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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이상한 세상 (4) (65/341)

이상한 세상 (4)

덜커덕

“미안합니다, 동지들. 실패했습니다.”

조르주 당통은 주머니에서 꺼낸 묵직한 무언가를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당통 위원. 멀쩡히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당통의 말에, 장 폴 마라는 손사레를 치며 답했다.

“···씁. 이거 강선까지 파놓은 거라 멀리서 쏴도 잘 맞는데 아쉽군. 당통 동지, 혹시 멀리서라도 오를레앙 그 돼지새끼를 쏠 기회는 없었소?”

에베르는 입을 삐쭉 내민 채로 당통이 탁자에 올려놓은 영국제 권총을 주워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그런 에베르의 모습에 당통과 마라는 얼굴을 구겼다.

“···에베르 동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습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수확은 있었다고 말씀 드릴 수 있겠군요. 아마 이제 곧 재무총감과 국민의회가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오! 그게 정말입니까, 당통 동지?!”

당통의 말에 데물랭이 일어서며 말했다.

“예, 재무총감 각하가 직접 자신을 믿고 기다려 달라 하셨습니다. 국민의회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오를레앙도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겠지요.”

“오오...”

마라 또한 이어지는 당통의 말에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글쎄, 내 생각에는 너무 낙관적인 것 같은데.”

그런 분위기를 깨는 건 역시 에베르였다. 데물랭은 미간을 찌푸리며 에베르를 쏘아 붙였다.

“···에베르 당, 당신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사사건건 그렇게 초를 쳐야 직성이 풀리기라도 합니까?”

에베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데물랭을 잠시 쳐다보다가 코웃음을 치면서 눈을 부라렸다.

“직성이 풀리다니? 다들 오를레앙 그 놈을 루이 오귀스트 그 병신과 엇비슷하게 생각하나 본데, 애초에 그 놈이 십 수 년 간 우리를 속였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오?”

자신의 말에 입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하는 데물랭을 보면서 에베르는 계속 이어 나갔다.

“오를레앙 그 돼지는 자그마치 십 수 년 간 제 더러운 속내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교활한 놈이오. 심지어 이 몸, 자크 르네 에베르의 눈까지 속이고서!”

흥분한 에베르는 이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탁자 위의 램프에 비친 불꽃이 에베르의 얼굴 위에 일렁여, 가뜩이나 살기가 흉흉한 눈동자가 마치 악마의 것 인양 붉게 타올랐다.

“그 놈 손에 이제 작지만 근위대라는 군대까지 들어갔는데, 의회에 앉은 양복쟁이 몇이 지껄인다고 들어먹을 것 같소?”

천만에! 에베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덧붙였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는 바람에 에베르는 잠시 말을 끊고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가장 최선의 수는 오를레앙 그 놈의 가슴팍에 총알구멍을 내는 것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불발되었지. 그러면 이제 남은 건 무엇이냐!

두 번째 바스티유 요새를 함락시키는 수밖에. 그것도 안 된다면 세 번째, 네번째 바스티유도 무너뜨리는 수밖에!”

“···파리 시민들을 또 다시 죽게 만들 순 없습니다.”

당통의 목소리에 에베르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뭐, 오를레앙 놈이 우리 머리를 모두 잘라 노트르담 앞에 전시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일단은 재무총감 각하를 기다려 보자는 거지요.

그 분이 실패한다면 그 뒤에 일을 도모해도 늦지 않습니다.”

에베르는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내뱉더니 의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고 입을 열었다.

“···말끝마다 그 놈의 재무총감, 재무총감. 하, 그 자도 결국은 귀족이고 부르주아 아닌가? 재무총감이 만약 오를레앙처럼 여태껏 제 속을 감춘 거였다면 어떻게 할 건지 생각은 해 본 적 있소?”

“뭐야? 에베르 당신 지금 말 다했습니까!”

이번에는 마라가 에베르의 말에 노기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라,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소? 최악의 순간은 항상 염두 해둬야지. 까놓고 말해서 난 여기 있는 사람이 하는 말도 1부터 100까지 다 믿는 건 아니 오. 내가 보기에 당신네들은 유약하기 그지없거든.”

