 몇 마디 나눠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총감 각하.”
나는 부사관의 인도를 따라, 숙소 한편에 마련된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응접실 의자에는 쉰 정도 돼 보이는 신사가 말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프랑스 왕국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입니다.”
“오오! 아닙니다, 각하를 실제로 본 것만 해도 이 사람에게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젊은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신사 분, 성함이?”
내 악수를 받으며, 신사는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 이 사람의 이름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라고 합니다. 각하.”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신?”
뭐지. 오늘은 세계 위인 특집인가.
괴테는 내 말에 부끄럽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허허, 총감 각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재주지요. 이 글쟁이의 이름을 총감께서 알고 계시다니 눈물이 다 나옵니다 그려.”
“그런데 괴테 작가님께서 저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나는 응접실 의자에 앉으며 괴테에게 말했다.
그러나 내 말에도, 괴테는 입을 한참 동안이나 꾹 닫고 있었다.
“그, 왜 그러시는 지...?”
그때, 괴테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총감 각하. 우리 신성로마제국에서도, 혁명의 불씨를 당겨주십시오! 전 제국의 신민들을 대표해 이렇게 간청 드리겠습니다!”
“아니.”
씨발.
톡 톡 톡
나는 의자 손잡이를 한참 동안 손가락으로 튕기다가 괴테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담배 태우십니까?”
“담배보다는 초콜릿을 더 선호하는 편이라...”
“그러면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응접실을 나와 아까의 부사관에게 다가갔다.
“아, 총감 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과 얘기는 다 끝나셨는지요?”
“중사님. 담배 태우십니까?”
“아, 예. 태웁니다만.”
“한 개비만 빌려주시죠.”
“···한 개비요?”
부사관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 파이프 좀 빌려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 아직 궐련이 없는 시절이지.
···궐련이나 만들어서 팔아볼까.
부사관은 제 군장 안에서 담뱃잎 뭉치를 꺼내 파이프 안에 꾹꾹 눌러 담은 후 부싯돌을 튕겨 스파크를 내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기 있습니다, 각하.”
“감사합니다.”
쓰으읍.
“···쿨럭쿨럭!”
아. 맞다. 이 몸으로는 담배 핀 적이 없었지.
매캐한 연기가 훅-하면서 폐로 들어오자 나는 사례 걸린 사람처럼 연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괜, 괜찮으십니까?”
“예, 예. 괜찮습니다.”
걱정해주는 부사관에게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후우. 감사히 잘 썼습니다.”
“아닙니다, 각하.”
파이프 담배를 모두 태운 나는 부사관에게 파이프를 다시 돌려주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 태우셨습니까?”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자, 괴테가 날 보며 말했다.
“예.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제안은 괴테 작가님 혼자 주시는 제안입니까, 아니면 뒤에 계신 누군가께서 주시는 제안입니까?”
“역시! 날카로우시군요.”
괴테는 흡족하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퀼른 선제후께서 주시는 제안입니다.”
“···퀼른이요?”
“작고하신 카이저의 형제이시자, 우리 계몽주의 예술인들의 후원자이시지요. 선제후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이 바로 시대의 변혁점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세상이 변했듯, 새로운 시대로의 변혁점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요.”
“선제후께서는 프랑스가 그 시대의 변혁을 시작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저 또한 그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프랑스의 민중은 제 손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비효율적이고 음습했던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새로운 천년제국, 아니. 시민제국을 열고 있지요.”
“···.”
괴테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총감 각하. 우리 제국은 얼핏 보면 하나인 듯 싶지만, 실상은 수백으로 나누어진 누더기 제국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반란이라도 일으키시겠다는 겁니까?”
“반란이라니요, 각하! 프랑스처럼 새로운 시대로 출발하려는 겝니다.”
나는 눈을 잠시 눈을 감았다가, 괴테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작가님. 전 제국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작가님과 그 선제후라는 분이 가지고 있는 세력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작가님은 저보고 총대를 메라고 하시는군요. 제 직업은 본디 사업가입니다. 그런 사업가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게 뭔지 아십니까, 작가님?”
“···뭐지요?”
“자신이 아는 분야가 아니라면 나서지 마라. 그게 바로 경영의 원칙입니다.”
“···음.”
“그러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온 종일 빈을 쏘다니는 바람에 많이 피곤해서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문고리를 잡고 손을 틀었다.
그 순간, 내 뒤에서 괴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제후께서는 프랑스가 신성로마제국에게 진 국가채무의 전액탕감을 보수로 제시하셨습니다.”
나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괴테가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되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고금리 채무 7억, 저금리 채무 3억. 총합 10억 리브르. 아닙니까?”
“···.”
“총감 각하. 전, 작가이기도 하지만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이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드릴 보수도 없었다면 오지 않았지요.”
어디 한 번 다시 얘기해 볼까요.
괴테가 덧붙이는 말에, 나는 의자에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