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세상 (3)
‘이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주재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대사. 플로리몽 클로드는 제 귀를 의심했다.
“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머리가 잘 안돌아가는군요.”
결국 클로드 대사는 자신과 동년배인 눈앞의 중년 남자에게 양 손바닥을 활짝펼치며 양해를 구했다.
화려한 군복을 입은 중년 남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클로드 대사에게 답했다.
“이해합니다, 대사님. 천천히 생각하시지요.”
“배려에 감사합니다, 장군.”
클로드 대사는 잠시 턱을 쓸어내리면서 곰곰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장군이 말한 내용을 곱씹다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니까 장군의 말씀은, 귀국 프랑스의 재무총감을 우리 신성로마제국이 국빈으로 초대해주었으면 한다-가 맞습니까?”
“정확합니다, 클로드 대사님.”
장군은 다시 고개를 흔쾌히 끄덕였다.
현 프랑스의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
불과 스물의 나이로 라파예트 국민방위대 사령관, 국민의회 미라보 백작과 함께 현 정부를 이끌고 있으며, 파탄 직전이던 프랑스 경제를 빠르게 회복시키고 있는 경제인.
클로드가 있는 외교가에서도 백 년 전의 명재상이었던 리슐리외 추기경의 재림이라니 하는 소리가 섭섭지 않게 나오는 젊은 수재 아닌가.
물론 엄밀히 따진다면 리슐리외 추기경처럼 섬세하고 간교하기보다는 오히려 막나가는 이미지이긴 하다만, 그가 스물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리슐리외같이 간교한 면 또한 탑재하면 했지 그 반대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사람을 이렇게 혼란한 시기에 타국으로 보낸다고?
“···기욤 재무총감이라면 지금 프랑스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 아닙니까? 전 이해가 잘 안갑니다만.”
“···대사님의 말씀대로, 물론 재무총감은 능력 있는 사람이지요. 그가 프랑스에 필요한 인재라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클로드 대사의 말에 대머리 중년 장군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짓고 답했다.
그리고 장군의 대답에, 외교관으로 수십 년을 굴러다닌 클로드 대사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욤 재무총감이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 필요한 인재인 것도 맞다.
그런 중요한 인재를 바깥으로 내보낸다면 딱 한 가지 경우뿐이다.
‘···오를레앙, 아니 루이 17세와 재무총감의 불화설이 사실이었군.’
몰래 암살하기에는 이미 전 프랑스인이 기욤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으니 암살 후의 후폭풍이 감당되지 않을 테고, 실권이 박살난 왕권으로 견제하는 것도 의회와 시민들이 버티고 있기에 무리가 있으니···, 결국은.
“그래서 이웃인 우리, 신성로마제국을 이용하시겠다는 겁니까?”
“하하, 이용이라니요! 상호 간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자, 이런 뜻입니다. 대사님.”
“으음.”
클로드 대사는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대고서는 깊은 속에서부터 짧게 신음을 흘렸다.
장군은 클로드 대사를 향해 몸을 기울인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드 대사님.”
“예, 뒤무리에 장군.”
“귀국의 카이저이신 요제프 2세 폐하를 생각해보십시오.”
“···타국인 입에서 황제 폐하의 성함이 나오는 게 별로 유쾌하지는 않습니다만.”
“실례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시지요.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대사님. 기욤 재무총감이 누구입니까.”
“···능력 있는 경제인이지요.”
“그리고 혁명의 얼굴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음.”
“귀국의 카이저께서 그 동안 개혁을 하고자 했을 때 가장 반대하던 작자들이 대체 누구였습니까.”
클로드는 다시 몸을 일으켜 뒤무리에 장군의 눈을 같은 높이에서 마주보았다.
“···기욤 그 자를 이용해 독일 제후들과 성직자들을 견제해보라 이 말씀이십니까.”
“제가 굳이 답하지 않아도 대사님께서는 답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
클로드 대사는 아무 말 없이 턱을 쓸어내렸다.