“유약? 당신이 특출나게 미친 거겠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선동해서 인민재판을 하는 게 무슨 시민을 위하는 거요!?”

“그러면! 혁명에 피가 안 흐를 수 있소!? 구제도 밑에서 꿀을 조금이라도 빨아재낀 놈들은 다 죽여야 새 세상을 열지!”

쾅!

“그만!”

당통은 탁자를 있는 힘껏 후려치며 외쳤다. 탁자에 부딪친 손바닥이 고통에 파르르 떨려왔지만 당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에베르, 나 당통의 이름으로 경고하겠소. 당신이 당신 밑에 있는 노동자들을 동원하던 뭘 하던 내 알바는 아니지만. 평범한 파리 시민들을 선동해 피를 본다면 내 가만 있지 않겠소.”

에베르는 당통의 모습에 잠시 얼빠진 얼굴로 당통을 응시하다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그래! 이래야 바스티유를 함락시킨 그 조르주 당통이지! 좋소, 내 당신 경고대로 하리다. 다만 오를레앙 놈의 비열한 수작에 파리 시민들이 먼저 피를 흘린다면···.”

“그땐 기꺼이 당신 말을 들어드리리다.”

***

파리 도착하면 콩도르세 후작님도 만나봐야 되고, 플로리앙 씨한테 윤전기 어떻게 됐는지도 물어봐야 되고, 또...아 그래 멀미약 사업 확장 관련해서 듀퐁하고 얘기도 해봐야 하고.

할 거 드럽게 많네.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날 보고, 마티유 형이 물었다.

“야, 왜 그렇게 죽상이야?”

“···파리 가서도 쉴 짬이 안 날 것 같아서.”

“어차피 오스트리아 가면 할 일도 없이 짱 박혀 있을 텐데 뭐.”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집에서 쉬는 거랑 먼 곳에서 쉬는 거랑은 다르잖아.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휴식이라니, 불안해서 쉬지도 못하겠다. 말도 안통해, 게다가 채권자네 집이잖아.”

“음, 그렇긴 하지.”

마티유 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아 그러고 보니까 형한테 줄 게 하나 있었다.”

나는 베르사유에서 꾸려온 짐 사이에서 한손에 들어 갈만큼 조그마한 주머니 세 개를 꺼내, 마티유 형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뭔데?”

“공명의 계책ㅂ···, 아니 기욤의 계책보따리지.”

“또 혼자만 알아먹을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뭔지 좀 알려줘 봐.”

“기욤의 계책보따리라니깐?”

내 말에 마티유 형은 날 흘겨보면서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또 뭐 이상한 동양 찌라시 보고 온 거지?”

“어허 찌라시라니!”

감히 대황갓 나관중선생님의 역작을 보고 찌라시라니!

이잉...니들이...삼국지를 알어...? 이래서 양놈들은 안 된다는 거야.

나는 엄격, 근엄, 진지한 얼굴로 마티유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서 종이에 몇 가지 끄적거려 놓은 거야. 저어어얼대 찌라시 같은 게 아니라고.”

“···그냥 말로 하면 되는 거 아니냐?”

“무슨 소리야 지금!”

말로 하라니 이 무슨 사문난적인지.

“아, 아니야? 뭔가 깊은 뜻이 있는 거구나?”

“멋이 없잖아, 멋이!”

마티유 형은 잠깐 입을 벌려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눈을 감고 심호흡을 몇 번한 후, 날 바라보며 말했다.

“···야, 니가 그루시 형이야?”

“아니 그루시 형이냐니, 사람한테 거 말이 좀 심하시네. 그리고 농담을 왜 못받아들인담.”

“그러면 뭐 때문인데.”

“그냥 뭐 앞으로 몇 달 간은 꼼짝없이 빈에서 잡혀 살 텐데 24시간 내내 감시야 붙을 게 당연하니까 얘기야 나누기 힘들 거고, 또 말을 한다 해도 사람이 중간에 잊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마티유 형은 그제서야 대충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런데 계책인지 뭔지는 왜 이렇게 꽁꽁 싸매서 주는 거냐? 이것도 무슨 이유가 있어?”