클로드가 충성을 바치는 카이저, 요제프 2세.
어머니, 섭정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거대한 그늘 속, 새장의 새가 되어 뜻 한번 자유롭게 펴지 못하다가 끝내 시들어버린 사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를 꿈꾸며 개혁을 실시했지만 제후들과 성직자등 기득권의 방해 때문에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어버리자, 지금은 수도 빈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불쌍한 사람.
고요함도 잠시, 뒤무리에는 다시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기욤 드 툴롱, 지금 유럽에서 푸른 피에게 가장 위협적인 사내 아닙니까. 기욤 총감이 신성로마제국으로 자리를 잠시 옮긴다면 성직자니 제후니 하는 작자들도 지레 몸을 사리겠지요.”
“···우리 제국에서는 기욤 그 자를 이용해 푸른 피들을 견제하고, 기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장군이 모시는...‘그 분’은 체제를 확고히 하겠다. 이 말입니까.”
뒤무리에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말이 통하니 좋군요. 그럼 합의가 된 걸로 알고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장군.”
“클로드 대사님도 편안한 밤 되시길.”
뒤무리에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삼각군모를 머리에 쓰고 대사관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에서 군홧발이 나무를 밟는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방에 혼자 남은 클로드 대사는 그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낮게 읊조렸다.
“···외교라는 체스판은 수십 년을 굴러도 그저 역겹기만 하군.”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대사!”
쾅!
미라보 백작은 집무실 책상을 있는 힘껏 치면서 일어나 외쳤다.
“타국의 대신 급 인사인 재무총감을 오라가라하는 경우가 어디 있냐는 말이오!”
미라보는 눈앞의 신성로마제국 대사에게 삿대질까지 하면서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클로드 대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진노하셔도 본국의 결정은 철회할 수 없습니다, 백작님. 그리고 이런 말은 안하려고 했으나.”
클로드 대사는 미라보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했다.
“우리 합스부르크가 귀국에 제공한 차관이 얼마나 되는 지 아시지 않습니까.”
미라보의 입 안에서 으드득-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지금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그저 동맹국 프랑스의 경제를 순식간에 안정시킨 재능 있는 재무총감이 가진 고견을 묻고자 할 뿐입니다. 우리 제국도 항상 말썽거리는 경제이니 말입니다.”
당장 디드로와 달랑베르도 프랑스인이지만 우리 제국에도 잠시 머무르지 않았습니까. 클로드 대사가 덧붙였다.
“만약 우리 의회가 거부한다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백작님.”
“···우리에게도 잠시 시간을 주시오.”
“물론입니다. 인수인계는 모두 끝낼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클로드 대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라보 백작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미라보는 잠시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자신의 옆을 바라보고 말했다.
“···시에예스 의원. 의원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시에예스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답했다.
“후. 이거 참, 외통수군요.”
“그래, 외통수지. 난 오를레앙 그 놈 속이 이렇게 검을 줄은 몰랐소!”
“오를레앙 그 자가 제 성격을 워낙 잘 숨긴 것이지요.”
루이 17세, 아니 오를레앙이 재무총감의 집무실에 처 들어가 멱살을 잡았다는 건 이미 국민의회 의원들이 모두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고,
덕분에 의회는 2:1로 나뉘어 다시 총성 없는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개헌 의석을 7할이 아니라 6할로 잡을 걸 그랬소.”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하는 미라보에게, 시에예스는 의외라는 눈빛과 함께 입을 열었다.
“···개헌이니 뭐니 그렇게 평화롭게 이 사태가 해결될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미라보는 그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한 얘기로, 힘들다고 보오. 다만, 나마저 분노에 차 소리친다면 정말 총칼로 프랑스인끼리 죽고 죽이지 않겠소...? 그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일어나게 둘 수 없소.”
“글쎄요.”
시에예스는 미라보의 말에도 냉담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바스티유도 그리 이성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잖습니까?”
“···베르사유가, 바스티유가 될 수도 있다 그 말이오?”