내가 건넨 형형색색의 보따리 세 개를 흔들며 마티유 형은 내게 물었다.

“아 그 보따리?”

“어.”

“그건 진짜 멋으로 한건데?”

“···.”

“낭만 몰라 낭만?”

“이런 ㅁ···.”

그때 마차 앞 창문이 스르륵 하고 열리더니 마부가 빼꼼 머리를 내밀고 말했다.

“그···손님들 도착했습니다만.”

“아 예, 여기 돈이요.”

내가 지갑을 열어 은화 다섯 닢을 꺼내 마부에게 건네자, 마부는 헤실헤실 거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두 분 다 조심히 들어가십쇼!”

나는 짐을 챙기고 마차에서 내려 앞에 있는 낯익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삭의 민족 : 그르넬흐 본점]

내가 직접 단 지도 이제 6년이 되어가는 간판이, 군데군데 벌레 먹은 그 간판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이야 거의 네 달만 아닌가? 되게 오랜만에 집에 온 기분인 걸.”

“그렇지.”

“사무실이 어떻게 생겼었는지도 가물가물해지는 것 같아.”

“···참나 무슨 애늙은이도 아니고 열아홉 먹은 녀석이 그래? 아무튼 삼 일 뒤 출발 때 보자, 기욤아.”

마티유 형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기 짐을 챙겨 걸어 나갔다.

나도 짐을 챙겨 건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이건 무슨 소리지.

처음 듣는 목소리들이 건물 복도 너머 사무실 쪽에서 웅성거렸다.

‘그러니까 재무총감님을 한 번만 뵙게 해주십쇼!’

‘아 글쎄, 그러려면 베르사유로 가시라니까요? 사장님은 지금 없으시다고 몇 번 말씀드립니까?’

뭐야 왜 이리 소란스러워.

똑똑똑

나는 사무실을 문을 가볍게 두드린 후, 문고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플로리앙 씨, 저 왔어요.”

그러나 사무실 안에는 플로리앙 씨는 없고, 생판 처음 보는 두 사람이 서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뭐야 댁들은 누구세요? 플로리앙 씨는 어디가고...”

설마 오를레앙이 보낸 암살자인가?

내 말에,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잠시 날 쳐다보더니 내게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사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이삭의 민족에 새로 입사한 알렉상드르 페시옹이라고 합니다. 플로리앙 선임님은 잠시 일 때문에 밖에 나가셨습니다.”

“아. 콩도르세 후작님의 추천으로 오신 분이시군요.”

“예! 맞습니다! 사장님 같은 분 밑에서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요, 앞으로 같이 잘 일해봅시다.”

나는 페시옹 씨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나 내 손을 보고 페시옹 씨는 잠시 아-하는 소리를 낼 뿐 내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저...손이 좀 아픈데.”

“아! 예, 예! 죄송합니다.”

페시옹 씨는 그제서야 내 손을 마주잡고 환히 웃었다.

“혹시나 했는데, 사장님은 정말 선입견 같은 게 없으신 분이군요.”

“예? 아.”

페시옹 씨의 흑색 피부색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피부색이.

“피부색이 별겁니까, 어차피 다 똑같은 사람인데요. 일만 잘하면 됐지.”

페시옹 씨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펴졌다.

그 때 페시옹 씨의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근데 저 사람은 누굽니까? 페시옹 씨.”

저 사람, 코가 대단하다.

내 물음에 페시옹 씨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지방에서 올라온 생 쥐스트라는 사람인데···.”

그런 페시옹 씨의 말을 끊으며 코가 참 대단한 내 또래의 청년이 내게 달려와 내 손을 잡고 흔들어대며 입을 열었다.

“기, 기욤 선생님,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 찾아왔습니다!”

“···네?”

“정말, 정말 위대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의회에서 연설하신 모든 내용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뭐야 왜 이래 나 무서워.

“연설문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위대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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