“전 이미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오늘 신성로마제국 대사가 왔다감으로서 이제는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백작.”
“···.”
시에예스는 자신의 말에 침묵하고 있는 미라보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욤 재무총감에게는 제가 일단 말해놓겠습니다. 백작도 심신을 좀 추스르십시오. 아, 그리고.”
방을 나가기 전, 시에예스는 미라보를 다시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어떤 혼란이 오던, 살아남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 명심하세요.”
***
이야 엿을 이 정도로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주시기까지 하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는걸?
“오를레앙 이 씨발새끼가 뒤질라고 진짜.”
“야! 사제님 앞인데...”
“뭐, 씨발새끼가 맞긴 하지요, 마티유 대위. 하하하!”
“아니, 사제님까지 그러시면 기욤 이 새ㄲ···, 아니 이 녀석 버릇 더 나빠진단 말입니다.”
“어허 음해하지 마시라니깐.”
한 마디 했다고 또또 째려보는 거봐.
“···그것보다, 기욤 자네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방법이 없는가?”
나와 마티유 형의 모습에 잠시 미소를 머금던 시에예스 사제님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잠시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지금 지고 있는 채무 중 신성로마제국에 해당하는 금액은 약 10억 리브르.
그 중 저금리로 빌린 채무를 제외하면 약 7억 리브르 정도가 고금리 채무다, 즉 무조건 갚아야 할 돈이라는 거지.
아 진짜 죽창마렵네. 대충 아무 집 들어가서 가계부 쓰는 아주머니들한테 재정을 맡겨도 이 정도로 욕 나오게 운영은 안했을 거다.
게다가 교회에게 압류한 있는 재산은 아직 다 파악하지 못했고, 아직도 지방에서는 압류와 감사가 계속되는 중이란 말이다.
애초에 겨우 네 달 만에 그게 가능했으면 그게 21세기 한국이지 18세기 프랑 스냐.
따라서 현재 신성로마제국이 채무를 한 번에 갚으라고 선언하면 프랑스는 바로 국가 파산을 신청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흑흑 채무자가 이렇게 비참하답니다.
나는 시에예스 사제님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만약 1년 정도 시간이 있었다면 몰랐겠지만, 지금 우리는 꼼짝없이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도저히 수가 안 보이는가?”
“지금 돈 나가는 것만 해도 빈민 구제를 위한 곡물 구매비에 상하수도 정비, 공무원들 임금까지 상당합니다. 만약 당장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겨우 줄인 세율을 다시 높일 수밖에 없는데 이건···.”
“···바로 반란이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네, 기욤 군.”
내 말에 시에예스 사제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민들의 지지로 만들어진 혁명정부가 세금을 올린다? 아 시민들 입장에서는 죽창 마렵지.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에 제가 세워놓은 정책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갈 사람을 재무총감 자리에 세워놓는 것 뿐입니다.”
“음. 생각해둔 사람이 있는가?”
“뭐, 콩도르세 후작님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세국장이셔서 경제에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고 라파예트 후작의 친우니까 말이죠.”
“확실히, 믿을 만 하구만.”
“아, 그리고 제가 오스트리아로 가는 길에 호위를 맡을 사람 말입니다. 마티유 형을 포함해서 제가 짤 수 있게 해주십쇼. 오를레앙 그 새끼는 믿을 수가 없으니.”
“뭐? 아니 내가 기욤 니 따까리야? 난 싫어! 프랑스에 있을 거라고!”
“음, 기욤 군 말은 라파예트 사령관에게 내가 잘 말해놓겠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한 가지입니다, 사제님. 이건 시간 싸움이라는거. 제가 손님으로 초청받는 이상 포로도 아니고 오스트리아에 영영 잡아놓지는 못할 겁니다. 아마 서너 달이 한계겠지요.”
“잘 알겠네. 부디 조심히 다녀오게나.”
"물론입니다, 사제님."
1790년 1월 19일의 일이었다.
?